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음식 떡국
조선 중기부터 설 떡국 기록…'한 그릇에 나이도 한 살 더'
멥쌀로 길게 만든 흰 가래떡을 썰어 맑은 장국에 넣고 끓인 떡국은 설날 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설에 모처럼 모인 가족들과 한 그릇씩 나눠 먹으며 나이 한살 더 먹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홀로 쓸쓸히 보내는 이도 혼자라도 어설프게나마 끓여 먹으며 허전함을 달래는 것이 바로 떡국이다.
◇ 언제부터 떡국 먹었나…조선 중기부터 견해 많아
7일 민속학계에 따르면 떡국과 관련한 옛 문헌 자료가 많이 남지 않아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설에 떡국을 먹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나마 조선후기 서적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는 떡국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들 책에서 떡국은 새해 차례와 아침식사 때 없으면 안 될 음식이며, 손님 접대용으로 꼭 내놓았다고 적혀 있다.
동국세시기는 떡국이 겉모습이 희다고 해서 '백탕'(白湯), 혹은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는 뜻에서 '병탕'(餠湯)이라 적었다.
조선 중기 이식의 '택당집'은 '새해 첫날의 제사상을 차릴 때 병탕과 만두탕을 한 그릇씩 올린다'고 적었다.
조랭이 떡국
조선 초기 서적에는 떡국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이 조선 중기부터 설에 떡국을 먹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떡국의 기원이 중국 당나라 때 먹었던 '탕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구한말에 오면 떡국은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흔한 음식이 됐다는 것을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최남선은 우리 민족이 설에 떡국을 먹는 이유를 이렇게 썼다.
"새해 첫날은 천지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인 만큼 정결한 흰떡과 자극적이지 않은 국을 먹으며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했다."
요즘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면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과거에는 나이를 물을 때 '병탕 몇 사발 먹었느냐'고 했다.
떡국을 한자로 첨세병(添歲餠)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먹은 떡국 그릇 수에 따라 나이가 더해지는 음식이라는 의미다.
◇ 지역마다 종류도 다양…조랭이 떡국·닭장 떡국
옛날 떡국 국물을 만들 때 부유한 집은 꿩고기를, 서민들은 닭고기를 많이 썼다고 한다. 여기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과거 떡국을 만들 때는 고춧가루를 넣었다. 이는 꿩고기의 잡내를 없애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떡국을 끓이는 방법은 지역마다 다르고 떡국 국물은 대개 쇠고기로 낸다.
일반적으로 쇠고기를 육수로 끓인 장국에 0.5㎝ 두께로 썬 흰떡과 가늘고 얇은 쇠고기 산적, 흰자와 노른자가 구분된 지단 등을 넣은 것을 떡국으로 본다.
북한 개성에서는 떡 가운데를 잘록하게 만들어 끓인 조랭이 떡국이 유명하다.
떡 모양이 귀신을 쫓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진 조롱박과 실을 뽑는 누에고치의 모양과 비슷해 한해 액운을 물리치고 일이 잘 풀리라고 기원하면서 먹었다는 해석이 있다.
조선 개국 초기 고려에 충성한 개성 사람들이 조선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뜻에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충청도나 경상도에서는 익반죽(뜨거운 물로 반죽)한 쌀가루를 도토리 크기로 둥글게 빚어서 만든 생 떡국을 먹었다.
전남이나 영남 바닷가 근처 지역은 매생이나 굴을 넣어 떡국을 끓이기도 한다.
전라도에서는 닭으로 육수를 낸 닭장 떡국이 유명하다.
평안도나 함경도 등 이북에서는 떡국은 안 먹어도 만두는 먹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떡국에 만두가 많이 들어간다.
<기사 출처 : 연합뉴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