미코노스의 어느 멋진 날
아주 오래전에 우린 마주쳤지
서로 알아봤어
운명이란 말도 필요 없어 우리는
어렴풋한 얘기지 지나버린
믿기 힘든 말투지 하지만
넌 나에게 100퍼센트
더 말할 게 없는
나를 봐 뒤돌아봐
날 알아줘
- 보드카레인, '100퍼센트' 노랫말 중에서
100퍼센트 완벽한 여행지. 눈부시게 맑은 하늘과 끝없는 푸른 바다 사이에 새하얀 집들이 새파란 지붕을 머리에 얹고 바다를 향해 앉아 있다. 모아이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것처럼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풍경은 단지 자연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마을을 단장한다. 섬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거대한 풍경화를 그리듯 벽과 지붕을 칠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 되었다. 전 세계의 관광객들은 그 하얀 벽을 배경으로 파란 창문 곁에 서서 인생 최고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곳으로 모여든다. 일생에 한 번뿐인 허니문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곳은 바로 미코노스(Mykonos) 섬과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예쁜 캐리어를 끌며 신혼여행으로 왔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누가 봐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으로 그리스 에게 해 투어 첫 번째 목적지인 미코노스 섬으로 왔다. 누군가에게는 신혼여행지, 누군가에게는 누드 해변과 비치 클럽 파티로 기억될 미코노스 섬이지만, 나에게 미코노스는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 숲)의 고향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상실의 시대>를 집필했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미코노스 섬은 성지(聖地)였다.
20대를 보내는 동안 해마다 여름이면 하루키 소설을 읽었었다. 주인공들이 25m 풀장을 가득 채울 만큼의 맥주를 마시면, 나도 덩달아 자취방 구석에 맥주병을 산처럼 쌓았다. 그들이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음악을 들으면 나도 들었고, 그들이 야나체크(Janacek)의 신포니에타(Sinfonietta)를 들으면 클래식 음악이 뭔지도 모르면서 귀에 꽂고 있었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날 마지막으로 읽었던 작품이 <상실의 시대>였다. 몇 번이나 읽었던 그 작품을 그리고 그 두꺼운 책을 밤새 읽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겉멋이 가득 차기 마련인 20대였으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날의 기분이나 그때의 감상은 떠오르지 않지만, 13년 전 이맘때쯤 입대를 앞두고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는 기억은 뚜렷하다. 그래서 꼭 미코노스 섬에 왔어야 했다.
미코노스에서 하루키를 찾고 싶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3년을 지냈을까. 미코노스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보고 있으면 나에게도 하루키 같은 영감이 찾아올까. 어쩌면 미코노스에서 와타나베와 키즈키, 미도리와 레이코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놀이 공원에서 외치는 것처럼 미코노스는 나에게 '꿈과 환상의 나라'였다.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 집필한 미코노스 섬
미코노스 섬 전체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인 파라다이스 비치 리조트의 캠핑장에 도착해서 침대보다 먼저 도마뱀과 인사를 했다. 삐걱거리는 선풍기는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콘센트에 꽂아놓은 여행용 전기 쿠커는 언제나처럼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물을 팔팔 끓여주었다. 라면 스프를 풀고 파스타 면을 끓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을 먹었지만, 해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신나는 클럽 음악은 마음을 들뜨게 해주었다. 저녁노을을 받은 바다는 붉게 물들었고, 젊은이들은 시간이 살짝 비켜 서 있는 비치 클럽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거점 마을인 타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차를 타고 한참을 와야 하는 파라다이스 비치는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물론 비싼 술값을 감당할 수도 없고, 밤새 춤을 추고 놀 만큼 체력이 넘치지도 않는 나는 그저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지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말이다.
미코노스 섬은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기 때문에 대중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다. 섬에서 운영하는 로컬버스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주요 해변을 중심으로 운행했는데 배차 시간도 길고 요금도 비쌌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스쿠터를 빌리기 위해 타운으로 갔다. 타운의 정식 명칭은 '호라(Hora)'인데 모두들 그냥 타운이라고 불렀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미코노스에 머물면서 타운은 매일 한 번씩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물론 숙소가 타운에 있으면 좋겠지만, 한여름 성수기에 타운의 숙소들은 호기심으로 한 번 물어보기도 민망할 만큼 가격이 비쌌다. 미코노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타운에서 찾을 수 있다.
'리틀 베니스'라 불리는 호라의 해변은 정말 사진으로 보던 베네치아와 닮아 있었다. 실제로 미코노스가 과거에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베네치아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들이란다. 바다를 향해 나 있는 창문과 발코니들이 그림 같았다. 그릭도어(Greek door)라 불리는 파란 대문과 창문들이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과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을 텐데 이제는 그것이 관광 자원이 되어 지금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니 참 아이러니다.
