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나비기금 지원을 위해 빈딘성을 방문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단과 만나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증언한 베트남 할머니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응우옌티바이, 레티히에우, 팜티언, 하티낌응옥, 팜티하인, 응우옌티카인, 응우옌티떰, 하티찐 할머니. 정대협 제공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
‘위안부’ 피해자들이 연대의 손 내민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 첫 증언
할머니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평생 숨기고 살다 이제야 털어놓는다는 이도 있었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를 시작으로 일제시기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백발이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체험을 공개했듯이,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도 할머니가 돼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윤미향 대표가 지난 3월16일부터 4박5일간 베트남전 당시 빈딘성의 안년시(옛 안년현)와 뚜이프억현, 푸깟현 일대에서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할머니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정대협이 2012년부터 타국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비기금 사업의 일환이다. 첫 대상지인 콩고에 이어 베트남은 두번째다.
<한겨레>는 윤 대표가 피해 할머니들을 인터뷰한 기록을 싣는다. 61살에서 86살까지, 이번에 만난 10명 중 8명의 증언을 주요하게 담았다. 빈딘성 인민위원회가 공식 확인한 전체 성폭력 피해자 26명 중 3분의 1로, 당사자들이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당시 정황과 실상을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는 30일은 베트남전이 막을 내린 지 40주년 되는 날이다. 한국군이 전투병을 파병한 지는 50년 됐다. 피해자들이 상처와 한을 간직해온 기간이다. 베트남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간다”지만, 이들의 원한까지 닫히지는 않았다. 트라우마는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자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과 사죄, 보상을 요구한다.
빈딘성의 안년시와 뚜이프억현, 푸깟현은 1965년 10월부터 1973년 2월까지 한국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사령부와 제1연대 등이 주둔했던 곳이다. 수도사단은 주둔 기간 이 지역을 포함한 빈딘성과 푸옌성에서 총 167건의 작전과 전투를 벌였다. 1971년 5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수도사단 기갑연대 8중대 포반장(하사)으로 빈딘성 빈케 지역에서 근무했던 김낙영(67)씨는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을 해 말썽이 없었던 부대도 있지만, 잔인한 성폭력이 작전지역 곳곳에서 발생했다는 풍문을 많이 들었고 그것이 사실일 개연성은 충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대협은 오는 12월부터는 빈딘성 이외에도 한국군이 작전했던 꽝남, 꽝응아이, 푸옌, 카인호아성으로 넓혀 성폭력 피해자들을 조사하고 지원할 예정이다. 주월한국군사령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전체 한국군의 강간범죄 심판 및 징계 발생은 21건이다.(<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한겨레>는 더불어 최근 일본의 한 언론이 보도한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현 호찌민)의 ‘한국병사 전용 터키탕’ 문제를 다뤘다. 베트남전은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하는’ 역사적 사실의 창고다.
정대협의 윤미향 대표(오른쪽)가 베트남 빈딘성 안년시 응우옌티바이 할머니의 자택에서 증언을 듣고 있다. 맨 왼쪽과 할머니 오른쪽은 통역과 진행을 맡은 사회적기업 ‘아맙’의 구수정 본부장과 레호앙응언씨. 정대협 제공
처녀와 소녀들은 왜 한명씩 참호 속에 들어갔는가
“네 사람이, 한 명씩 돌아가며 내게 그 짓을 했어요.”
“참호에 한 명씩 집어넣고, 이틀 낮 이틀 밤을 가둬놓고, 연속적으로 강간을 했어요.”
베트남 중부 빈딘성에서 만난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너무 무서웠어. 너무 독악했어.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당신들 한국 사람이 무서워.”
“따이한? 아이고, 나는 몰랐어요. 당신들이? 한국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안 만났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간 우리 일행은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기피 대상인 ‘따이한’, 그들의 기억에 두려움과 독악함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따이한’이었다.
