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올해를 ‘범죄 피해자 보호’ 원년 삼겠다는데… 스토커 피해 여성 보호한다며 모텔 데려가는 경찰




서울에 사는 30대 여성 A씨는 50대 남성 스토커로부터 2년 동안 폭행과 협박에 시달려왔다. 미혼인 그는 구애와 폭언을 일삼았다. 지난달 중순 A씨의 집을 찾아와 욕설을 하고 때릴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겁에 질린 A씨는 112에 신고했고,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얼마 뒤 경찰이 안내해준 ‘임시 숙소’를 찾아간 A씨는 아연실색했다. 범죄피해자 임시숙소라는 그곳은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모텔이었다. A씨는 이날 여경 두 명과 함께 모텔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일반적으로 경찰이 함께 있지 않지만 ‘무섭다’는 A씨 요청에 특별히 첫날만 배치됐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계속 계시겠느냐”는 여경의 질문에 A씨는 귀가를 선택했다.

A씨는 10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음식을 만들 수도, 빨래를 할 수 없는 모텔 방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는 없었다”며 “가해자가 다시 찾아올까봐 두렵긴 하지만 모텔에서 지내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A씨에게 경찰이 알려준 행동지침은 ‘평상시 문을 꼭 잠그고, 스토커가 다시 찾아오면 112에 바로 신고하라’는 것뿐이었다.

경찰이 올해를 범죄피해자 보호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나섰지만 ‘헛구호’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예산과 각종 인프라 부족으로 범죄피해자 권리 안내·보호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서울시내에 범죄피해자를 위한 임시숙소는 모두 31곳이 있다. 각 경찰서마다 하나씩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모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일반 주거시설을 이용한 임시숙소는 딱 하나뿐이다.

A씨가 묵었던 모텔은 서울 동부 지역의 유흥가 한복판에 있고, 주변에는 술집만 40곳 넘게 자리 잡고 있다. 골목 건너편에는 나이트클럽을 비롯해 ‘안마방’ ‘전화데이트방’ 등 유흥업소 간판이 즐비하다.


보안 유지도 되지 않고 있다. 모텔 출입구엔 별다른 방범장치 없이 30대 남성 1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범죄피해자 임시숙소는 신변 보호를 위해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며 안전을 자신했다. 그러나 신분을 숨긴 채 “이곳이 범죄피해자 임시숙소가 맞느냐”고 묻자 모텔 직원은 “그렇다”고 쉽게 답했다. 여기에다 피해자 임시숙소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최대 5, 6일에 불과하다. 경찰 관계자는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예산 문제 탓에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2011년 623억원 규모로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을 설치했다. 올해 개정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이 시행되면서 기금 규모는 915억원으로 늘었다. 반면 경찰이 이 기금에서 범죄피해자 지원사업으로 쓰는 돈은 전체의 0.22%에 그친다.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 김지한 사무국장은 “전국 59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1년 예산(약 120억원) 중 중앙정부의 예산 비중은 14억원에 불과하다”며 “예산의 45% 정도가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30% 정도가 기부금이라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했다. 연합회에서 1년에 센터 1곳당 평균 2억원을 지원하는데 이 돈으로는 범죄피해자의 생계비와 의료비를 지원하기도 벅차다.

우리와 달리 주요 나라들은 범죄피해자 지원정책을 수십년 전부터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1964년 세계 최초로 범죄피해자 보상제도를 시행한 뉴질랜드는 2010년 7월 ‘범죄세’를 도입했다. 범죄 종류에 관계없이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가해자에게 50달러의 범죄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징수한 돈은 성폭력 피해자의 상담 비용과 법정 출석을 위한 교통비·지원금에 전액 사용된다.

영국 내무성은 60년대 이후 범죄피해자보호협회(VS) 등 민간단체와 협력하고 있다. 민간단체들은 정부 지원금을 바탕으로 범죄피해자에게 무료로 심리 상담, 법적대응 방안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독일은 각 경찰서마다 피해자 보호 전담인력을 배치해 신변을 지켜주고 가해자 접근을 감시하고 있다.

가해자의 보복범죄는 매년 증가세다. 경찰에 따르면 2008년 87건이었던 보복범죄는 지난해 255건까지 늘었다. 2012년 7월에 보복범죄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폭력성도 심해지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지자체와 연계해 빈 주택을 개조해 범죄피해자가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임시숙소로 만들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프라가 점점 구축돼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사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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