미코노스의 상징과도 같은 풍차도 호라에 있다. 바다를 향해 줄지어 선 다섯 개의 풍차는 미코노스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힘차게 돌며 곡식을 빻았지만, 지금은 그 기능을 잃고 그저 관광용으로만 서 있다. 이미 사진으로 책으로 참 많이 보던 장면이었다.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괜히 두근거리고 설?다. 미코노스를 검색하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피사체를 똑같은 각도에서 찍었는지 직접 보니까 이해가 쉬웠다. 나 역시 미코노스 타운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5개의 풍차니까.
1년 내내 클럽 파티가 벌어지는 해변
호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건물들 사이로 미로처럼 뻗은 골목을 품고 있어서 구석구석 돌아보려면 한참 발품을 팔아야 한다. 여유가 넘치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답게 호라의 좁은 골목들에는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매장들이 즐비했다. 입이 쩍 벌어지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옷과 보석들이 전시된 고급 부티크들 사이로 걸으면 미코노스의 전통 가옥들이 만들어내는 소박한 풍경과 달라서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해외 명품 브랜드의 매장들도 자기 브랜드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미코노스의 풍경에 녹아들어 있어서 묘한 이질감은 그대로 호라의 독특함으로 기억되어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 매장은 세계 최초로 영어가 아닌 현지 언어로 간판을 달고, 전통 기와와 창호 디자인으로 외관을 꾸몄다. 외국 자본이 우리나라 상권을 잠식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는 것은 좋은 태도인 것 같다. 미코노스에서도 이들 브랜드가 미코노스의 풍경을 해치고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물론 명품 브랜드나 고급 부티크가 아니라 미코노스 현지인들의 삶이 녹아 있는 거리였다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 같지만 말이다.
호라의 골목을 헤매고 다니다가 배도 고프고 인터넷을 사용할 일도 있어서 그 유명한 '그릭 요거트'를 먹어보기로 했다. 미코노스의 모든 가게가 그렇듯 작고 아담한 요거트 가게는 테이블 세 개가 전부였다.
요거트를 주문하고 앉아 있으니 팥빙수 그릇만 한 대접을 하나 갖다 준다. 가격이 저렴해서 조그만 젤라또 한 스쿱 정도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푸짐하게 주어서 참 흐뭇했다. 그릭 요거트의 핵심은 그 특유의 찰진 식감인데, 한 스푼 가득 떠서 뒤집어도 요거트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릭 요거트에 유기농 꿀을 섞어서 떠먹으면 그야말로 '몸이 건강해지는 맛'이다. 우리나라 슈퍼마켓에서 파는 요거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요거트를 먹는 게 아니라 밥을 퍼 먹는 것처럼 커다란 수저로 그릭 요거트를 푹푹 퍼먹었더니 그대로 한 끼 식사가 되어 주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스쿠터를 빌리러 갔다. 호라의 버스 정거장 주변에는 미코노스의 교통 사정을 알려주듯 렌터카와 스쿠터를 빌려주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영업을 하는 데도 스쿠터 렌트비가 가게마다 달랐다. 가격 담합을 하지 않아서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또 한참 발품을 팔아야 했다.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낡은 스쿠터를 빌릴 수 있었다.
스쿠터를 빌려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형 할인마트였다. 미코노스에는 까르푸와 알파비따 마트가 여러 군데에 있었다. 숙소 근처의 미니 마켓은 모든 것이 비쌌기 때문에 3일간 먹을 식량을 비축해야 했다. 슈퍼마켓에서 사는 식자재 가격은 그리스 본토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보다도 저렴했다.
