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산토리니(Santorini)
이아 마을 해질녘 풍경이다. 이 동화 같은 풍경에 반해서 관광객들이 산 넘고 바다 건너 섬을 찾아온다.
자, 지중해 동쪽 에게해에 있는 어떤 섬 이야기다. 풍광에 관한 한 여기 한 번 안 가보고 명함 내밀기 민망한 섬이다. 지금부터 그 섬, 산토리니(Santorini) 이야기다.
◇서점 아틀란티스와 고양이 실비
그리스 산토리니 섬 북쪽 도시 이아(Oia)에 있는 서점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산다. 이름은 실비(Sylvie)다. 암컷이다. 손길 주인은 마케도니아인부터 한국인까지 다양하다. 주인 크레그와 올리버는 영국인 부부고 서점 이름은 아틀란티스다. 아틀란티스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대륙이다. 많은 사람들이 산토리니가 바로 그 사라진 대륙이라고 믿는다. 주인 크레그도 그랬다. 실비도 그럴 것이다. 실비는 손님 손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손님 손길에 무관심하다. 산토리니를 닮았다.
2002년 산토리니에 놀러갔던 크레그와 올리버는 이 섬에 푹 빠졌다. 2년 뒤 두 사람은 미니밴을 타고서 영국해협을 건너 육로와 해로를 거쳐 산토리니에 정착했다. 미니밴에는 책이 하나 가득 실려 있었다. 신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이 섬나라에 책방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선장의 집 지하실에 문을 연 서점 아틀란티스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예쁜' 서점으로 소문이 났다. 얼마만큼 예쁜가 하면, 산토리니만큼 예쁘다. 지구를 돌고 돌아 산토리니까지 와서 결혼 사진을 찍는 젊은 신혼부부들만큼 예쁘다.
1 산토리니 북서쪽 이아(Oia)에 있는 서점 아틀란티스에는 고양이 실비가 산다. 2 할머니가 지나가는 피르고스 골목.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와 산토리니
기원전 1500년 에게해에 있던 화산섬 티라가 폭발했다. 티라는 분화구만 남기고 사라졌다. 티라에 융성했던 키클라데스 문명도 사라졌다. 밀려간 쓰나미는 남쪽에 있던 크레타 섬을 덮쳤다. 크레타 섬에 있던 미노아 문명도 망했다. 황망하게 사라진 키클라데스 문명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이 언급한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가 이 티라 섬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티라 섬은 분화구 능선만 초승달처럼 남고 폐허가 됐다. 13세기 섬에 들어온 로마인들은 데살로니카에 살았던 성녀 이레네(Santo Irene·산토 이레네) 이름을 따서 섬을 산토리니라 불렀다.
사람들은 분화구 쪽 절벽에 남향집을 짓고 살았다. 가파르기 짝이 없어서 아랫집 지붕은 윗집 마당이 되고, 어렵사리 담과 담을 비집고 골목이 생겨났다. 벽은 흰색으로 칠하고 창틀은 바다를 닮은 코발트색으로 칠했다. 대지를 반듯반듯하게 구획할 엄두도 못 내고 대충 살았다. 샘물 하나 없는 척박한 땅이라 경제 개발도 꿈꾸지 못한 채 살았다. 그렇게 한 이천년 살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눈부신 흰색과 눈부신 코발트빛 집들,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직선이 사라진 골목에 파스텔 톤으로 대충 덧칠한 낡은 담벼락이 거기 정지해 있지 않은가. 문명사회에서 일찌감치 사라져버린 모든 것들이. 그림 그리는 쟁이들이 몰려들고 이어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1956년 대지진에 마을들이 파괴되자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똑같이 집들을 재건했다. 그게 산토리니로 사람들이 오는 이유였으니까. 물 한 방울 솟지 않는 척박한 땅은 오히려 포도나무 잘 자라는 훌륭한 땅으로 재인식됐고 산토리니 여름은 숨 막히는 더위에서 투명한 태양빛으로 재포장됐다.
3 피르고스에 있는 스물아홉 개 교회 가운데 하나인 성모마리아 교회. 4 피르고스 가정집에 빨래가 걸렸다.
