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왜 나쁜 사랑에 그렇게 매혹되는 줄 알아?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카슨 매컬러스의 이 말이 떠오른 밤, 그의 『슬픈 카페의 노래』를 한 번 더 읽었다. 180cm가 넘는 거구의 여자가 자기 허리에도 닿지 않는 꼽추를 사랑하는 이 소설은 내게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전혀 다른 경험이라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가, ‘퍼펙트 와이프’(내가 쓴 미발표작이다)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공항에서 출장을 떠나는 아내를 배웅했던 남편이 몇 시간 후, 사랑하는 아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접하면서 하루 동안 겪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녀에게 젊은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남자의 완벽한 10년 인생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아내의 불륜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남긴다. 그것은 격렬한 질투심이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한국 소설가들의 소설’로 꼽히는 작품인데,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는 아무래도 ‘전 세계 소설가들의 소설’ 같다. 톰 울프나 스티븐 킹 같은 최고의 영미권 작가들이 뽑는 최고의 소설 1위에 거의 매년 올라가 있으니 말이다.
어째서 인간은 ‘불륜’에 이토록 매혹되는 걸까. 언젠가 광고인 박웅현이 ‘안나 카레니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한국신경정신과 협회가 주관하는 박람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어째서 광고회사가 신경박람회에 따로 부스를 만드는지 물었었다.
“안나가 불륜 끝에 자살하잖아요. 안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는 우울증의 이유들이 전부 나와요. 예를 들어, 나는 지금 결혼 7년차 아이 둘을 둔 행복한 여자예요. 근데 어느 날 청담동 파티를 갔는데 정우성이 나한테 호감을 표해요. 어쩌죠?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또 마주쳤어요, 잠깐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데 그럼 어떡할 겁니까? 정우성 같은 그 남자랑 얘기를 해봤더니 이런, 말도 너무 잘 통해, 이제 어떡하죠? 우리 생활엔 수많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있어요. 청담동, 압구정동에도 있고 미아리, 광화문, 신림동에도 있고….”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 말이다.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다가갈 수 없는 거리는 짙은 그리움을 만들고, 낯선 만큼 사랑은 깊어진다.
낯선 사랑은 깊어진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신과 이혼해 주지 않는 남편과 어린 자식들, 점점 변해가는 듯한 애인 사이에서 지독한 불행을 견디지 못한 여자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내용인 것이다. 10대에 처음 읽었던 이 소설은 내게 이솝적인 우화의 세계로, ‘인과응보’의 결정판으로 읽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책을 몇 번 더 읽는 동안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말년의 톨스토이가 안나를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그녀의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한 질문이다. 간통죄 폐지 이후 벌어진 해외 스와핑 관련 사이트 소식과 탐정업계의 지각변동, 이혼 사건에서의 재산분할 문제…. 이런 사회적 연쇄반응들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랑의 지속성’이 가장 좋은 사랑의 형식인가? 결혼이 꼭 사랑의 가장 완결된 형태인가? 사생아의 영어식 표현인 ‘love child'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며,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결혼 제도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랑 밖의 아이들‘이란 말인가? 인간은 왜 치명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륜에 매혹되는가? 나는 불륜의 알리바이를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를 그린 영화가 기억났다. 영화 속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 선물로 이 회사 최고의 불륜 컨설턴트를 소개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
몇 년 전쯤, 여의도 대형 몰의 한 극장에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봤다. 회의가 길어진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 혼자 극장에 들어갔다. 막상 영화를 보니, 안나를 유혹하는 브론스키 쪽보다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아름다운 남자의 대표주자인) 주드 로가 브론스키가 아닌 카레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드 로의 대머리와 주름살을 보는 동안 쓸쓸함과 함께 어떤 깨달음이 왔다. 30대를 통과하는 동안 ‘안나 카레니나’는 내게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친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안나가 등장하는 첫 장면이 생각났다.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와 함께 끝나는 수미일관한 풍경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면,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에서 끝날 리 없다. 우리의 사랑이나 이별은 인과관계와 하등 상관없는 ‘우연히’ 혹은 ‘불현듯’이란 말로 수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시작된 사랑은 불현듯 우리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완벽해보였던 10년의 인생이 무너지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극장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 속 안나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 다른 삶을 열렬히 갈망한다는 걸 훔쳐본 사람의 눈빛으로, 나는 극장을 나오는 여자들을 응시했다. 혹시 친구가 늦게 오는 건 회의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그때, 멀리서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 뒤로 낯선 남자 한 명이 방금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듯 지나갔다. 장시간 회의에도 반짝이던 그녀의 미소가 브론스키와 춤을 추던 안나처럼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아마도 내 불온한 상상력 덕분이었겠지만.