여행용 전기 쿠커만 있으면 밥, 국, 파스타 등등을 모두 해 먹을 수 있어서 상하지 않는 것들을 잔뜩 사서 스쿠터 앞뒤에 실었다. 리조트의 음식이 너무 비싸서 물 한 병 마시는 것도 조마조마했는데, 스쿠터 가득 실려있는 음식들을 보니 쳐다만 봐도 마음이 든든했다. 이날 산 것들은 미코노스에 지내는 3일 동안 비싸고 맛없는 리조트 음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기술이 늘었지만, 그중에서 특히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중국인 슈퍼마켓에서 춘장을 사서 그럴싸한 자장면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스쿠터를 타고 미코노스 섬 투어를 시작했다. 미코노스는 해안가 곳곳에 크고 작은 해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해변만 21곳에 달했다. 미코노스 본 섬 외에 델로스 섬과 라니아 섬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났다. 그리고 해변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슈퍼 파라다이스 비치(Super Paradise Beach)와 파라다이스 비치(Paradise Beach)는 1년 내내 클럽 파티가 벌어져서 전 세계의 젊은이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또한 누드가 허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모두가 누드로 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아주 가끔 용감한 사람들이 누드비치를 즐기고 있었다. 칼라파티스 비치(Kalafatis Beach)는 그리스 정부가 인정한 청정 해변이다. 현지 사람들은 에코 비치(Eco Beach)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쿠버 다이빙과 윈드서핑 같은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엘리아 비치(Elia Beach)는 미코노스 섬에서 손꼽히는 긴 해변과 잘 갖추어진 편의시설 때문에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지내기에 좋아 보였다. 그 외에도 간이매점 하나 없는 작은 해변들도 어떻게들 알고 찾아가는지 곳곳에서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미코노스를 찾는 관광객들은 이들 해변 중 자신의 여행 목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바다를 즐겼다.
스쿠터를 타고 해변이 아니라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마을을 보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이나 머물렀다는데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클럽 비치에서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어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코노스 섬의 또 다른 풍경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해변이 아닌 내륙으로 스쿠터를 몰았다.
호라 마을에 이어 미코노스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이라는 아노 메라(AnoMera)로 가는 길은 우리네 시골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염소와 소들이 논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다만, 멀리 갈 수 없도록 앞다리와 뒷다리를 줄로 묶어 놓아서 걷는 것이 불편해 보였다. 누군가가 내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줄로 묶어 놓는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묶여 있는 다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염소를 만나면 또 길을 잠깐 멈추고, 동키를 만나면 또 길을 잠깐 멈추고, 멋진 해안선을 만나면 또 길을 멈추며 아노 메라로 갔다. 돌담을 쌓아 길을 내고, 돌담으로 논밭을 구별해 놓은 곳을 보니 제주도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물론 어디를 보더라도 제주도 보다 예쁘지는 않았다. 해변 마을의 풍경은 이곳 사람들의 노력과 에게 해의 물빛이 더해져 미코노스가 더 예뻤다. 하지만 미코노스 섬의 안쪽은 어린 나비가 바다로 착각했다는 청무우밭 사이로 난 돌담길을 돌아가는 제주 올레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넉넉하고 소담한 제주의 그 풍경과 달리 미코노스는 쓸쓸한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푸른 바다는 가졌지만, 푸른 산은 없었다.
그제야 해변 마을이 유달리 그림 같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산과 나무가 없어서 사람 손으로 지은 인공물들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색깔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화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화려함은 금세 지루함으로 바뀌어 버려, 미코노스에서 사흘 밤과 나흘 낮을 보내고 나니 그 예쁜 풍경 앞에서도 나는 점점 무덤덤해져 갔다.
아노 메라는 중심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 커다란 공영 주차장이 있었다. 마을 중심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작고 아담한 식당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만나면 언제나 반가운 슈퍼마켓도 광장 한 편에 있었다. 중심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붉은 지붕으로 유명한 파나기아 투리안니 수도원(PanagiaTourliani Monastery)을 제외하면 딱히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성당은 내부 장식을 모두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했단다.
규모도 크지 않은 곳이라 화려하게 꾸민 내부는 여유 공간 없이 가득 차 버려서 보는 이를 답답하게 했다. 오후의 붉은 해가 실내에 비치자 황금색을 칠한 액자와 장식들이 번쩍번쩍 일렁인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신들이 '황금'을 좋아할까? 황금 불상, 황금 성당을 만들면 신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신에게 더 잘 전달될까?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으면서 시답잖은 생각을 해본다. 석가모니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와 명예를 다 버리고 해탈하여 부처님이 되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은 석가모니 불상에 금칠을 하고 있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가 이런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실까 정말 궁금하다.
섬을 그렇게 좋아했다던 하루키의 마음이 이해됐다
찜찜한 기분으로 성당을 나와 마을 광장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다 보니 바람이 무척 많이 불었다. 한 무리의 인도인들이 시끄럽게 몰려오더니 자기들끼리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사진을 참 좋아한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
인도 여행할 때 어색한 순간을 없애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카메라를 꺼내는 것이다. 그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진을 중심으로 두터운 친구가 된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어서 모두의 손에 카메라가 하나씩 있지만, 10년 전에 처음 인도를 갔을 때만 해도 카메라는 귀한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기들끼리 한참을 찍더니 이번에는 나에게 와서 사진을 찍어 달란다. 같은 장소에 서서 다른 포즈로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경쟁하는 대회가 있다면 단언컨대 인도 사람들이 1등일 것이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 주고 나니 이번에는 나보고 자기들이 찍었던 자리에 가서 서 보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사진을 찍으니 그게 아니라며 다양한 포즈를 요청해 왔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근엄한 국어교사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좋다며 손뼉을 친다.
