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성수기에나 번지점프를 할 수 있지 지금은 안 해요.
'어? 고린도에서 번지점프를 꼭 하고 싶었는데..'
고린도 운하의 다리 밑에는 번지점프를 할 수 있게 시설을 갖춰 놓아 성수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여자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되니 그녀들의 간 크기는 남자들과는 다른가 보다.
고대 운하가 없었던 때에 아테네에서 델피까지 배를 타고 가게 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밑으로 돌아서 가는 것과 고린도의 동쪽에 도착한 뒤 배를 육로로 이동하여 서쪽에 배를 다시 띄운 후 항해하는 방법이 있었다.
뱃길이 약 550Km 차이가 있어 육로로 배를 이동하는 방법을 택하고는 하였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운하를 만들고 싶었했다. 하지만 운하는 오랜 세월이 지난 1893년에서야 비로서 만들어진다.
양쪽 끝에 수문 역할을 하는 다리가 놓여 배가 지나갈 때 다리전체가 바다 속에 잠겼다가 배가 지나간 후에 다시 올라온 다리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보곤 한다.
잠수교 옆에는 고대에 배들을 운반했던 육로가 조금 남아있어서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을 보며 어릴 때 시청각 자료도 없이 외워야 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고린도에서는 기독교 전도자였던 바울을 간과할 수 없다.
1928년 지진으로 고린도 주민들은 생활 터전을 옮겨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정교회에서는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워 1대 사도로 바울이, 2006년부터 디오니시오스 신부가 89대 교회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많이 들어본 사랑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삶만큼이나 매우 다양한데 그가 고린도에 온 것은 AD50년경으로 추정한다.
고린도가 BC146년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었으나 고린도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BC44년에 다시 도시가 건설되어 풍요로움을 되찾고 있었으며 한 세기를 못 채워 바울이 방문하였을 때는 새로운 상업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하여 약 30만 명이 있는 큰 도시가 되어있었다.
아크로 고린도의 최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아마도 1000여명의 여 사제들이 양쪽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희극 배우들이 바람둥이를 가리켜 '고린도 사람같이 산다.'라는 표현이 만들어질 만큼 아크로 고린도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 사제들의 역할로 문란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바울의 눈에 비춰진 고린도의 이런 모습들은 그에게 큰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1년 6개월을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떠난 후에 걱정이 되어 보낸 4통의 편지가 2편으로 편집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유실된 편지가 있는지, 편지가 편집되었는지 현재 2편만이 성경에 수록되어 고린도 전, 후서로 전해지고 있다.
고린도에 다시 방문한 바울은 아크로 고린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2000년 전의 북적거림은 빈말이 되어 신전이 있었다는 팻말만이 남아있지만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아크로 고린도에 올라가 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무작정 집을 떠나 그리스에 온 청년을 만난 덕분에 이곳까지 올라와 보게 되었다.
인생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답답한 마음으로 계획 없이 집을 나선 청년과 함께 탁 트인 양쪽 바다를 보며 청년의 답답한 마음과 생각이 다소 정리되기를 바랐었다.
그리스에서는 바울을 기독교 전도자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콘에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표현한 이콘을 보면 12사도들이 그려져 있는데 가장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이 그려져 있다.
실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12제자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의 전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기에 바울을 12사도에 표현한 것이다.
당시 최고의 수식어를 다 갖고 평탄대로의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던 청년이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역할에서 180도 바뀌어 예수를 전하는 자로, 종국에는 순교까지 하는 삶은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고 있어 그에 대한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이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현재 고린도 유적지는 폐허 위에 다시 세운 기원 전후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고린도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화, 역사, 기독교, 유물, 풍경 등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분야가 각기 다른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조각품 하나에 큰 관심을 가진 분이 있었다.
일명 높이 보정용 샌들을 신고 있는 조각으로 그분의 카메라가 방향을 바꾸며 하나의 조각상을 위해 수많은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재활의학과 교수이었다.
이렇듯 보는 입장에 따라 무심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조각상이 누군가에는 큰 의미로 다가옴을 본다.
