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른 아침, 경기도 성남에서 서울 잠실로 가는 좌석버스 안. ‘어디선가 김치 쉰내가 나는 것 같은데…’.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먹고 있다. 아마도 참치김치 맛 내지는 김치볶음밥 맛이 아닐까. 아무튼 밀폐된 공간에서 풍기는 김치 냄새가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너무하신 것 아닌가요?” 한마디 해 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는다. 삼각김밥 하나에 유난 떠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나저나 다른 승객은 다 괜찮은 건가?
#2 저녁 7시 지하철 2호선. 객차 안은 승객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거슬린다. ‘툭, 툭’. 내 어깨를 불규칙한 리듬으로 자꾸 건드리고 있는 그 남자의 백팩. 무슨 돌덩이라도 들었는지 묵직하고 빵빵하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뒤에 서 있는 그는 시종일관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다. 이거 제대로 맞으면 큰일나겠다 싶어 그에게 내 존재를 알리기로 한다. “저기, 가방이 자꾸 저를 치네요. 조금만 조심해 주세요.” “네?”하고 남성이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본 순간 백팩은 좌석에 앉아있던 애꿎은 아저씨의 얼굴을 강타한다.
두 이야기는 직장인 김진양(30)·이효진(35)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종종 맞닥뜨리는 상황이다. 분명히 비매너 행동인 것 같긴 한데 문제 제기를 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상대방에게 “다 괜찮다는데 왜 당신만 선비 노릇이냐”며 역공격을 당할 것 같기도 하다. 요즘에는 대놓곤 차마 말 못했던 이런 이야기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등을 통해 옮겨 간다. ‘내가 만난 지하철 진상남’ ‘버스 안에서 이해 안 가는 행동’ ‘오늘 열차 안에서 어이없는 아주머니를 봤습니다’ 등의 형식으로. 이 중에서도 주요 고발 내용을 분석해 봤다.
이야기의 면면을 보면 앞서 사례로 등장한 대중교통 내 ‘먹방남녀’ ‘백팩남녀’는 흔한 일이다. ‘큰 소리로 오랫동안 통화하는 사람’ ‘내리지도 않을 거면서 버스나 지하철 출입문 앞에 서 있는 사람’ ‘좌석버스에서 뒤에 사람이 있는데 지나치게 의자를 뒤로 젖히는 사람’ ‘지하철에서 파우더 가루 날리며 화장 고치는 사람’ 등 다양한 일화가 등장한다. 심지어 몰래 찍은 ‘인증샷’까지 올라온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고속버스 앞 자리에 사람이 앉아있는데 머리받침 부분에 발을 올리고, 자신의 좌석은 뒤로 한껏 젖힌 이름 모를 여성의 사진이 올라와 몇몇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때로는 논쟁이 붙는다. 요즘 불거지고 있는 건 ‘버스 자리 선택’이다. 버스 안에는 두 사람이 같이 앉을 수 있는 2인용 좌석이 있는데 이 좌석이 비어있을 때 안 좌석과 바깥 좌석 중 어디에 앉느냐의 문제다. 김진남(40·서울 공덕동)씨는 “바로 내릴 게 아니라면 당연히 안에 앉는 게 다음 사람을 위한 매너”라고 말했다. 반면 정윤신(32·서울 금호동)씨는 “내리기 쉬워 바깥 자리를 선호하는데 사람이 왔을 때 다리를 살짝 비켜주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버스 자리 선택 말고도 다툴 건 많다. 백팩을 즐겨 메는 사람들은 “가방도 내 마음대로 못 메는 거냐”며 반발하고, ‘대중교통 내에서 음식물은 어디까지 섭취할 수 있나’를 두고도 의견이 나뉜다.