전쟁 없는 세상, 그 나비의 꿈을 안고
“여러분들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말이 생각이 잘 안 나요. 우리들도 억울하게 당했지만은, 우리 한국으로 인해서 베트남의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까,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힘으로 나비기금을 모아서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전시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재발 방지 활동을 위해 만든 나비기금이 2주년이 되던 2014년 3월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는 그렇게 ‘한국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연대의 뜻을 베트남 여성들에게 전했다. 정대협도 성명을 발표하여 “베트남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고통의 책임은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가 공동으로 져야 한다”고 밝히며 한국 정부에 전쟁범죄 인정과 진상규명 및 베트남 정부와 국민에게 공식사죄와 법적인 책임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불행히도 이후 정대협 사무실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분들이 협박전화를 걸어오기도 하고, 누리집(홈페이지)이나 에스엔에스(SNS)에 ‘가만있지 않겠다’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해 참전했다’ ‘학살이라는 표현은 우리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등의 글들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정대협이 일본 정부 및 보수우익층한테서 익히 겪어왔던 익숙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비의 여정을 중단할 수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꿈꿔왔던 세상, 정대협이 이루고 싶은 세상이 바로 ‘전쟁 없는 세상’, 다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같은 피해가 생기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지난 2월 초순께 베트남 빈딘성 인민위원회로부터 성 내에 거주하는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 26명의 명단을 메일로 받았다. 빈딘성과는 지난해 2월 초, 정대협의 나비기행으로 교류를 시작한 이후 피해자 구술기록작업 진행, 나비기금 지원 방법 등의 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차였다. 빈딘성이 보내온 피해자 명단에는 이미 정대협이 여성연맹을 통하여 피해를 확인하고 나비기금을 지원하는 여성들도 있었고, 사망자도 있었다. 새로운 피해자가 드러남에 따라 빈딘성 인민위원회와 몇 차례 메일을 더 주고받으며, 피해자 확인 방법과 나비기금 지원 방법 등에 대해 논의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빈딘성 인민위원회의 협력으로 26명 중 새로운 생존자 열 분을 만나기 위해 3월16일부터 4박5일의 일정으로 베트남 방문길에 올랐다.
● 레티히에우(1935년생)
“무서워요 무서워요, 날 어디로 끌고 가려고”
“무서워.”
안년시(옛 안년현)에서 만난 레티히에우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첫마디를 그렇게 토해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무섭다며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 모습을 대하면서 한국에서 간 우리는 할머니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자리해야 했다.
“옷을 벗기고, 난 너무 무서웠어.” 할머니는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장이 뛰어서 약을 먹었다고 한다.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계속 “지금 너무 떨려서 말 못하겠어. 나 잡아가면 어떻게 해. 어디로 끌고 갈까봐 너무 무서워. 심장이 막…. 내가 안정을 취해야지, 안정을 취해야지. 한국. 무서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이야기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사탕을 꺼내 드리고, 홍삼액도 드시게 하며 두려움을 풀어보려 애를 써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갑자기 큰 소리로 당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 좀 살려주세요. 저렇게 아이들도 있는데…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어. 총소리가 나고, 내가 애를 셋을 안고 있었어. 서너 명의 한국군이 들어와서 나를 잡고 머리에다 총을 댔어. 애들은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고, 나를 뒷집으로 끌고 가서 강간했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한국군들이 내 옷을 벗겨서 내 얼굴을 가렸어. 아이고 무서워.”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야기 등 최근의 일로 화제를 돌렸지만 또다시 과거가 재현되는 듯 “아 난 너무 무서워. 무서워. 날 어디로 끌고 갈 건데. 날 어디로 끌고 갈 건데…”라고 하며 떨었다. 우리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데도 무섭냐고 하니까 무섭단다. 불안 증세를 보이면서도 “그날이 음력 3월2일(1966년께)이었어”라고 한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그날은 지워지지 않는 듯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베트남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에
연대의 손길 내민 ‘나비기금’ 지원
빈딘성에서 확인해준 26명 중
10명 생존자 만나 증언을 듣다
“네 사람이 돌아가며 그 짓을…
이틀 내내 가둬놓고 연속적으로…
너무 무서웠어, 너무 독악했어
따이한? 아이고 나는 몰랐어요
한국인인 줄 알았음 안 만났지”
● 하티낌응옥(1935년생), 하티찐(1929년생) 자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숲이 흔들리다
응옥 할머니와 찐 할머니 자매를 만나기 위해 안년시의 응옥 할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소란스러웠다. 강아지들도 낯선 방문자를 경계하며 짖어댔고, 동네 사람들도 수군대며 우리를 구경했다.