성지순례로 고린도에 오는 분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고 가는 곳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재판을 받았던 장소이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꼈던 세네카의 형 갈리오가 새 총독으로 51년 7월 1일 고린도에 부임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 되는데, 바울이 변론하기도 전에 갈리오는 소송을 중단시킨다.
'유대인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나는 이런 사건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피고가 법을 어긴 부분이 없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명확하게 판결한 곳으로 비마(연단)라고 적혀 있다.
바울이 있었던 장소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회당에서 나와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곳의 정확한 장소는 모른다.
알려진다면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겠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두 가지 유형이 고린도와 연관되어 있다.
비극의 결정판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그 후손에게 이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버림을 받아 극단의 선택을 한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얽힌 샘이 있다.
또한 눈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면 시시포스가 받고 있는 형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어쩌면 그 형벌의 원인 제공이었던 샘이 고린도에 남겨져 시시포스가 흘리는 땀과 함께 물을 쏟아내고 있다.
'이게 바다야? 호수지!'
에게 해의 사로닉만에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이용한 겐그레아 항구가 있는데 지진으로 사라져 지금은 동네 주민들이 즐기는 해변으로 남아있다.
힘들었던 고린도의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머리를 깎았던 곳이며 로마서를 건네주었던 곳이다.
여유가 있으면 지진으로 잠긴 바다 속의 부두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남는 곳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잣대란 말이 있다.
사람이름인데 침대에 특수 장치를 해서 길이가 유동적인 침대에 사람을 눕혀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크면 자르는 못된 짓을 하다가 테세우스에 의해 똑같은 방법으로 정리가 된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혹은 잣대란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테세우스가 아테네까지 가는 길에 있었던 일로 그의 여정 일부가 고린도에서 에피다브로스로 가는 길에 펼쳐지고 있다.
주변 경치는 차로 마냥 달리기엔 아쉬움을 남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물리치료, 자연요양, 적당한 운동 그리고 심리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종합병원이라 불린 에피다브로스에는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한 목욕시설, 치료를 위해 환자가 꿈꾸는 곳과 그 꿈을 해석하는 곳, 실내음악당, 스타디움, 연극장, 기원을 위한 신전, 숙박시설 등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그리스 신앙을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되어 버려지고 지진으로 인해 그나마 남은 것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유일하게 완벽한 모습으로 남은 연극장이 있다.
산비탈인 것처럼 흙에 묻혀있다 발견되어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현재는 6~9월에 연극 공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아늑하게 느껴지는 산기슭에 있고 앞이 탁 트여 마치 자연을 무대로 둔 느낌을 준다.
BC4세기 유명한 조각가의 아들 폴리클레이토스 2세에 의해 만들어졌고 BC2세기에 확장되어 약1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스 극장의 특성인 원형 오케스트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중앙의 제단에 서서 소리를 내어 보면 마치 마이크 앞에 서서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전율을 느낀다.
이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관리하여 아쉽지만…
좀 더 깊은 내용을 알기 위해 에피다브로스의 극장에 대한 논문을 찾아 지금은 대학원생인 아들에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보라고 했다.
'아빠. 미적분까지 해야 돼?'
이젠 근의 공식도 흐릿한 내게 아들의 말은 그 논문을 이해하고자 했던 마음을 빨리 포기시켰다.
이제는 미적분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안 되지만, 혹여 했다 한들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 논문의 요지는 원형극장이 완벽한 음향을 전달하는 것에는 원형극장의 구조에도 영향이 있지만 극장에 사용된 석회암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치료경위에 대한 기록이나 수술도구도 유물로 남아 있는데 아테나 여신의 탄생이 제우스의 머리를 열고 나왔다는 이상야릇한 얘기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린도의 뇌를 표현한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머리를 여는 외과 수술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유추가 되기도 한다.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상징성이 있는 999란 숫자가 있는데 오래 전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며 계단의 숫자를 확인해 보겠다고 열심히 세다가 그만 잊어버렸다.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어떻게 이야기 한마디 안하고 가겠는가..
팔라미디 성에 오르는 것은 차로 접근해 쉽게 들어가는 것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힘들지만 뒤에 펼쳐진 풍경과 함께 오르는 것이 좋다.
