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탈선 잇따르자 "자격 박탈해야" 각계 목소리 높아
파렴치 범죄 잇따라…
이름 숨기고 나이 줄이고, 결혼 미끼로 여성 농락
성관계 사진 몰래 찍어 수천만원 뜯어내기도
의사들의 탈선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 의사는 성추행 범죄를 반복해 저질러 과연 이들에게 환자의 몸을 맡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까지 사법 당국은 의사를 존경받는 직업인으로 대접해 왔지만 탈선 의료인들은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하고 있다. 국회와 시민단체, 법조계에선 성범죄자의 의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름·나이 속인 재범자
최근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는 서울 강동구에서 정형외과를 운영하는 정모(44)씨를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정씨는 지난해 5월 이름과 나이, 혼인 경력 등을 위조한 서류를 결혼정보업체 E사에 내고 여성 회원 4명을 만난 혐의를 받고 있다. 1972년생을 1983년생으로 나이를 열한 살 줄였고 이혼 경력이 있음에도 총각 행세를 했다. 정씨는 이른바 '좋은 조건'을 가진 남성에게는 회비를 거의 받지 않는 점에 착안해 E사뿐 아니라 다른 결혼정보업체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는 언론사 기자였던 여성 회원에게 "다음에 만날 땐 술을 마시자" "차를 갖고 오지 마라"고 하는 등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나는 남자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했다고 한다. 외모와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여기자의 '취재' 끝에 그의 가짜 행세는 들통났다. 그의 범행은 여성 회원에게 회비 580만원을 환불하게 된 결혼정보업체에 580만원의 피해를 준 혐의에서 마무리됐다.
그런데 검찰은 정씨가 과거에도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며 죄를 지은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정씨는 2004년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만난 3명의 여성과 성관계 맺는 장면을 몰래 촬영한 혐의 등으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정씨는 그만 만나자고 하는 20대 여성의 아버지에게 딸의 전라(全裸) 사진과 함께 "딸의 인생을 파멸시킬 만한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다", "따님의 밝은 미래를 기원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 5000만원을 뜯어냈다. 준강간에 공갈·협박 혐의까지 더해졌던 그는 피해 여성이 합의해주고 고소를 취소하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판결문엔 정씨가 같은 날 오후와 밤, 두 명의 여성을 차례로 자신의 오피스텔로 불러 성관계를 맺고 몰래 그 장면을 녹화했던 범죄 사실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정상적인 패턴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여성 환자를 맡겨도 되는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는 당시 1심 형(刑)이 무겁다고 항소했으나, 서울고법은 "죄질이 불량하다"면서 항소를 기각했다. 정씨는 다음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지 않는 한 의사로서 진료를 계속할 수 있다.
최근 불구속 기소된 서울의 한 유명 성형외과 원장인 양모(64)씨는 성추행 재범자다. 그는 작년 7월 수술 상담을 받으러 온 장모(22)씨에게 "수술비가 1500만원인데 600만원으로 해주면 너는 나한테 뭘 해줄 거냐"면서 갑자기 장씨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두 번 치고, "수술비 깎아줄 테니 밖에서 다섯 번만 만나자"며 무릎 윗부분을 쓰다듬은 혐의를 받고 있다. 수술비 할인 대가로 교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양씨는 2006년엔 여성 2명을 상대로 더 심한 추행을 저지른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김모씨 등 피해 여성 2명이 양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사건 판결문엔 양씨가 상담을 핑계로 여성 환자를 막 대하는 모습이 나와 있다. 양씨는 코와 이마 상담을 하러 온 김씨에게 "가슴은 어떠냐"고 물었다. 김씨가 "가슴 수술 생각은 없다"고 하자, 양씨는 "그래도 한번 봐야겠으니 옷을 올려보라"고 요구하면서 윗옷 안으로 손을 넣어 몸을 만졌다. 이어 양씨는 치마를 걷어보라고 요구하고 피해자 신체 일부를 더듬었다.
양씨는 다른 여성을 상대로도 유사한 수법을 사용했다. 상담 도중 여성의 티셔츠와 속옷을 걷어 올리게 한 뒤 "에이, 이게 뭐냐, 살이 너무 없다"며 몸을 만졌고, 여성의 속옷을 들춰보고 노골적인 말과 함께 신체 부위를 더듬었다. 양씨는 안면 윤곽 분야 성형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엔 수십만 명이 이용하는 H의료재단 건강검진센터 소속 의사가 수면내시경 검진자를 상습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언론에 폭로돼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H재단 검진센터 간호사들은 3년 전 내시경 검사를 담당했던 의사 양모(58)씨의 성추행 내용을 문건에 담아 H재단에 대책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문건엔 양씨가 내시경 검사가 끝났음에도 진찰을 계속하는 척하며 신체 부위를 더듬거나 검진자 가슴에 젤을 바르고 만지는 등 가수면 상태에 빠진 여성 검진자들을 성추행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는 검진자의 특정 신체 부위를 가리키며 "예쁘다"고 말하는 등 간호사들까지 성희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사들의 문제 제기로 검진센터를 그만둔 그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 그곳에서도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다고 한다.