‘아, 저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한 할머니가 어두운 집 안에서 역시 긴장과 경계의 시선으로 맞이한다. 그러면서도 미리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던 듯 당연한 몸짓으로 의자를 내준다. 그때 응옥 할머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온다. 바로 함께 피해를 입은 언니 찐 할머니였다.
응옥 할머니는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할 당시 남편이 북베트남으로 가 있었다. “내 남편은 북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기에 북으로 갔어요. 나 혼자 남쪽에 남았어요.”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협정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북의 편에 서서 싸우던 사람은 북으로, 남의 편에 서서 싸우던 사람은 남으로 가야 했다. 응옥 할머니의 남편은 이 협정에 따라 북으로 갔던 것이다. 응옥 할머니는 언니와 오빠 가족과 함께 고향에 남아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숲이 흔들렸어요. 누군가 외쳤어요. 한국군이다. 한국군이다. 숲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한국 군인들이 온몸에 풀과 나무로 위장을 하고 오고 있었던 거예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쳤지만 결국 잡히고 말았어요. 언니와 올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잡혔어요.” 두 자매와 올케는 한국군에게 잡혀 뚜이프억현의 푸꽝촌 한국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우리 셋을 베트콩 잡으러 가자며 따로따로 끌고 나갔어요. 그런데 풀숲으로 끌고 갔어요. 베트콩 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강간하러 간 거죠. 한 사람은 이쪽 풀숲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풀숲에 끌고 가 강간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언덕으로 끌고 가서는 비시(VC, 베트콩)! 비시! 하고 소리쳤어요.” 동생이 증언을 계속하는 동안 언니는 큰 눈을 끔뻑끔뻑할 뿐이었다.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막을 수도 없었어요. 한국군들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거든요. 혼이 다 달아나서 한국군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각도 안 나요.” 강간을 당한 뒤 세 여자는 2박3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응옥 할머니는 서른 살이 넘은 나이였다.
언니인 찐 할머니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 풀숲에서 두 명의 병사가 내게 덤벼들었어요. 바지와 웃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낄낄거리고 웃고, 나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면서 희롱했어요. 그리고 강간했어요. 한 명이 하고, 그다음 한 명이 하고. 그러고 나서도 나를 돌려보내지 않고 나를 끌고 베트콩을 찾으러 갔어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찐 할머니를 초소로 돌려보낸 이후에 또다시 한국군은 찐 할머니를 끌고 나가 강간을 한 뒤에야 돌려보냈다. 올케도 함께 피해를 입었지만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이나 피해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의 마음도 전할 수 없었다.
● 응우옌티카인(1936년생), 응우옌티떰(1954년생) 자매
2박3일간 일고여덟번 끌려나가다
역시 안년시에 살고 있는 응우옌티카인과 응우옌티떰 자매. 두 사람은 우리를 만나자마자 몸의 고통부터 하소연을 한다. “날씨가 추우면 손발 등이 무지무지 아파요. 척추도 아프고 등도 아프고.” 언니가 입을 열자, 동생도 “어깨도 아프고 뼈도 아픈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두 자매가 한국군에게 강간당할 때 언니는 서른다섯 살쯤(1970년께), 동생은 열일곱 살 무렵이었다. “언니랑 엄마랑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논에서 풀을 뽑고 있었어요. 모두 일곱 명이었어요. 할머니들도 있었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애도 두 명이 있었어요. 일에 열중하다 보니까 아무도 한국군이 가까이 오는 줄을 몰랐어요.” 동생인 떰이 이대로 인터뷰를 진행해도 좋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눈동자를 위로 아래로 돌려가면서, 턱은 천장을 향해 올린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누군가 ‘따이한’ ‘따이한’ 소리를 쳤어요. 그 소리를 듣고서야 고보이 평야 쪽에서 한국군들이 오는 것을 알았어요.” 한국군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떰 할머니는 더더욱 이상증세를 보였다. 갈수록 목소리는 떨리고, 얼굴 표정도 불안해 보였다. 그런데도 언니는 옆에서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 무릎을 양팔로 감싼 채 자신의 맨발을 응시하고 있었다.