프랑스에서는 그리스 여행에 나프플리오가 필수라고 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인데, 아마 성채보다는 도시 자체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느 그리스 도시와는 다르게 오래되었지만 잘 정돈된 건물 벽을 타고 내린 꽃, 아기자기한 모습의 골목에 보이는 상점과 음식점 등을 기웃거리며 골목길 산책하듯 지나 항구로 방향을 바꾸면 '날 부르지~'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린 듯 바다 위에 덩그러니 성채 하나가 외롭다고 서 있다.
브루지를 마주하고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카페들이 줄지은 야자수와 함께 있으니 어찌 커피 한잔 없이 떠날까?
'뭐 뿌리셨어요? 냄새 좋다~'
-오렌지 꽃향기에요.
오렌지 나무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며 질문을 던졌는데 나를 대변하듯 재미없게 짧게 답변해 놓고 멋 적어서 향기를 맡아 보자고 차를 세우고 오렌지를 사서 몇 개를 권해 본다.
매년 4-5월에는 나프플리오에서 고린도로 이어진 길은 오렌지 꽃향기가 가득하여 달리는 차 안에도 스며든다.
봄에 맡는 향기도 좋고 겨울에 달린 열매를 보는 것도 그 달콤함 그대로이다.
교민 한 분이 차를 세워놓고 이름하여 서리라는 것을 하고 있었는데 몇 개 따지 않아 안쪽에서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미안한 마음으로 주인 앞에 섰는데,
-차 트렁크를 열어봐요.
에구~ 트렁크 확인을 하겠다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트렁크를 여니 주인이 수확하던 오렌지 한 박스를 맛보라며 차에 넣는 순간 그 교민 분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떠나 생활한지 오래되어 잘 모르지만 그리스에는 이런 모습이 남아있다.
차를 세우고 몇 개 따볼까?
'어? 고린도에서 번지점프를 꼭 하고 싶었는데..'
고린도 운하의 다리 밑에는 번지점프를 할 수 있게 시설을 갖춰 놓아 성수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여자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되니 그녀들의 간 크기는 남자들과는 다른가 보다.
고대 운하가 없었던 때에 아테네에서 델피까지 배를 타고 가게 되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밑으로 돌아서 가는 것과 고린도의 동쪽에 도착한 뒤 배를 육로로 이동하여 서쪽에 배를 다시 띄운 후 항해하는 방법이 있었다.
뱃길이 약 550Km 차이가 있어 육로로 배를 이동하는 방법을 택하고는 하였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운하를 만들고 싶었했다. 하지만 운하는 오랜 세월이 지난 1893년에서야 비로서 만들어진다.
↑ 운하를 지나는 배
양쪽 끝에 수문 역할을 하는 다리가 놓여 배가 지나갈 때 다리전체가 바다 속에 잠겼다가 배가 지나간 후에 다시 올라온 다리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보곤 한다.
잠수교 옆에는 고대에 배들을 운반했던 육로가 조금 남아있어서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을 보며 어릴 때 시청각 자료도 없이 외워야 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 잠수교와 디올코스 (배를 육로로 운반한 길)
고린도에서는 기독교 전도자였던 바울을 간과할 수 없다.
1928년 지진으로 고린도 주민들은 생활 터전을 옮겨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정교회에서는 바울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워 1대 사도로 바울이, 2006년부터 디오니시오스 신부가 89대 교회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많이 들어본 사랑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 사랑이란?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삶만큼이나 매우 다양한데 그가 고린도에 온 것은 AD50년경으로 추정한다.
고린도가 BC146년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었으나 고린도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BC44년에 다시 도시가 건설되어 풍요로움을 되찾고 있었으며 한 세기를 못 채워 바울이 방문하였을 때는 새로운 상업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하여 약 30만 명이 있는 큰 도시가 되어있었다.
아크로 고린도의 최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아마도 1000여명의 여 사제들이 양쪽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희극 배우들이 바람둥이를 가리켜 '고린도 사람같이 산다.'라는 표현이 만들어질 만큼 아크로 고린도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 사제들의 역할로 문란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바울의 눈에 비춰진 고린도의 이런 모습들은 그에게 큰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1년 6개월을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떠난 후에 걱정이 되어 보낸 4통의 편지가 2편으로 편집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유실된 편지가 있는지, 편지가 편집되었는지 현재 2편만이 성경에 수록되어 고린도 전, 후서로 전해지고 있다.
