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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오른쪽). |
청바지와 티셔츠는 이제 실리콘밸리 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는 유니폼이 됐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같은 IT산업의 총아라면 누구나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공식 석상에 선다. 마치 잘 빼입은 슈트와 넥타이로 무장한 월가 사람들의 고리타분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중은 이들의 자유로운 드레스코드에 열광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잡스나 저커버그여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잡스 이전에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과감히 본인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사례는 많았다. 잡스는 그 효과를 극대화해 자신의 브랜드로 삼았을 뿐이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격식을 깬 비전형적 옷차림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남들이 모두 따르는 규칙을 혼자서 무시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뒷감당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고수하는 것은 자신감과 자율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드레스코드뿐만 아니라 에티켓, 화법 등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면 어떤 것이든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
연구에 참여한 프란체스카 지노(Francesca Gino)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 박사과정에 있는 실비아 벨레자(Silvia Bellezza)는 이를 '빨간 운동화 효과(Red Sneakers Effect)'라고 설명한다. 엄격한 드레스코드가 있는 모임에 빨간 운동화를 신고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뭔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가령 모두가 정장차림을 한 중요한 학회 세미나에 캐주얼 차림으로 나타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논문 발표에 떨고 있는 대학원생이 아니라 학회에서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종신교수일 가능성이 높다. 명품 가게에 수수한 옷차림으로 오는 사람이 있으면 점원들은 본능적으로 돈 많은 알짜 고객임을 알아차린다. 꿀릴 게 없는 사람들은 굳이 자기를 세상의 코드에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구나 아무 때나 규율을 깨는 옷차림을 한다면 '레드 스니커즈'의 후광을 받아 '힘 깨나 쓰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레드 스니커즈'의 후광은 몇몇 제한된 상황에서만 비쳐진다.
먼저 누가 봐도 격식을 파괴하는 개성은 의도적이어야 한다. 만일 규범을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격식 파괴는 더 이상 지위나 자율성의 신호가 아니다. 단지 눈치 없는 행동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모두 검은색 넥타이를 매기로 한 파티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나타난 사람을 대중은 처음엔 그가 지위ㆍ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우러러볼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온 것이 드레스코드를 몰라 저지른 단순히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긍정적인 평가를 거둬들인다.
두 번째로 격식 파괴가 일어나는 환경은 권위와 위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명예로운 자리여야 한다. 하버드대 실험에 따르면 학생들은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수가 티셔츠 입고 면도도 하지 않으면 강의 잘하고 논문 많이 쓰는 교수라 짐작한다. 그러나 평범한 대학의 교수가 티셔츠 입고 텁수룩한 모습으로 다닐 경우엔 오히려 연구 성과가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 번째, 격식을 파괴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이 격식에 맞는 행동에 익숙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명품숍에 들어가는 초라한 옷차림의 남자는 행인들 눈엔 그저 돈이 없어 좋은 옷을 못 입는 사람이다. 그러나 잘 차려입고 오는 고객들만 주로 보는 명품숍 직원에겐 얘기가 다르다. 보통 고객들과 달리 옷차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돈이 많다는 표시이기에 직원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격식 파괴가 긍정적이고 강력한 것으로 보여지기 위해선 보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 개성에 대한 갈망이 큰 대중일수록 규율에서 일탈한 행위를 자율성과 자신감의 표현으로 바라본다.
실험을 주도한 실비아 벨레자는 매일경제 MBA팀과의 인터뷰에서 "비전형(nonconformity) 행동은 그에 대한 비용을 감수할 만한 사람이라는 신호를 준다는 이유로 대중에겐 지위의 상징이 된다"면서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도 격식 파괴에 대한 대가를 감당할 용기가 있어 비전형적인 옷차림을 고수한다면 높은 지위의 사람으로 보일 순 있다"고 말했다.
빨간 운동화 효과는 마케팅 측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엔 명품을 구매하는 동기는 경제력을 뽐내기 위한 과시적 소비에 있었다. 그러나 이젠 명품을 가지고 있어야 할 자리에 혼자만 명품을 들지 않는 행동이 훨씬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각인된다. 최고급 슈트보다 깔끔한 검은색 니트가 더 부유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명품의 제품 전략도 변하고 있다. 이젠 큼지막한 명품 로고가 박힌 제품은 별로 인기가 없다. 품질은 뛰어나 가격은 높지만 명품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없는 제품이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은근한' 명품이 오히려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빨간 운동화 효과에도 희소성이 있다. 몇몇 선구자들이 드레스코드를 깰 때 그들의 행동은 자신감과 자율성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를 따라서 너도나도 드레스코드에 어긋난 옷차림을 한다면 더 이상 격식 파괴는 지위의 상징이 되지 못한다. 그냥 흔하디 흔한 '스마트 캐주얼'의 한 종류가 될 뿐이다.
<기사 출처 :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