“멈춰! 한국군이 말했어요. 우리는 무서워서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그길로 일곱 명의 마을 여자들은 묶인 채 끌려갔고, 가다가 마을이 나타나면 다시 수색을 해서 한 명을 다시 묶어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고보이 한국군 기지였다. 빈 건물에 여성들을 감금하고, 한 명씩 여자들을 불러내 눈을 가리고 뒤통수에 총을 겨눈 채 한국 군인들은 소리쳤다. “너 베트콩이지!” 그러면 여자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세 번 흔들었다. 그것이 끝나면 강간을 하고 풀어줬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도, 또 그다음 사람도…. 2박3일 동안 계속 반복해서 강간을 당했다. 하룻밤에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일곱, 여덟 번은 끌려 나간 것 같다고 한다.
“(함께 끌려간) 엄마는 너무 늙어서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무지하게 많이 맞았어요. 그때 우리도 많이 맞았어요. 총 개머리판으로 계속 맞으면서 강간도 당하고 그랬어요. 풀려날 때 걸음을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살아서 풀려난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해서 걸었어요.”
그때 묵묵히 있던 언니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결혼도 한 뒤였는데, 막내는 너무 어려서 그 일을 당해서 계속 하혈을 했어요. 엄마가 이것저것 약을 구해서 먹이기도 하고, 몸에 바르기도 했지만 낫지를 않았어요. 엄마가 딸들 때문에 너무 고통을 겪었어요. 슬퍼하고 아파하고, 너무 걱정을 하니까 엄마 앞에서는 울지 못했어요.”
● 응우옌티바이(1948년생)
손으로 펴보인 손가락 네 개의 의미는
안년시의 응우옌티바이 할머니는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 수색작전을 나온 한국군이 마을의 노인들과 바이 모녀를 방공호에 모아놓고 총을 겨누며 베트콩을 찾았다.
“잡힌 사람은 모두가 노인과 여자들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손을 위로 들고 흔들며 없다고 했어요.” 갑자기 할머니는 목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추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노인들을 땅굴 위로 올라오라고 했어요. 골라낸 것이죠. 땅굴에 남은 어린 사람은 결국 나 혼자였어요. 혼자 남은 내게 한국 군인들은 ‘그 짓’을 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할머니는 한국 군인들의 강간행위를 ‘그 짓을 했다’고 표현을 했다.
손으로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한국군 4명이 들어왔어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도 지를 수 없었어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내게 그 짓을 했어요. 마지막 네 번째는 내가 혼절을 해서 축 늘어져 있으니까 무서워서 그냥 달아나버렸어요. 엄마도 나를 도울 수 없었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전쟁이 끝난 뒤 아무에게도 이야기 못했다고 하는 할머니, 남편에게도 말 못하고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모른다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쟁 때 바이 할머니가 겪은 사연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가 알게 된 것도 할머니가 사는 마을의 인민위원회에서 빈딘성 인민위원회로 알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달 3월17일 오전 베트남 꾸이년시의 빈딘성 인민위원회 국제협력실·여성연맹 간부들이 인민위 사무실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관계자들과 회의를 마친 뒤 나비기금 리플릿을 들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정대협 제공
● 팜티하인(1951년생)
혁명활동 때문에 고문과 성폭행 당해
“그때 한국군에게 구타당하고, 고문당하고 그래서 폐가 손상이 된 것 같아요.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신경계통의 질환도 있어요.”