고린도에 다시 방문한 바울은 아크로 고린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2000년 전의 북적거림은 빈말이 되어 신전이 있었다는 팻말만이 남아있지만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임에는 틀림없다.
아크로 고린도에 올라가 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 무작정 집을 떠나 그리스에 온 청년을 만난 덕분에 이곳까지 올라와 보게 되었다.
인생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답답한 마음으로 계획 없이 집을 나선 청년과 함께 탁 트인 양쪽 바다를 보며 청년의 답답한 마음과 생각이 다소 정리되기를 바랐었다.
↑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본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그리스에서는 바울을 기독교 전도자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콘에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표현한 이콘을 보면 12사도들이 그려져 있는데 가장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이 그려져 있다.
실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12제자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의 전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하기에 바울을 12사도에 표현한 것이다.
당시 최고의 수식어를 다 갖고 평탄대로의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던 청년이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역할에서 180도 바뀌어 예수를 전하는 자로, 종국에는 순교까지 하는 삶은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고 있어 그에 대한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이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는 모습
현재 고린도 유적지는 폐허 위에 다시 세운 기원 전후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고린도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화, 역사, 기독교, 유물, 풍경 등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분야가 각기 다른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조각품 하나에 큰 관심을 가진 분이 있었다.
일명 높이 보정용 샌들을 신고 있는 조각으로 그분의 카메라가 방향을 바꾸며 하나의 조각상을 위해 수많은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재활의학과 교수이었다.
이렇듯 보는 입장에 따라 무심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조각상이 누군가에는 큰 의미로 다가옴을 본다.
↑ 보정용 샌들
성지순례로 고린도에 오는 분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고 가는 곳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재판을 받았던 장소이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꼈던 세네카의 형 갈리오가 새 총독으로 51년 7월 1일 고린도에 부임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 되는데, 바울이 변론하기도 전에 갈리오는 소송을 중단시킨다.
'유대인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나는 이런 사건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피고가 법을 어긴 부분이 없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명확하게 판결한 곳으로 비마(연단)라고 적혀 있다.
바울이 있었던 장소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회당에서 나와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곳의 정확한 장소는 모른다.
알려진다면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겠지만..
↑ 바울의 재판이 있었던 곳
고대 그리스 비극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두 가지 유형이 고린도와 연관되어 있다.
비극의 결정판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그 후손에게 이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버림을 받아 극단의 선택을 한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얽힌 샘이 있다.
또한 눈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면 시시포스가 받고 있는 형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어쩌면 그 형벌의 원인 제공이었던 샘이 고린도에 남겨져 시시포스가 흘리는 땀과 함께 물을 쏟아내고 있다.
↑ 글라우케 샘
↑ 아폴론 신전
↑ 피레네 샘
'이게 바다야? 호수지!'
에게 해의 사로닉만에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이용한 겐그레아 항구가 있는데 지진으로 사라져 지금은 동네 주민들이 즐기는 해변으로 남아있다.
힘들었던 고린도의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머리를 깎았던 곳이며 로마서를 건네주었던 곳이다.
여유가 있으면 지진으로 잠긴 바다 속의 부두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남는 곳이다.
↑ 겐그레아
프로크루스테스의 잣대란 말이 있다.
사람이름인데 침대에 특수 장치를 해서 길이가 유동적인 침대에 사람을 눕혀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크면 자르는 못된 짓을 하다가 테세우스에 의해 똑같은 방법으로 정리가 된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혹은 잣대란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테세우스가 아테네까지 가는 길에 있었던 일로 그의 여정 일부가 고린도에서 에피다브로스로 가는 길에 펼쳐지고 있다.
주변 경치는 차로 마냥 달리기엔 아쉬움을 남긴다.
