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극지방 빙하 아래 약 400개의 빙저호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중 윌런스 호수, 보스토크 호수, 엘스워스 호수에 대한 시추가 이뤄졌다. / 출처=네이처 |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난해 출간한 소설 ‘제3인류’는 한 고생물학 연구팀이 남극 ‘빙저호(氷底湖)’에서 17m크기의 거인 유골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빙저호는 지구 내부 열(熱)과 위에서 누르는 힘의 영향으로 빙하 하단부가 녹아 형성된 ‘얼음밑 호수’를 말한다.
이처럼 만화 같은 일이 상상 속 상황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을 포함한 5개 국가 15개 대학 연구팀이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팀은 남극 얼음 아래 800m깊이에서 빙저호인 ‘윌런스 호수(Lake Whillans)’를 찾아내 그 결과를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빙저호 탐사에 도전한 사례는 여러 번 있었지만, 실제로 샘플을 확보해 분석까지 해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 800m 얼음 뚫고 물 끌어올려…샘플 오염 방지가 성공 열쇠
과학자들에 따르면 극지방 얼음 밑에는 윌런스 호수를 포함해 400여개의 빙저호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빙하 최하단부가 매년 조금씩 녹으면서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오랜 세월 외부 생태계와 단절된 상태로 보존됐을 빙저호 연구에 큰 매력을 느껴왔다.
윌런스 호수는 남극점에서 로스해(海) 방향으로 64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무거운 얼음에 눌려 호수 깊이는 2m에 불과하고 대신 60㎢ 넓이로 퍼져있다. 연구팀은 미국과학재단(NSF)에서 2000만달러(약 205억원)를 지원받아 6년전 관련 연구에 착수했다.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해 1월 일주일에 동안 시추작업이 진행됐다. 관건은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고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러시아 연구팀이 앞서 남극의 또다른 지역에서 빙저호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샘플이 오염돼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모든 장비를 소독하고 모든 연구자에게 살균복을 입도록 했다.
빙저호 시추의 성공 여부는 샘플을 얼마나 깨끗한 상태로 끌어올리느냐에 달렸다. / 출처=네이처 |
같은 달 27일 오전 7시30분 800m깊이의 얼음을 완전히 뚫렸다. 6개의 시추봉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 온도는 영하 0.5도로 연구팀 예상보다 따뜻했다. 연구를 주도한 존 프리스쿠 미국 몬타나주립대 교수는 “빙저호의 풍부한 생태계를 접하는 순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4000여종의 미생물 생태계 이뤄
연구팀은 윌런스 호수의 생태계 구성을 알려줄 샘플로 30ℓ의 물과 퇴적물 일부를 수집했다. 약간 누런 색깔의 물 1㎖에는 13만여개의 세포가 들어있었다. 이 샘플에선 총 3931종의 미생물이 발견됐다.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음에도 의외로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해온 것이다. 하지만 미생물보다 진화한 형태의 생물체를 발견하진 못했다.
연구팀은 “햇빛은 물론 대기도 차단된 환경에서 미생물들이 호수 바닥에 깔린 침전물이나 바위에서 철분, 황산 등을 산화시켜 에너지를 얻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연구팀은 윌런스 호수에 존재하는 다양한 미생물 종의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애초부터 얼음 밑 퇴적층에서 생활하던 미생물의 후손일 수도 있고 외부에서 유입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지구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상승해 빙하 하단부가 급격히 녹아내리면서 침투한 미생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샘플에서 발견된 포름산염(formate) 성분은 온실가스인 ‘메탄’이 빙저호에서 생산된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연구팀은 말했다. 실제로 남극 빙하 밑 퇴적층에는 수십억톤의 메탄이 내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지나치게 깊숙한 곳의 빙저호 택한 연구팀 모두 실패…한국도 향후 탐사 계획
5개 국가가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은 지난해 1월 800m 빙하를 뚫고 윌런스 호수 샘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 출처=네이처 |
빙저호 샘플 분석은 처음으로 성공했지만 빙저호 탐사 자체는 이미 여러 연구팀이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 남북극연구소(AARI) 연구팀은 이번 공동연구팀보다 먼저 동남극지역에 위치한 빙저호 ‘보스토크 호수(Lake Vostok)’ 탐사를 진행했다. 이 호수의 깊이는 3.7㎞로 윌런스 호수보다 4.5배 이상 더 깊다.
연구팀은 지난해 초 시추에 성공하고 샘플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시추한 얼음을 위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석유 등의 불순물이 스며들어 샘플이 오염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샘플에 신뢰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현재 시추공 하단부가 언 상태라 연구팀은 추가연구에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해 영국 노섬브리아대 연구팀은 서남극에 위치한 빙저호 ‘엘스워스 호수(Lake Ellsworth)’ 시추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호수 역시 3.4㎞ 깊이에 있어 보스토크 호수와 마찬가지로 접근이 쉽지 않았고 끝내 연구팀은 시추에 실패했다. 결국 전략적으로 적당한 두께의 빙하를 택한 이번 공동연구팀만 샘플 확보에 성공한 셈이다.
한국은 아직까지 빙저호 탐사에 돌입한 상태는 아니다. 다만 올해초 남극 로스해 연안 테라노바만에 건설된 장보고과학기지에서 향후 빙저호 관련 연구활동을 하겠다고 발표한 적은 있다. 장보고과학기지는 한국이 세종과학기지에 이어 두번째로 세운 남극기지다.
김옥선 극지연구소 박사는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환경에서 생활하는 미생물을 발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연구가치는 충분하다”며 “이를 달이나 화성의 얼음속 미생물 생존 가능성과 연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사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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