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하늘이 낸 큰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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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다. 조선에서 ‘하늘이 낸 큰 부자’로 꼽히는 사람 둘을 들면 임상옥(林尙沃)과 변승업(卞承業ㆍ1623~1709년)이다. 임상옥은 의주의 상인 출신이고, 변승업은 역관(譯官) 출신이지만 둘 다 국제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는 점은 같다. 임상옥에 대해서 대한제국 때의 사학자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의주(義州)사람 임상옥이 재물을 잘 불렸다. 양국(兩國ㆍ한국과 중국)의 이익을 꿰뚫어서 그 부가 왕실과 같았으므로 북경 사람들이 지금도 그의 이름을 들먹인다”라고 평가했다. 그가 거부가 된 계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개벽> 1923년 8월호는 임상옥이 판서(判書) 박모(朴某)가 궁했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4,000냥을 주어 장사를 치르게 한 것이 거부가 된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모는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인데, 그는 누이가 순조의 생모 수빈(綬嬪) 박씨인데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를 입었던 실세였다. 박종경의 후원으로 임상옥이 국경 지방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거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李裕元ㆍ 1814~1888년)은 <임하필기(林下筆記)> ‘홍삼의 시원(紅蔘之始)’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중국에서 붉은 삼인 자단삼(紫團蔘)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항산(太行山)과 난약산(蘭若山)에서 나오는데 천하의 보배로 여겼다. 순조 초에 임상옥이 백삼(白蔘) 한 움큼을 구해서 아랫목에 두었는데 마침 온수(溫水)에 젖었다가 온돌에 말라서 색이 붉게 변했다. 임상옥이 북경에 들어가서 붉게 변한 홍삼을 중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크게 놀라면서 “촉삼(蜀蔘)이 동국(東國ㆍ조선)에서 생산되었다”면서 후한 값을 쳐주었다. 임상옥은 이듬해 백삼을 쪄서 홍삼으로 만들어 가지고 들어갔고, 또 그 다음해도 그렇게 해서 비로소 큰 상인이 되어 두 나라에 이름이 났다는 것이 이유원의 이야기다. 이처럼 임상옥이 큰 부자가 된 데에 대해서는 정권 실세의 후원설과 홍삼 만드는 방법의 우연한 발견설이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그가 돈을 잘 쓸 줄 아는 부자였다는 사실은 모든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일성록(日省錄)> 순조 32년(1832년) 6월 10일자는 그가 2,070냥을 희사해 이재민을 살렸다고 전하는데, 의주 부윤(府尹) 남이형(南履炯)은 그가 이전에도 거금을 쾌척했다고 보고했다. 임상옥은 이 공로로 곽산(郭山)군수에 제수되는데, 그 후에도 수재가 발생하자 거액의 의연금을 내어 헌종 1년(1835년)에는 종3품 평안도 귀성(龜城)부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작년 섣달의 전최(殿最ㆍ인사고과)에서 중고(中考)에 들었다는 이유로 승진에 반대하면서 귀성부사 부임은 무산되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은 1939년에 쓴 ‘임상옥’이란 글에서 그가 다리를 건설하고 배를 희사한 사례 등을 들고 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사재를 공적 이익을 위해서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은 일개 상인 출신이 종3품까지 올라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어서 끌어내린 것이었다. <의주군지(義州郡誌)>는 벼슬에서 물러난 임상옥이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라고 전한다. 임상옥이 남긴 시의 한 구절이 ‘재물은 물처럼 평등해야 하고 사람은 저울처럼 곧아야 한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는 것이었다.
임상옥은 특수한 경우이고 보통 조선 제일 갑부들은 역관(譯官)들이었다. 역관들은 통역관일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국제무역상이었기 때문이다. 변승업은 인조 23년(1623년) 역과에 급제해 역관이 되었는데, 숙종 6년(1680년) 일본의 관백(關白)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ㆍ재위 1651~1680년)가 사망했을 때 조의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변승업은 희빈 장씨의 외가 친척이기도 한데, 박지원의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에는 역관 변승업(卞承業)이 병이 들어 사방에 빌려준 재산규모를 알아보니 은 50만냥이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거두기 귀찮고 오래되면 소모되니 그만 거두자”고 건의하자 크게 화를 내며 “이것은 도성 1만호(戶) 백성들의 명맥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있겠는가”라며 반대했다고 전한다. 그는 자식에게 “내가 공경(公卿)들을 섬겨보니 권력을 독차지하고 자기 집의 이익만 취한 자 치고 권세가 3대 가는 것을 못 보았다”고 경고했다.
최근 한전부지를 10조원 넘는 금액을 주고 낙찰 받은 현대차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다. 상대보다 2배 이상 높은 가격이라는데, ‘통 큰 배팅’이란 말도 나온다. 비슷한 시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과 오버랩된다. 무려 3년 10개월 간의 지난한 법정 투쟁의 결과물인데, 그간 밀린 임금 230억원도 지급하라는 판결을 접하면 한전부지 매입 때의 ‘큰 통’이 노동자들에게는 왜 그리 ‘째째’했는가란 생각이 들면서 한국 재벌들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명해진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기사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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