푸깟현의 팜티하인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팜티하인 할머니는 체포 당시 혁명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열일곱 살쯤(68년께) 되던 어느 날 깟탕(Cat Thang) 마을에서 깟카인(Cat Khanh) 마을로 베트콩에게 서류를 전달하고 나오는 길에 팜티하인은 한국군에게 잡혔다. 그리고 푸깟비행장 한국군 부대에서 팜티하인은 강간 피해를 입게 된다.
“그곳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목욕하러 들어갔을 때 한국군이 들어왔어요. 있는 힘 다해서 저항을 했지만 군인이 입을 막았어요. 그 짓을 하는데 이겨낼 수 없었어요. 그곳에서 2개월 지내는 동안 세 번을 강간당했어요. 다 다른 군인들이었어요.” 팜티하인은 강간뿐만 아니라 전기고문과 구타, 발길질 등의 고문도 계속 당했다. 이후에도 푸깟현 감옥, 다시 꾸이년 감옥에서 투옥 생활을 하다 1968년 12월에야 풀려났다.
“70년께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한테도 혁명활동 한 것, 강간당한 것을 숨겼어요. 그때 스무 살쯤 되었는데 어떻게 남편한테 말해요. 지금도 몰라요. 자식들도 몰라요. 나랑 같이 수감되었던 사람들만 알죠.”
할머니는 그때 생각을 떠올리거나 하면 그날부터 악몽을 꾼다. 밥도 먹을 수가 없고, 온몸이 아파온다. 전쟁이 끝나고 4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통은 계속된다.
● 팜티언(1951년생)
남편은 결국 자리를 피하다
안년시의 팜티언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이 팜티언 할머니에게 한 범죄는 명백히 지휘부의 명령 없이는 불가능한, 조직적인 강간이라는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꾸이년의 고보이 평야에서 체포되어 뚜이프억현 프억선의 한국군 기지로 끌려갔다. 기지에는 일렬로 나란히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참호 속에 한국군이 1인씩 들어가 있었는데, 그 속에 끌고 온 여성들을 집어넣었다.
“내가 잡혀간 날 주민들 30~40명이 함께 잡혀갔어요. 그런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격리를 했어요. 아이가 있거나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따로 모아놓고, 처녀이거나 소녀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자들은 참호 속에 한 명씩 넣었어요.”
우리가 할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 남편과 할머니가 함께 우리를 맞이했는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할머니께 남편이 옆에 있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괜찮다고, 남편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괜찮지 않았다. 한국 군인에게 강간당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할머니도 다른 할머니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는 아주 작아졌고, 몸은 잔뜩 웅크렸다. 결국 남편도 괴로움에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참호 속에 있던 그 군인에게 2박3일 동안 연속해서 죽을 때까지 강간당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낮에는 두 번, 밤에는 세 번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한국군이 옷을 벗으라고 하고 강간하고, 다시 옷을 입으면 벗으라 하고 강간하고, 또 옷을 입으면? 계속 반복했어요. 쌍꺼풀이 없는 눈이었고, 잘생기고 젊은 병사였어요.”
2박3일 동안 강간을 당한 뒤 풀려날 때 할머니는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다고 한다. 1970년 2월의 일이었다.
“베트콩 잡으러 가자며 저희 자매와
올케를 따로따로 끌고 나갔어요
그런데 풀숲으로 가는 거예요
베트콩을 잡으러 간 게 아니에요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어요”
전쟁이 끝난 뒤엔 마을 사람들의
희롱과 조롱을 마주해야 했다
몇 번 했는지를 물으며 놀렸고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 옆에
가지 말라면서 따돌리기도 했다
다시 올까 두려운 한국군…사죄와 보상 요구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 외에도 안년시에서 우리는 한국군 ‘곽’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아 홀로 키워온 여성도 만났고, 푸깟에서는 한진건설 노동자 ‘최’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아 홀로 키워온 여성도 만났다. 이들 여성은 한결같이 버려졌다는 기억과 함께 그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베트남 사회에서 라이따이한이라는 낙인을 갖고 살아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을 하소연했다. 아울러 아버지를, 형제들을 만나고 싶다며 우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피해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가 전쟁이 만들어낸 아픔이었다.