◇피르고스(Pyrgos), 그리고 이아(Oia)
산토리니 본섬은 면적이 80㎢ 정도로 작다. 경주하듯 차를 몰면 반나절이면 다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흘도 모자란다. 분화구 능선을 따라 마을들이 늘어서 있는데, 제일 큰 마을은 피라(Fira), 가장 유명한 마을은 이아(Oia)다. 광고 영상이나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다. 섬 북쪽 끝에 있다. 이 동화 같은 마을은 해질녘 볼거리로 남겨두도록 한다. 피라에서 남쪽으로 7.5㎞ 떨어진 피르고스를 첫 번째 방문지로 삼는다. 다른 마을과 달리 분화구 능선에서 벗어나 선지자 엘리야 수도원이 있는 프로피티스 엘리아스 산 기슭에 있다.
마을로 오르는 언덕길 꼭대기에서 일단 멈춤. 작은 그리스 정교회 건물 앞에서 마을을 보면 마을이 온통 흰색이다. 장난감 블록을 대충 쌓은 듯한 그 외곽을 카메라에 담고 길을 이으면 마을 입구 공터가 나온다. 그다음부터는 미로(迷路)다. 의도적으로 만들려면 난해하기 짝이 없는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바닥에 돌들을 깔아놓고 틈새를 석회로 칠해 걷기에도 딱 좋다. 담은 희고 노랗고 때로는 푸르다. '그림 같다'는 말은 최소한 피르고스에서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벽과 창틀을 도화지 삼아서 사람들은 거친 마티에르 질감의 비구상 작품을 그려놓았다.
민속촌과 박물관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그 흰 담 너머를 기웃대다가 사람 소리에 한 번 놀라고, 그 사람이 튀어나와서 어깨를 걸고선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주민 수는 600명이다.
골목 계단을 올라갈수록 1956년 지진의 흔적이 남아서 주변 색깔은 원색에서 흙색으로 변한다. 아무리 헤매도 질리지 않는 미로의 끝이다. 그 폐허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산토리니 섬 전체가 보인다. 파란 색은 바다거나 밭이고 하얀색 덩어리들은 마을들이다. 골목 어귀에 있는 찻집에서 그리스 에스프레소를 홀짝여본다. 동행 한 사람이 말했다. "진흙만큼 진하고, 진흙만큼 맛없다." 7월 20일에는 산꼭대기 수도원에서 엘리야 성자 축제가 열린다. 피르고스에는 푸른 돔과 흰 십자가를 가진 교회가 스물아홉 개 있다. 모두 아름답다.
섬 북쪽 끝에 있는 마을 이아는 피르고스와 또 대비된다. 전형적인 산토리니 마을이며 동시에 가장 유명한 마을이다. 가장 어린 마을이기도 하다. '선장의 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잘나가던 상업항구였지만 1956년 대지진은 이아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아테네 옆 피레우스 항으로 집단이주했던 주민들은 1980년대 들어서야 돌아왔다. 마을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고. 그런데 그 마을 위치가 하필이면 남서향 절벽 위다 보니, '세계 최고의 석양'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면서 순식간에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둔갑한 것이다. 순식간에 집들은 선물가게, 화랑, 명품점, 부티크 호텔로 변신했다. 피르고스처럼 주민이 사는 게 아니라 밤이 되면 가로등만 덜렁 불을 밝히는 상업도시가 되었다.
그래도 눈은 즐겁기 한량없다. 파란 하늘과 하얀 집들과 좁은 골목과 파란 교회 지붕이 활처럼 휜 절벽을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빈틈없이 채운다. 자세하게 보면 웨딩드레스를 입고서 열심히 촬영 중인 중국인 커플들이 셀 수 없이 눈에 보인다. 그들을 따라 서쪽 끝으로 갈 무렵 날이 맑고 해가 지면 좋겠다. 성채가 있는 즈음에 성벽에 걸터앉아 바다를 보면 낡은 풍차와 하얀 절벽과 골목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 황금빛으로 불탄다.
엠포리오 마을 뒷골목들. 담벼락은 흰 회칠을 했고 문은 코발트 계통으로 푸르게 칠했다. 골목과 골목이 무한히 연결돼 미로를 만들었다.