아주 오랜만에 '나마스떼'와 '나마스까'를 주고받으며 인사하고 헤어지니 인도가 그리워졌다. 내년 봄에는 인도로 갈 텐데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면 설렌다.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은 다 없어지고, 즐거웠던 기억만 남아 있는 인도. 막상 여행을 시작하면 또 사기를 당하고, 악을 쓰고, 짜증을 내고, 웃고, 울고 하겠지.
다시 스쿠터 시동을 걸고 구석구석에 있는 해변들을 찾아 나섰다. 해변마다 각자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잠깐씩 머물다 나오는 것만으로 시간이 금방 흘렀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비치파라솔이 해변을 뒤덮은 곳이 있는가 하면 쓸쓸함이 잔뜩 묻어나는 해변도 있었다. 해양 레포츠가 발달해 있다는 해변에는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곳이 신기루처럼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미코노스 곳곳을 진득하게 즐기려면 한 달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키는 3년을 미코노스에서 살았나 싶었다.
스쿠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 풍경들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황량한 들판과 민둥산을 보며 달리니 이제야 미코노스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미코노스하면 떠오르는 그 하얀 집과 파란 지붕은 호라 마을을 중심으로 한 서쪽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동쪽 마을은 새롭게 관광지로 개발하는 곳만 듬성듬성 새하얀 집들이 있었다. 그곳은 쓸쓸하고 황량했다.
미코노스 동쪽 지역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준다면 누구도 이곳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코노스 섬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나무 전봇대가 서 있고, 염소 무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는 이 풍경이 내게는 훨씬 정감있게 다가왔다. 호화 유람선과 쏟아지는 관광객과 밤낮없이 이어지는 클럽 파티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나와서야 에게 해에 둘러싸인 작은 섬의 그 소담한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스쿠터를 반납하기 위해 다시 호라 마을로 향했다. 다시금 미코노스는 저무는 붉은 햇볕으로 단아하게 단장을 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광객들도 각자의 탈 것들을 길가에 세워두고 언덕 위로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은 것은 햇볕이 잘 드는 명당자리에 앉아 털을 고르며 하품을 하는 들고양이들뿐이었다. 마을의 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서서 해가 지는 속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호라 마을을 보고 있으니 이 섬을 그렇게 좋아했다던 하루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쏟아지는 별빛과 무서운 모기와 시끄러운 클럽 음악과 바다 냄새와 같은 밀도의 맥주 냄새에 취해 미코노스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 목적지는 산토리니 섬이다. 사실 미코노스에서 에게 해의 섬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느껴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토리니를 제외하고 크레타 섬으로 바로 가려고 했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도 산토리니는 '미코노스보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예쁜 곳' 정도라고 했다. 미코노스를 갔다면 굳이 산토리니는 갈 필요가 없고, 산토리니를 갔다면 미코노스는 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산토리니행 배편은 운항 거리도 짧은데 비용은 크레타로 가는 것보다도 비쌌다. 워낙 유명한 곳인 데다가 성수기가 겹쳐서 그런 것 같았다.
지나온 여행지를 떠올려보면 또 가고 싶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마음속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실 미코노스는 굳이 나누자면 후자에 속했다. 정말 예쁜데 그냥 예쁘기만 해서 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냥 '오직 예쁘기만 한 곳'의 정점이 산토리니였다. 하지만 결론은 그러니까 가보자 싶었다.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곳이니까 왠지 숙제하는 마음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섬을 만들어 보자고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작정하고 꾸민 섬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수많은 화보와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했던 그 파란 지붕을 사진으로 찍어 보자는 숙제를 안고 페리 예약을 했다.