<기사 출처 : 중앙일보>
카슨 매컬러스의 이 말이 떠오른 밤, 그의 『슬픈 카페의 노래』를 한 번 더 읽었다. 180cm가 넘는 거구의 여자가 자기 허리에도 닿지 않는 꼽추를 사랑하는 이 소설은 내게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전혀 다른 경험이라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가, ‘퍼펙트 와이프’(내가 쓴 미발표작이다)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공항에서 출장을 떠나는 아내를 배웅했던 남편이 몇 시간 후, 사랑하는 아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접하면서 하루 동안 겪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아내의 죽음과 함께 그녀에게 젊은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남자의 완벽한 10년 인생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아내의 불륜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남긴다. 그것은 격렬한 질투심이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한국 소설가들의 소설’로 꼽히는 작품인데,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는 아무래도 ‘전 세계 소설가들의 소설’ 같다. 톰 울프나 스티븐 킹 같은 최고의 영미권 작가들이 뽑는 최고의 소설 1위에 거의 매년 올라가 있으니 말이다.
어째서 인간은 ‘불륜’에 이토록 매혹되는 걸까. 언젠가 광고인 박웅현이 ‘안나 카레니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한국신경정신과 협회가 주관하는 박람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어째서 광고회사가 신경박람회에 따로 부스를 만드는지 물었었다.
“안나가 불륜 끝에 자살하잖아요. 안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는 우울증의 이유들이 전부 나와요. 예를 들어, 나는 지금 결혼 7년차 아이 둘을 둔 행복한 여자예요. 근데 어느 날 청담동 파티를 갔는데 정우성이 나한테 호감을 표해요. 어쩌죠?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또 마주쳤어요, 잠깐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데 그럼 어떡할 겁니까? 정우성 같은 그 남자랑 얘기를 해봤더니 이런, 말도 너무 잘 통해, 이제 어떡하죠? 우리 생활엔 수많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있어요. 청담동, 압구정동에도 있고 미아리, 광화문, 신림동에도 있고….”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 말이다.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다가갈 수 없는 거리는 짙은 그리움을 만들고, 낯선 만큼 사랑은 깊어진다.
낯선 사랑은 깊어진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신과 이혼해 주지 않는 남편과 어린 자식들, 점점 변해가는 듯한 애인 사이에서 지독한 불행을 견디지 못한 여자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내용인 것이다. 10대에 처음 읽었던 이 소설은 내게 이솝적인 우화의 세계로, ‘인과응보’의 결정판으로 읽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책을 몇 번 더 읽는 동안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말년의 톨스토이가 안나를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그녀의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한 질문이다. 간통죄 폐지 이후 벌어진 해외 스와핑 관련 사이트 소식과 탐정업계의 지각변동, 이혼 사건에서의 재산분할 문제…. 이런 사회적 연쇄반응들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랑의 지속성’이 가장 좋은 사랑의 형식인가? 결혼이 꼭 사랑의 가장 완결된 형태인가? 사생아의 영어식 표현인 ‘love child'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며,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결혼 제도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랑 밖의 아이들‘이란 말인가? 인간은 왜 치명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륜에 매혹되는가? 나는 불륜의 알리바이를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를 그린 영화가 기억났다. 영화 속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 선물로 이 회사 최고의 불륜 컨설턴트를 소개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
몇 년 전쯤, 여의도 대형 몰의 한 극장에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봤다. 회의가 길어진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 혼자 극장에 들어갔다. 막상 영화를 보니, 안나를 유혹하는 브론스키 쪽보다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아름다운 남자의 대표주자인) 주드 로가 브론스키가 아닌 카레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드 로의 대머리와 주름살을 보는 동안 쓸쓸함과 함께 어떤 깨달음이 왔다. 30대를 통과하는 동안 ‘안나 카레니나’는 내게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친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안나가 등장하는 첫 장면이 생각났다.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와 함께 끝나는 수미일관한 풍경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면,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에서 끝날 리 없다. 우리의 사랑이나 이별은 인과관계와 하등 상관없는 ‘우연히’ 혹은 ‘불현듯’이란 말로 수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시작된 사랑은 불현듯 우리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완벽해보였던 10년의 인생이 무너지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극장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 속 안나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 다른 삶을 열렬히 갈망한다는 걸 훔쳐본 사람의 눈빛으로, 나는 극장을 나오는 여자들을 응시했다. 혹시 친구가 늦게 오는 건 회의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그때, 멀리서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 뒤로 낯선 남자 한 명이 방금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듯 지나갔다. 장시간 회의에도 반짝이던 그녀의 미소가 브론스키와 춤을 추던 안나처럼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아마도 내 불온한 상상력 덕분이었겠지만.
<기사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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