↑ 아크로 고린도에서 보는 풍경
고대 그리스인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물리치료, 자연요양, 적당한 운동 그리고 심리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종합병원이라 불린 에피다브로스에는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한 목욕시설, 치료를 위해 환자가 꿈꾸는 곳과 그 꿈을 해석하는 곳, 실내음악당, 스타디움, 연극장, 기원을 위한 신전, 숙박시설 등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그리스 신앙을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되어 버려지고 지진으로 인해 그나마 남은 것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유일하게 완벽한 모습으로 남은 연극장이 있다.
산비탈인 것처럼 흙에 묻혀있다 발견되어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현재는 6~9월에 연극 공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아늑하게 느껴지는 산기슭에 있고 앞이 탁 트여 마치 자연을 무대로 둔 느낌을 준다.
BC4세기 유명한 조각가의 아들 폴리클레이토스 2세에 의해 만들어졌고 BC2세기에 확장되어 약1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스 극장의 특성인 원형 오케스트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중앙의 제단에 서서 소리를 내어 보면 마치 마이크 앞에 서서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전율을 느낀다.
이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관리하여 아쉽지만…
↑ 에피다브로스의 극장
좀 더 깊은 내용을 알기 위해 에피다브로스의 극장에 대한 논문을 찾아 지금은 대학원생인 아들에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보라고 했다.
'아빠. 미적분까지 해야 돼?'
이젠 근의 공식도 흐릿한 내게 아들의 말은 그 논문을 이해하고자 했던 마음을 빨리 포기시켰다.
이제는 미적분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안 되지만, 혹여 했다 한들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 논문의 요지는 원형극장이 완벽한 음향을 전달하는 것에는 원형극장의 구조에도 영향이 있지만 극장에 사용된 석회암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 에피다브로스 극장과 어울리는 황금비율을 품은 꽃
치료경위에 대한 기록이나 수술도구도 유물로 남아 있는데 아테나 여신의 탄생이 제우스의 머리를 열고 나왔다는 이상야릇한 얘기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린도의 뇌를 표현한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머리를 여는 외과 수술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유추가 되기도 한다.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어떻게 이야기 한마디 안하고 가겠는가..
팔라미디 성에 오르는 것은 차로 접근해 쉽게 들어가는 것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힘들지만 뒤에 펼쳐진 풍경과 함께 오르는 것이 좋다.
프랑스에서는 그리스 여행에 나프플리오가 필수라고 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인데, 아마 성채보다는 도시 자체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여느 그리스 도시와는 다르게 오래되었지만 잘 정돈된 건물 벽을 타고 내린 꽃, 아기자기한 모습의 골목에 보이는 상점과 음식점 등을 기웃거리며 골목길 산책하듯 지나 항구로 방향을 바꾸면 '날 부르지~'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린 듯 바다 위에 덩그러니 성채 하나가 외롭다고 서 있다.
브루지를 마주하고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카페들이 줄지은 야자수와 함께 있으니 어찌 커피 한잔 없이 떠날까?
↑ 브루지 성채
'뭐 뿌리셨어요? 냄새 좋다~'
-오렌지 꽃향기에요.
오렌지 나무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며 질문을 던졌는데 나를 대변하듯 재미없게 짧게 답변해 놓고 멋 적어서 향기를 맡아 보자고 차를 세우고 오렌지를 사서 몇 개를 권해 본다.
매년 4-5월에는 나프플리오에서 고린도로 이어진 길은 오렌지 꽃향기가 가득하여 달리는 차 안에도 스며든다.
봄에 맡는 향기도 좋고 겨울에 달린 열매를 보는 것도 그 달콤함 그대로이다.
교민 한 분이 차를 세워놓고 이름하여 서리라는 것을 하고 있었는데 몇 개 따지 않아 안쪽에서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미안한 마음으로 주인 앞에 섰는데,
-차 트렁크를 열어봐요.
에구~ 트렁크 확인을 하겠다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트렁크를 여니 주인이 수확하던 오렌지 한 박스를 맛보라며 차에 넣는 순간 그 교민 분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떠나 생활한지 오래되어 잘 모르지만 그리스에는 이런 모습이 남아있다.
차를 세우고 몇 개 따볼까?
↑ 가로수로 쓰인 오렌지 나무의 열매와 꽃, 맛은..
<기사 출처 : 유로자전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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