<기사 출처 : 오마이뉴스>
▲ 멀리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새하얀 집과 파란 지붕은 그리스 섬들의 상징이다. |
ⓒ 한성은 |
아주 오래전에 우린 마주쳤지
서로 알아봤어
운명이란 말도 필요 없어 우리는
어렴풋한 얘기지 지나버린
믿기 힘든 말투지 하지만
넌 나에게 100퍼센트
더 말할 게 없는
나를 봐 뒤돌아봐
날 알아줘
- 보드카레인, '100퍼센트' 노랫말 중에서
100퍼센트 완벽한 여행지. 눈부시게 맑은 하늘과 끝없는 푸른 바다 사이에 새하얀 집들이 새파란 지붕을 머리에 얹고 바다를 향해 앉아 있다. 모아이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것처럼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풍경은 단지 자연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마을을 단장한다. 섬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거대한 풍경화를 그리듯 벽과 지붕을 칠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 되었다. 전 세계의 관광객들은 그 하얀 벽을 배경으로 파란 창문 곁에 서서 인생 최고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곳으로 모여든다. 일생에 한 번뿐인 허니문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곳은 바로 미코노스(Mykonos) 섬과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예쁜 캐리어를 끌며 신혼여행으로 왔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누가 봐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으로 그리스 에게 해 투어 첫 번째 목적지인 미코노스 섬으로 왔다. 누군가에게는 신혼여행지, 누군가에게는 누드 해변과 비치 클럽 파티로 기억될 미코노스 섬이지만, 나에게 미코노스는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 숲)의 고향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상실의 시대>를 집필했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미코노스 섬은 성지(聖地)였다.
20대를 보내는 동안 해마다 여름이면 하루키 소설을 읽었었다. 주인공들이 25m 풀장을 가득 채울 만큼의 맥주를 마시면, 나도 덩달아 자취방 구석에 맥주병을 산처럼 쌓았다. 그들이 비치 보이스(Beach Boys)의 음악을 들으면 나도 들었고, 그들이 야나체크(Janacek)의 신포니에타(Sinfonietta)를 들으면 클래식 음악이 뭔지도 모르면서 귀에 꽂고 있었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날 마지막으로 읽었던 작품이 <상실의 시대>였다. 몇 번이나 읽었던 그 작품을 그리고 그 두꺼운 책을 밤새 읽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겉멋이 가득 차기 마련인 20대였으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날의 기분이나 그때의 감상은 떠오르지 않지만, 13년 전 이맘때쯤 입대를 앞두고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는 기억은 뚜렷하다. 그래서 꼭 미코노스 섬에 왔어야 했다.
미코노스에서 하루키를 찾고 싶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3년을 지냈을까. 미코노스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보고 있으면 나에게도 하루키 같은 영감이 찾아올까. 어쩌면 미코노스에서 와타나베와 키즈키, 미도리와 레이코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느 놀이 공원에서 외치는 것처럼 미코노스는 나에게 '꿈과 환상의 나라'였다.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 집필한 미코노스 섬
▲ 파라다이스 비치는 누드가 허용되는 해변이다. |
ⓒ 한성은 |
▲ 비치 클럽에서는 뜨거운 한낮에도 파티가 열린다. |
ⓒ 한성은 |
미코노스 섬 전체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인 파라다이스 비치 리조트의 캠핑장에 도착해서 침대보다 먼저 도마뱀과 인사를 했다. 삐걱거리는 선풍기는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콘센트에 꽂아놓은 여행용 전기 쿠커는 언제나처럼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물을 팔팔 끓여주었다. 라면 스프를 풀고 파스타 면을 끓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을 먹었지만, 해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신나는 클럽 음악은 마음을 들뜨게 해주었다. 저녁노을을 받은 바다는 붉게 물들었고, 젊은이들은 시간이 살짝 비켜 서 있는 비치 클럽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거점 마을인 타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차를 타고 한참을 와야 하는 파라다이스 비치는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물론 비싼 술값을 감당할 수도 없고, 밤새 춤을 추고 놀 만큼 체력이 넘치지도 않는 나는 그저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지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말이다.
미코노스 섬은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기 때문에 대중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다. 섬에서 운영하는 로컬버스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주요 해변을 중심으로 운행했는데 배차 시간도 길고 요금도 비쌌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스쿠터를 빌리기 위해 타운으로 갔다. 타운의 정식 명칭은 '호라(Hora)'인데 모두들 그냥 타운이라고 불렀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미코노스에 머물면서 타운은 매일 한 번씩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물론 숙소가 타운에 있으면 좋겠지만, 한여름 성수기에 타운의 숙소들은 호기심으로 한 번 물어보기도 민망할 만큼 가격이 비쌌다. 미코노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타운에서 찾을 수 있다.
'리틀 베니스'라 불리는 호라의 해변은 정말 사진으로 보던 베네치아와 닮아 있었다. 실제로 미코노스가 과거에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베네치아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들이란다. 바다를 향해 나 있는 창문과 발코니들이 그림 같았다. 그릭도어(Greek door)라 불리는 파란 대문과 창문들이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과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을 텐데 이제는 그것이 관광 자원이 되어 지금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니 참 아이러니다.