◇엠포리오(Emporeio)와 피라(Fira)
피르고스와 이아만큼 서로 대비되는 마을들이다. 엠포리오는 주민들이 작심을 하고 옛 모습을 남겨둔 마을이다. 역시 능선을 벗어나 내륙 산 기슭에 있다. 산토리니에서 가장 큰 마을이지만 마을 위쪽은 옛 모습 그대로다. 마을회관이 있는 중심광장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장난감 같은 건물이 나온다. 하얀 벽에 빨간 창문을 가진 3층짜리 건물이다. 그 뒤로 가면 낡은 성채가 나오고 성채 위로 아치형 골목이 보인다. 골목은 또 다른 골목과 이어지고, 그 골목은 또 다른 골목과 만난다. 모퉁이만 돌면 나타나는 그림 같은 풍경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중첩되는 골목 어귀에서 슥 하고 지나가는 고양이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자. 모델 짓에 익숙한 놈들이라 도망가지도 않는다.
피라는 번화하다. 온갖 먹을 것, 살 것들이 이 마을에 집중돼 있다. 워낙 상업화된 곳이라 정작 낮에는 정이 가는 곳은 아니다. 밤이면 다르다. 다른 마을들은 어둠 속에 잠들지만, 피라는 밝다. 몸에 좋다는 그리크 샐러드와 요거트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고 가난한 배낭족들을 위한 분식집도 많다. 이거저거 다 입에 안 맞는 사람들은 다섯 군데나 있는 중식당에 가도 좋다. 절벽 아래 옛 선착장에서 피라까지 케이블카와 당나귀가 유료로 오간다. 섬이 좁으니 어디를 가든 끼니는 이곳에서 편하게 때울 수 있다.
산토리니의 동쪽은 해변이다. 검은 모래와 붉은 모래가 뒤섞인 해변에서 사람들은 발가벗고 태양볕을 쬐고 산토리니 토종 동키 맥주를 홀짝인다. 서쪽 능선과 동쪽 해안 사이는 너른 초원이다. 지금쯤 유채가 피고 포도잎이 솟아 있겠다. 관광업에서 소외된 토종 농부들이 주인인 공간이다. 큰 마을들을 순례하다가 다리가 아파오면 그 푸른 공간을 지나 해변으로 가서 휴식한다. 5월이면 벌써 태양이 뜨겁다. 가끔 내리는 비에는 사하라에서 날아온 모래가 섞여 있으나, 걱정은 하지 않는다. 중금속이며 미세먼지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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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1. 유럽행 항공: 유럽으로 가는 여러 항공편 가운데 터키항공 추천. 이스탄불에서 여러 목적지까지 운항 시간이 짧다. 항공편에 따라서 공짜로 이스탄불 시티 투어도 할 수 있다. 2011년부터 작년까지 유럽 최고 여행사에 선정됐다. 인천-이스탄불 주11회, 이스탄불-아테네 주42회 운항. www.turkishairlines.com, 전화 1800-8490
2. 유레일패스: 한국 배낭족이 즐겨 찾는 유레일패스에 그리스 페리선 티켓인 아티카 패스(Attica Pass)가 추가됐다. 그리스 국내 4회, 국제선 2회를 탑승할 수 있는 티켓이다. 한국에서 예약 가능. 아테네~산토리니 왕복과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파트라스~바리 구간 국제선도 포함돼 있다. 육로 이동수단도 포함돼 있다. 1등석 242유로, 2등석 174유로. 아티카 패스 없이 직접 사는 것보다 10만원 정도 저렴하다. 패스는 각 여행사 및 kr.eurail.com에서 구입 가능. 유레일 개략 정보는 www.eurailgroup.org
산토리니 여행
1. 여행 적기: 10월부터 4월은 우기(雨期). 흙탕비가 내린다. 6월 중순부터는 불볕 더위다.
2. 이동 수단: 렌터카 필수. 하루 60유로 정도. 작은 섬이지만 걷기에는 크고 패키지를 따라다니기에는 아쉽다.
3. 숙소 구하기: 짐이 적다면 이아 혹은 피라에 있는 분화구 쪽 부티크 호텔 추천. 계단으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엄청 힘들다. 짐이 많다면 아예 능선 바깥쪽에 숙소를 잡고 편하게 돌아다닌다.
<기사 출처 : 조선일보>
<기사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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