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5시면 눈이 저절로 떠져요. 잠깐이지만 그때 이불 속에 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요. ‘이제 제가 필요한 곳도, 어디 갈 데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꽉 채우거든요.”
새해가 밝자, ‘기부왕 경비원’ 김방락(69)씨의 아침은 달라졌다. 눈 뜨자마자 분주하게 출근을 준비하던 일상이, 뭘 할지 몰라 이불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김씨는 10년 넘게 경비원으로 일한 한성대를 지난해 12월31일 떠났다. 해고 통보를 받은 지 2개월여 만이다.
22일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자택에서 만난 김씨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거듭 손을 휘저으면서도 학교에 대한 섭섭함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보도(작년 12월)가 나간 뒤에도 연락 한 통 안 하더라고요. 내가 한성대 총무처에 두 번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담당자랑 통화도 못했고 다시 전화를 걸어 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속이 너무 좁은 건가요?”
2014년 말, 김씨는 현직 경비원 최초로 ‘아너 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 회원이 돼 큰 화제를 모았다. 한성대에서 일하면서 받는 월급 120만원을 아껴 11년6개월여 동안 기부한 결과였다. 지난해 7월에는 이 학교에 장학금으로 1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김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학생들이 찾아와 ‘감동 받았다’며 음료를 건네주고 학교 측도 감사패를 주고 그랬는데, 참 모든 게 금방 변하더라”며 긴 한숨을 뱉었다.
김씨의 경비원 생활 마지막은 특별할 게 없었다. 2015년이 저무는 마지막 날 오후 6시쯤 다음 근무자와 교대를 한 뒤 그간 사용한 이불, 전기밥솥 등 세간을 배낭에 차곡차곡 담았다. 10년 넘는 세월을 함께한 김씨의 흔적은 30분이 안 돼 사라졌다.
해고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잘됐다. 이참에 편하게 지내라”고 김씨를 격려했다. 갑작스레 직장을 잃은 김씨에게 마지막 버팀목이자 쉼터는 가족이었다. 김씨는 아내와 함께 용산구 이촌동의 아들네를 찾아 손주 보는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직에 대한 열정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해고 직후 성북구청, 성북노인복지관 등을 찾아 구직 신청을 했다. 최근에는 첫 월급의 10%를 중개수수료로 떼는 직업소개소도 찾았다. 그러나 김씨에게 돌아온 건 “연세도 있으신데 이 추운 날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지냐”는 힐난 섞인 반응 뿐이었다.
“그런 얘기 들으면 ‘나는 이제 여기까지인가, 내 욕심이 너무 큰가’ 하는 자책감에 빠지게 돼요. 제가 나이는 이래도 아직까지 건강한데, 다른 사람들 생각은 저랑 참 다르더라고요.”
김씨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젊은 시절 군복을 빼입은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장식장에는 기부 활동을 하면서 받은 표창과 상패가 가득했다.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던 김씨의 목소리에는 흐뭇함이 가득했지만, 앞줄 한 감사패에 이르자 말이 끊겼다. 패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귀하께서는 한성대학교 대학로 에듀센터에 근무하면서 맡은 바 책임과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사랑의열매 공동모금회에 성금 1억원을 기부하여 사회의 귀감이 되는 나눔을 실천하였기에 감사의 뜻으로 이 패를 드립니다. 2014. 12. 12 한성대학교 총장’
패에 새긴 ‘감사’가 전화 한 통 없는 ‘해고’로 변하는 데에는 1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씨는 패를 물끄러미 쳐다본 뒤 뒷줄로 옮겼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22일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자택에서 만난 김씨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거듭 손을 휘저으면서도 학교에 대한 섭섭함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보도(작년 12월)가 나간 뒤에도 연락 한 통 안 하더라고요. 내가 한성대 총무처에 두 번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담당자랑 통화도 못했고 다시 전화를 걸어 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속이 너무 좁은 건가요?”
2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한 공원에서 ‘기부왕 경비원’ 김방락씨가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
김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학생들이 찾아와 ‘감동 받았다’며 음료를 건네주고 학교 측도 감사패를 주고 그랬는데, 참 모든 게 금방 변하더라”며 긴 한숨을 뱉었다.
김씨의 경비원 생활 마지막은 특별할 게 없었다. 2015년이 저무는 마지막 날 오후 6시쯤 다음 근무자와 교대를 한 뒤 그간 사용한 이불, 전기밥솥 등 세간을 배낭에 차곡차곡 담았다. 10년 넘는 세월을 함께한 김씨의 흔적은 30분이 안 돼 사라졌다.
10년간 박봉을 아껴 마련한 1억원을 기부해 화제가 됐던 한성대 경비원 김방락(69)씨가 지난 12월 서울 성북구 한성대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하지만 구직에 대한 열정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해고 직후 성북구청, 성북노인복지관 등을 찾아 구직 신청을 했다. 최근에는 첫 월급의 10%를 중개수수료로 떼는 직업소개소도 찾았다. 그러나 김씨에게 돌아온 건 “연세도 있으신데 이 추운 날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지냐”는 힐난 섞인 반응 뿐이었다.
“그런 얘기 들으면 ‘나는 이제 여기까지인가, 내 욕심이 너무 큰가’ 하는 자책감에 빠지게 돼요. 제가 나이는 이래도 아직까지 건강한데, 다른 사람들 생각은 저랑 참 다르더라고요.”
김씨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젊은 시절 군복을 빼입은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장식장에는 기부 활동을 하면서 받은 표창과 상패가 가득했다.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던 김씨의 목소리에는 흐뭇함이 가득했지만, 앞줄 한 감사패에 이르자 말이 끊겼다. 패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2014년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김방락씨가 한성대로부터 받은 감사패. |
패에 새긴 ‘감사’가 전화 한 통 없는 ‘해고’로 변하는 데에는 1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씨는 패를 물끄러미 쳐다본 뒤 뒷줄로 옮겼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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