미코노스의 상징과도 같은 풍차도 호라에 있다. 바다를 향해 줄지어 선 다섯 개의 풍차는 미코노스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힘차게 돌며 곡식을 빻았지만, 지금은 그 기능을 잃고 그저 관광용으로만 서 있다. 이미 사진으로 책으로 참 많이 보던 장면이었다.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괜히 두근거리고 설?다. 미코노스를 검색하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피사체를 똑같은 각도에서 찍었는지 직접 보니까 이해가 쉬웠다. 나 역시 미코노스 타운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5개의 풍차니까.
▲ 타운이라 불리는 호라 마을의 전경. |
ⓒ 한성은 |
▲ 미코노스를 상징하는 5개의 풍차. |
ⓒ 한성은 |
1년 내내 클럽 파티가 벌어지는 해변
호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건물들 사이로 미로처럼 뻗은 골목을 품고 있어서 구석구석 돌아보려면 한참 발품을 팔아야 한다. 여유가 넘치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답게 호라의 좁은 골목들에는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매장들이 즐비했다. 입이 쩍 벌어지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옷과 보석들이 전시된 고급 부티크들 사이로 걸으면 미코노스의 전통 가옥들이 만들어내는 소박한 풍경과 달라서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해외 명품 브랜드의 매장들도 자기 브랜드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미코노스의 풍경에 녹아들어 있어서 묘한 이질감은 그대로 호라의 독특함으로 기억되어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 매장은 세계 최초로 영어가 아닌 현지 언어로 간판을 달고, 전통 기와와 창호 디자인으로 외관을 꾸몄다. 외국 자본이 우리나라 상권을 잠식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현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는 것은 좋은 태도인 것 같다. 미코노스에서도 이들 브랜드가 미코노스의 풍경을 해치고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물론 명품 브랜드나 고급 부티크가 아니라 미코노스 현지인들의 삶이 녹아 있는 거리였다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 같지만 말이다.
호라의 골목을 헤매고 다니다가 배도 고프고 인터넷을 사용할 일도 있어서 그 유명한 '그릭 요거트'를 먹어보기로 했다. 미코노스의 모든 가게가 그렇듯 작고 아담한 요거트 가게는 테이블 세 개가 전부였다.
요거트를 주문하고 앉아 있으니 팥빙수 그릇만 한 대접을 하나 갖다 준다. 가격이 저렴해서 조그만 젤라또 한 스쿱 정도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푸짐하게 주어서 참 흐뭇했다. 그릭 요거트의 핵심은 그 특유의 찰진 식감인데, 한 스푼 가득 떠서 뒤집어도 요거트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릭 요거트에 유기농 꿀을 섞어서 떠먹으면 그야말로 '몸이 건강해지는 맛'이다. 우리나라 슈퍼마켓에서 파는 요거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요거트를 먹는 게 아니라 밥을 퍼 먹는 것처럼 커다란 수저로 그릭 요거트를 푹푹 퍼먹었더니 그대로 한 끼 식사가 되어 주었다.
▲ 한 끼 식사로도 손색 없었던 정통 그릭 요거트. |
ⓒ 한성은 |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스쿠터를 빌리러 갔다. 호라의 버스 정거장 주변에는 미코노스의 교통 사정을 알려주듯 렌터카와 스쿠터를 빌려주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영업을 하는 데도 스쿠터 렌트비가 가게마다 달랐다. 가격 담합을 하지 않아서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또 한참 발품을 팔아야 했다.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낡은 스쿠터를 빌릴 수 있었다.
스쿠터를 빌려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형 할인마트였다. 미코노스에는 까르푸와 알파비따 마트가 여러 군데에 있었다. 숙소 근처의 미니 마켓은 모든 것이 비쌌기 때문에 3일간 먹을 식량을 비축해야 했다. 슈퍼마켓에서 사는 식자재 가격은 그리스 본토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보다도 저렴했다.