한국여성변호사회(회장 이명숙)도 H재단 양씨를 강제추행과 모욕죄 등 혐의로 고발했다. 여성변호사회는 "H재단 측이 이런 범죄 사실을 알고도 양씨가 내시경 진료로 고수익을 안겨준다는 이유로 해고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피해 간호사들의 민원서류 등을 없애도록 했다"면서 재단 이사장과 임원도 함께 고발했다.
진료와 검사 등을 명목으로 한 의사들의 성(性)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얼마 전엔 한 30대 여성이 가슴 수술 받는 과정에서 의사가 하의를 벗기고 성추행을 했다며 서울 강남경찰서에 고소했고, 한 정형외과 원장은 수면 진정제를 투여해 반수면 상태에 빠진 10여 명의 여자 환자를 더듬는 변태 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이 의사는 수면 진정제를 맞으면 신경 감각은 살아 있으나 반수면 상태에 빠져 환자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해 성추행을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범죄자 의사 자격 박탈" 목소리
의사 탈선이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자격 박탈 등 강력한 처벌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행 의료법은 ▲정신보건법에 의한 정신질환자 ▲마약·대마·향정신성의약품 중독자 ▲금치산자·한정치산자 ▲의료법 위반 등으로 형이 확정된 이후 형 집행이 종료되지 않은 자 등 4가지를 의료인 결격 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금고 이상의 형을 받지 않는다면 의사로 계속 활동할 수 있으며, 집행유예 기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개업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의사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의사 자격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벌금형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앞서 성형외과 원장 양씨도 여성 2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고도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의료 활동을 해왔다. 법원은 작년 말 여자 친구를 가두고 2시간 동안 폭행했던 의학전문대학원 남학생에게 벌금 1200만원을 선고하며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의학전문대학원 제적 위험이 있다"고 언급하는 등 의사들의 범죄에 관대한 측면도 있었다.
국회에선 성범죄 의사를 영구 퇴출하는 법안이 여러 개 제출됐지만 모두 통과되지 않았다. 19대 국회에선 새누리당 이우현 의원이 성범죄자의 의사면허 재교부를 제한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같은 당 안효대 의원은 성폭력범죄특례법 위반 의사에게 불이익을 주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작년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원혜영 의원이 의료인 결격 사유에 성범죄로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자를 추가하는 법안을 제출해 주목받았으나 의료계 등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원 의원은 당시 "의료인이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어, 의사의 책임을 확보하고 환자와 의사 간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환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를 막기 위해선 벌금형만 선고받아도 의료계에서 영구 퇴출시키는 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원 의원이 풀무원농장 창립자인 원경선씨의 아들이라는 점을 겨냥해 풀무원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한의사협회 측은 "현행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고 있는데 벌금형만으로 의료인 자격을 박탈시키는 것은 과잉 처벌에 해당돼 의료인이 환자를 불신하는 등 진료실 내에서 상호 믿음이라는 균형이 깨지게 된다"고 주장했었다. 성범죄자의 의사 자격을 제한하려 했던 세 법안은 보건복지부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모두 폐기됐다.
하지만 올해부터 공무원들의 경우 부하 직원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가 3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공직에서 퇴출당하는 법안이 시행되면서 성범죄 의사들의 자격 제한 법안에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공무원들은 작년까지 성범죄의 경우 의사들처럼 '금고형'이 퇴출 요건이었으나, 새 법안은 벌금 300만원 이상으로 퇴출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시민단체인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환자는 성추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의료인 입장에선 정당한 의료 행위라며 억울해할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성추행 우려가 있는 신체 부위를 진료할 때 의무적으로 환자에게 사전 고지를 하거나 제3자를 배석시키면 된다"면서 작년 10월부터 '진료 빙자 성추행 방지법' 서명운동을 벌였다. 한국여성변호사회 노영희 변호사는 "징계가 엄격한 법조계와 달리 의사들은 큰 사건을 제외하면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자격 정지 기간에도 몰래 의료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직업 특성상 발생 가능성이 큰 의사의 성범죄에 대해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의사들이 환자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으려면 비리에 대한 자정(自淨) 의지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 출처 : 조선일보>
<기사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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