정답은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 관련 종사자들에게 물었다. ‘버스 자리 선택’ 문제에 대해선 서울시 버스정책과를 통해 “자리를 선택하는 건 승객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 에티켓으로까지 규정하는 건 조금 과도하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음식물 섭취에 대해서는 서울메트로 영업처 이재원 차장이 “가급적 열차 내 취식은 물이나 커피 종류라도 피해 주시길 바란다”며 “마시다 흘리거나 쏟게 되면 옆 승객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메트로는 조만간 ‘백팩 바로 메기’ 캠페인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혼잡한 열차 안에서는 가방을 다리 밑으로 내려놓거나 선반 위에 올려놓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다. 서울시는 시내버스가 특정 구간을 지날 때 ‘차내가 복잡할 때는 등산 장비나 배낭 또는 가방의 쇠붙이 등으로 인해 다른 승객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권장사항’일 뿐 ‘강제사항’은 아니다. 구재성 서울시 버스정책팀장은 “애완동물과 동승하거나 다른 승객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위 등을 버스운송약관을 만들어 제한하고 있지만 일종의 ‘약속’ 개념이지 법적 규제가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종종 승객 간 이런 일로 갈등이 생기면 버스 회사는 ‘회사 측에서 결판을 내달라’는 민원성 전화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왜 이것도 하나 못 막느냐”는 핀잔을 듣는다. 이재원 차장은 “가끔 정말 사소한 일로 다툼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것까지 우리가 해결해드릴 순 없다”며 “승객이 조금만 서로 배려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일은 늘 골칫거리다. 호주에서는 자신의 SNS 계정에 ‘cityfail’ 태그를 걸어 대중교통 내에서 겪은 황당한 일들을 인증샷과 함께 남긴다. 기차 안에서 머리를 미는 사람, 사람이 앉아야 할 의자에 짐을 잔뜩 실어놓은 사람, 쓰레기로 더럽혀진 좌석 등 종류도 다양하다.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의 영어 강사 벨라(29)는 “미국도 지하철 바닥에 앉는 승객, 열차 좌석에 누워 가는 승객 등 부류가 다양하다”며 “‘자제해 달라’는 안내 문구가 있어도 모두 지키진 않는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 지하철을 운영하는 파리교통공사(RATP)는 지하철에서 꼭 지켜야 할 에티켓을 선별해 캠페인 광고를 만들었다. 광고 포스터는 지하철 의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사람을 ‘멧돼지’로, 커다란 백팩을 맨 채 주변 승객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의 머리는 ‘거북이’로 묘사했다.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지하철에 타려는 사람은 ‘물소의 머리’로 풍자했다. 그리고 ‘지하철 전 라인에서 시민 의식을 지킵시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일본 도쿄 지하철은 ‘OO 하자’ 캠페인을 벌였다. 음악 크게 듣기, 화장 고치기, 신문 펼쳐서 보기 등은 ‘집에서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떠들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는 ‘펍(pub)에서 하자’, 닫히는 열차 문 사이로 다이빙하듯 들어가는 행위는 ‘해변에서 하자’ 등이다. 그래도 안 통한다면, 그땐 ‘법’이다. 대만·싱가포르 등은 대중교통 내에서 어떤 음식물이든 일단 입에 넣으면 벌금을 문다.
사진 설명
프랑스 파리 시내 대중교통을 운영하는 파리교통공사(RATP)가 제작한 지하철 캠페인 포스터. 열차 내에서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승객의 머리를 각각 멧돼지·나무늘보·거북이 등 동물의 머리로 희화화했다. 이런 ‘동물’, 한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사진 파리교통공사]
[S BOX] 성희롱·욕설 등 ‘길거리 진상’ 고발 바람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여자가 어디서 담배를 피우느냐’고 화를 냈어요.”
“어떤 중학생 남자애가 길거리에서 제 엉덩이를 슬쩍 만지고 도망갔어요.”
일상의 ‘진상’들을 고발하는 움직임은 여성운동계에서도 활발하다. 길거리에서 겪은 성희롱·욕설·성차별 발언 등 ‘길거리 괴롭힘’을 온라인에 제보하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올해 주요 사업으로 지난달부터 ‘노상의 진상을 고발하는 일상툰’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 사이트에 익명의 제보 글들이 올라오면 이중 대표적인 사례를 뽑아 올해 하반기 웹툰으로 제작해 배포할 예정이다. 방이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불쾌해도 그냥 넘기곤 하던 괴롭힘의 경험을 공유해 다 같이 공감하고 고민해 보자는 취지”라며 “매일 꾸준히 글이 올라오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얘기도 많다”고 설명했다.
‘길거리 괴롭힘’ 고발 운동은 미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여자 혼자 뉴욕 길거리를 10시간 걸었을 때 생기는 일을 몰래카메라 영상으로 공개해 화제가 된 비영리 국제단체 ‘할라백(hollaback)’은 ‘길거리 괴롭힘(street harassment)’ 퇴치 운동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할라백은 현재 32개국 92개 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는데 25번째 지부가 한국이다. 이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길거리 괴롭힘 실례들을 수집하고 자유 토론을 벌인다. 길거리 괴롭힘이 발생한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기사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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