여행용 전기 쿠커만 있으면 밥, 국, 파스타 등등을 모두 해 먹을 수 있어서 상하지 않는 것들을 잔뜩 사서 스쿠터 앞뒤에 실었다. 리조트의 음식이 너무 비싸서 물 한 병 마시는 것도 조마조마했는데, 스쿠터 가득 실려있는 음식들을 보니 쳐다만 봐도 마음이 든든했다. 이날 산 것들은 미코노스에 지내는 3일 동안 비싸고 맛없는 리조트 음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기술이 늘었지만, 그중에서 특히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중국인 슈퍼마켓에서 춘장을 사서 그럴싸한 자장면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스쿠터를 타고 미코노스 섬 투어를 시작했다. 미코노스는 해안가 곳곳에 크고 작은 해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지도에 표시된 해변만 21곳에 달했다. 미코노스 본 섬 외에 델로스 섬과 라니아 섬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났다. 그리고 해변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슈퍼 파라다이스 비치(Super Paradise Beach)와 파라다이스 비치(Paradise Beach)는 1년 내내 클럽 파티가 벌어져서 전 세계의 젊은이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또한 누드가 허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모두가 누드로 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아주 가끔 용감한 사람들이 누드비치를 즐기고 있었다. 칼라파티스 비치(Kalafatis Beach)는 그리스 정부가 인정한 청정 해변이다. 현지 사람들은 에코 비치(Eco Beach)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쿠버 다이빙과 윈드서핑 같은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엘리아 비치(Elia Beach)는 미코노스 섬에서 손꼽히는 긴 해변과 잘 갖추어진 편의시설 때문에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지내기에 좋아 보였다. 그 외에도 간이매점 하나 없는 작은 해변들도 어떻게들 알고 찾아가는지 곳곳에서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미코노스를 찾는 관광객들은 이들 해변 중 자신의 여행 목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바다를 즐겼다.
▲ 미코노스에는 특색있는 해변들이 많다. |
ⓒ 한성은 |
▲ 가족 단위 여행자들도 편하게 쉴 수 있는 해변. |
ⓒ 한성은 |
스쿠터를 타고 해변이 아니라 섬 안쪽으로 들어갔다.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마을을 보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이나 머물렀다는데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클럽 비치에서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어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코노스 섬의 또 다른 풍경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해변이 아닌 내륙으로 스쿠터를 몰았다.
호라 마을에 이어 미코노스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이라는 아노 메라(AnoMera)로 가는 길은 우리네 시골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염소와 소들이 논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다만, 멀리 갈 수 없도록 앞다리와 뒷다리를 줄로 묶어 놓아서 걷는 것이 불편해 보였다. 누군가가 내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줄로 묶어 놓는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묶여 있는 다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염소를 만나면 또 길을 잠깐 멈추고, 동키를 만나면 또 길을 잠깐 멈추고, 멋진 해안선을 만나면 또 길을 멈추며 아노 메라로 갔다. 돌담을 쌓아 길을 내고, 돌담으로 논밭을 구별해 놓은 곳을 보니 제주도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물론 어디를 보더라도 제주도 보다 예쁘지는 않았다. 해변 마을의 풍경은 이곳 사람들의 노력과 에게 해의 물빛이 더해져 미코노스가 더 예뻤다. 하지만 미코노스 섬의 안쪽은 어린 나비가 바다로 착각했다는 청무우밭 사이로 난 돌담길을 돌아가는 제주 올레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넉넉하고 소담한 제주의 그 풍경과 달리 미코노스는 쓸쓸한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푸른 바다는 가졌지만, 푸른 산은 없었다.
그제야 해변 마을이 유달리 그림 같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산과 나무가 없어서 사람 손으로 지은 인공물들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색깔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화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화려함은 금세 지루함으로 바뀌어 버려, 미코노스에서 사흘 밤과 나흘 낮을 보내고 나니 그 예쁜 풍경 앞에서도 나는 점점 무덤덤해져 갔다.
아노 메라는 중심 마을답게 마을 입구에 커다란 공영 주차장이 있었다. 마을 중심에는 작은 광장이 있고, 작고 아담한 식당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만나면 언제나 반가운 슈퍼마켓도 광장 한 편에 있었다. 중심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붉은 지붕으로 유명한 파나기아 투리안니 수도원(PanagiaTourliani Monastery)을 제외하면 딱히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수도원 안에 있는 성당은 내부 장식을 모두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했단다.
규모도 크지 않은 곳이라 화려하게 꾸민 내부는 여유 공간 없이 가득 차 버려서 보는 이를 답답하게 했다. 오후의 붉은 해가 실내에 비치자 황금색을 칠한 액자와 장식들이 번쩍번쩍 일렁인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신들이 '황금'을 좋아할까? 황금 불상, 황금 성당을 만들면 신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신에게 더 잘 전달될까?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으면서 시답잖은 생각을 해본다. 석가모니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와 명예를 다 버리고 해탈하여 부처님이 되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은 석가모니 불상에 금칠을 하고 있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가 이런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실까 정말 궁금하다.