한국 군인들에게 강간과 고문, 성폭력을 당한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마주해야 했다. 언니와 올케와 함께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하티낌응옥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에게 희롱과 조롱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몇 개 했어?” 하면서 놀리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 하면서 따돌렸다. 그래서 할머니는 한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이 쓰고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들 여성들은 계속되는 악몽,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무서워 무서워, 혼이 달아나게 무서워. 그때 그 일을 돌이켜 생각할 수가 없어요.” 하티낌응옥 할머니는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공포로 몸을 떤다. 언니와 함께 피해를 입었던 응우옌티떰도 고통을 호소한다. “잠자는데 자꾸 총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깜짝깜짝 깼어요. 강간당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어요. 당신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 너무 무서워요.”
응우옌티바이 할머니도 전쟁이 끝나고 계속 그 일이 연상되었고, 악몽을 꿨다.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지금 얘기할 때도 너무 무서워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절에 다니면서 기도했어요. 이 재난에서 나를 탈출하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한국군이 다시 올까봐 무섭다고 했다. 사죄를 요구하고 싶지만 한국 군인들이 다시 올까봐 무섭다며 할머니가 여기 살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한국이 연상되는 것만 봐도 공포가 재발되었다. 팜티언 할머니는 만약 우리가 한국 남자였으면 못 만났을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할머니는 한국 드라마도 무서워서 못 본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은 할머니에게 ‘독악’ ‘공포’의 연상이고 상징이 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 한국 정부가 인정 안 해? 내가 직접 증인인데? 정부한테 오라고 해. 한국 정부가 오면 다 내가 이야기해줄게. 한국 정부에게 말하는 것은 안 무서워. 그때가 무서운 거지.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당했는지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 정부보고 오라고 해.” 하티낌응옥 할머니는 한국 정부와 한국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고 한다.
팜티언 할머니도 아직 한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을 한다. “한국 정부가 인정 안 해? 병사들한테 알아보면 되잖아. 그 사람들도 인정 안 해? 나 같은 사람이 있는데, 없다고 하면 그게 말이 돼? 그걸 어떻게 없었다고 해?”
하티낌응옥 할머니는 한국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나는 한국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사실을 말할 권리가 있어요. 그때 일만 우리에게 배상해서는 안 돼요. 그때 그 일로 우리가 현재까지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당하고 있는 고통에 걸맞은 배상을 해야 해요.”
할머니는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에 인정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 정부도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를 향해 우리가 잘못한 일들에 대해서 책임을 요구할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범죄는 드러나기 마련이고, 진실과 정의는 세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라고 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태도, 이것이 우리 정부와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본다. 가해를 부정하고, 우리의 잘못을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가해가 됨을 이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충분히 배웠다. 한국 사회는 일본을 거울로 삼아 그와는 다른 모습으로, 성숙한 자세로 상처를 치유로, 가해를 책임으로 이행하며 궁극에는 평화로, 화해로 나아가면 좋겠다.
베트남 빈딘/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통역·진행 구수정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본부장, 레호앙응언
정대협과 나비기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한국의 37개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990년 11월16일에 결성한 단체이다. 올해로 25돌을 맞이한다.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통해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생존자)들의 명예회복, 전시하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방지” 등을 목적으로 삼고, 피해자 복지지원을 포함하여 유엔(UN), 아시아연대회의 등 국제연대활동과 교육, 추모사업 등 다양한 국내 활동을 하고 있다. 1992년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정기시위는 23년을 넘었고, 4월8일로 1173번째가 되었다. 2012년에는 9년에 걸친 시민모금으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세웠다.
또한 2012년 3월8일에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며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연대하기 위한 나비기금을 설립하였다. 2012년부터 콩고 내전에서의 성폭력 피해자와 성폭력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2013년부터는 베트남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모든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갯짓하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비기금 모금계좌국민은행 069137-04-010752 정대협(나비기금)
<기사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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