▲ 파나기아 투리안니 수도원. 붉은 지붕은 밖으로 멀리 나가야 볼 수 있다. |
ⓒ 한성은 |
▲ 성당 내부는 모두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
ⓒ 한성은 |
섬을 그렇게 좋아했다던 하루키의 마음이 이해됐다
찜찜한 기분으로 성당을 나와 마을 광장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다 보니 바람이 무척 많이 불었다. 한 무리의 인도인들이 시끄럽게 몰려오더니 자기들끼리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사진을 참 좋아한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
인도 여행할 때 어색한 순간을 없애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카메라를 꺼내는 것이다. 그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진을 중심으로 두터운 친구가 된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어서 모두의 손에 카메라가 하나씩 있지만, 10년 전에 처음 인도를 갔을 때만 해도 카메라는 귀한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기들끼리 한참을 찍더니 이번에는 나에게 와서 사진을 찍어 달란다. 같은 장소에 서서 다른 포즈로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경쟁하는 대회가 있다면 단언컨대 인도 사람들이 1등일 것이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 주고 나니 이번에는 나보고 자기들이 찍었던 자리에 가서 서 보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사진을 찍으니 그게 아니라며 다양한 포즈를 요청해 왔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근엄한 국어교사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좋다며 손뼉을 친다.
아주 오랜만에 '나마스떼'와 '나마스까'를 주고받으며 인사하고 헤어지니 인도가 그리워졌다. 내년 봄에는 인도로 갈 텐데 여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음 여행지를 생각하면 설렌다. 그렇게 힘들었던 기억은 다 없어지고, 즐거웠던 기억만 남아 있는 인도. 막상 여행을 시작하면 또 사기를 당하고, 악을 쓰고, 짜증을 내고, 웃고, 울고 하겠지.
다시 스쿠터 시동을 걸고 구석구석에 있는 해변들을 찾아 나섰다. 해변마다 각자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잠깐씩 머물다 나오는 것만으로 시간이 금방 흘렀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비치파라솔이 해변을 뒤덮은 곳이 있는가 하면 쓸쓸함이 잔뜩 묻어나는 해변도 있었다. 해양 레포츠가 발달해 있다는 해변에는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곳이 신기루처럼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미코노스 곳곳을 진득하게 즐기려면 한 달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키는 3년을 미코노스에서 살았나 싶었다.
스쿠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 풍경들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황량한 들판과 민둥산을 보며 달리니 이제야 미코노스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미코노스하면 떠오르는 그 하얀 집과 파란 지붕은 호라 마을을 중심으로 한 서쪽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관광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동쪽 마을은 새롭게 관광지로 개발하는 곳만 듬성듬성 새하얀 집들이 있었다. 그곳은 쓸쓸하고 황량했다.
미코노스 동쪽 지역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준다면 누구도 이곳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코노스 섬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나무 전봇대가 서 있고, 염소 무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는 이 풍경이 내게는 훨씬 정감있게 다가왔다. 호화 유람선과 쏟아지는 관광객과 밤낮없이 이어지는 클럽 파티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나와서야 에게 해에 둘러싸인 작은 섬의 그 소담한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스쿠터를 반납하기 위해 다시 호라 마을로 향했다. 다시금 미코노스는 저무는 붉은 햇볕으로 단아하게 단장을 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광객들도 각자의 탈 것들을 길가에 세워두고 언덕 위로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은 것은 햇볕이 잘 드는 명당자리에 앉아 털을 고르며 하품을 하는 들고양이들뿐이었다. 마을의 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서서 해가 지는 속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호라 마을을 보고 있으니 이 섬을 그렇게 좋아했다던 하루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 타운이라 불리는 호라 마을의 중심부. |
ⓒ 한성은 |
쏟아지는 별빛과 무서운 모기와 시끄러운 클럽 음악과 바다 냄새와 같은 밀도의 맥주 냄새에 취해 미코노스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 목적지는 산토리니 섬이다. 사실 미코노스에서 에게 해의 섬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느껴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토리니를 제외하고 크레타 섬으로 바로 가려고 했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도 산토리니는 '미코노스보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예쁜 곳' 정도라고 했다. 미코노스를 갔다면 굳이 산토리니는 갈 필요가 없고, 산토리니를 갔다면 미코노스는 신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산토리니행 배편은 운항 거리도 짧은데 비용은 크레타로 가는 것보다도 비쌌다. 워낙 유명한 곳인 데다가 성수기가 겹쳐서 그런 것 같았다.
지나온 여행지를 떠올려보면 또 가고 싶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마음속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실 미코노스는 굳이 나누자면 후자에 속했다. 정말 예쁜데 그냥 예쁘기만 해서 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냥 '오직 예쁘기만 한 곳'의 정점이 산토리니였다. 하지만 결론은 그러니까 가보자 싶었다.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곳이니까 왠지 숙제하는 마음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섬을 만들어 보자고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작정하고 꾸민 섬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수많은 화보와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했던 그 파란 지붕을 사진으로 찍어 보자는 숙제를 안고 페리 예약을 했다.
<기사 출처 : 오마이뉴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