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 “부친과 동명이인”이라고 밝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64)의 주장을 반박하며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김무성 대표는 친일파인 동명이인과 자신의 아버지를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출생연도가 다르기 때문에 혼동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지난 26일 JTBC와의 인터뷰에서 김무성 대표 부친 감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을 조목조목 밝히며 김 대표 부친을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에 친일인사로 게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 전 회장은 1905년생으로 1937년부터 경상북도 도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김 전 회장은 도회의원으로 재직 중이던 1940년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 교육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1940년 2월 동아일보에는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 한다”는 김용주 당시 경상북도 도회의원의 발언이 실려 있다.
김무성 대표가 부친과 혼동한다고 주장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김용주는 1920년생으로 김 대표 부친보다 15살이 어리다. 그는 1941년 만주국이 항일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1943년 9월, 아사히신문 국내판에 실린 징병제 참여 독려 광고에도 김용주 당시 포항무역주식회사의 대표가 등장한다. 같은해 15살이 어린 김용주는 만주군에서 훈장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두 명의 김용주 모두 여러 사료를 통해 실제 친일 행적이 확인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문헌 자료 등을 볼 때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 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달 17일 공개했던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행적 자료를 다시 홈페이지 상단에 게재한 뒤, 김무성 대표가 공개토론을 원할 경우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무성 대표를 향해서는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은폐하고 왜곡한다고 해서 있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며 “부정의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할 수 있는 용기도 공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의 하나다”라고 밝혔다.
연구소가 홈페이지에 게재한 ‘김용주, 과연 애국자였나’라는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 전 회장은 경상북도 도회의원,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사업부장 등을 지냈다.
연구소가 열거한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행각은 문명기 등 특급 친일파와 함께 전시체제하 근로보국을 위한 국민개로운동 독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위해 신사 건립, 내선동조동근론 전파, 군용기 헌납운동 주도 등이다.
연구소는 “김용주가 명백한 친일파라는 점은 그가 박중양, 문명기, 장직상, 서병조, 정해붕 등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이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거물 친일파들과 반열을 나란히 하며 식민지배와 전쟁동원에 기여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행적은 그가 비행기 헌납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라며, 구체적 근거로 김용주가 1944년 7월9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낸 기명 광고를 제시했다.
실제로 당시 아사히신문에는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김용주의 기명 광고가 실렸다.
연구소는 “1945년 김용주가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한 경상북도 영일군에서만 100만원 상당이 모금돼 패전 직전까지 경북도민이 총 109대의 비행기를 헌납했다”면서 “1940년 1월 금값을 기준으로 당시 1만원은 현재 1억원 상당의 가치를 가졌다”고 밝혔다.
또한 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 전 회장은 1943년 10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도 했다.
김무성 대표는 27일 부친을 둘러싼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해 해명자료를 배포하고 반박에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 “모두 (부친과) 동명이인”이라고 밝힌 김무성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고 공개토론을 제안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무성 대표 측은 이날 오전 ‘고 김용주 선생의 친일행적 논란에 대한 입장’이라는 자료를 내고 일부에서 제기하는 주장을 반박했다.
김무성 대표 측은 “선친의 지난 삶을 감추고 미화하거나 애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의도와 의사가 전혀 없으며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김용주 전 회장의 매일신보 기고문을 근거로 친일행적을 주장하는 데 대해 “매일신보는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성 기고나 허위사실 기사화에 대한 기록과 증언이 다수 존재하는 만큼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평가내용을 담고 있는 신문기사 등을 근거자료로 제시했다. 김무성 대표 측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동아·조선일보에는 김용주 전 회장이 민족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으로 일제에 검거되고 조선인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야학을 개설해 한글을 가르쳤다고 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민족문제연구소가 10년 동안 300만여건을 검토했다던 친일인명사전에는 김무성 대표의 부친을 등재하지 않았다가 김 대표가 여당 대표가 되고 난 뒤 이제와서 ‘향후에 등재하겠다’는 식의 편향성과 공정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기사 출처 : 경향신문>
김무성 대표는 친일파인 동명이인과 자신의 아버지를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출생연도가 다르기 때문에 혼동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지난 26일 JTBC와의 인터뷰에서 김무성 대표 부친 감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을 조목조목 밝히며 김 대표 부친을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에 친일인사로 게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 전 회장은 1905년생으로 1937년부터 경상북도 도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김 전 회장은 도회의원으로 재직 중이던 1940년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 교육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1940년 2월 동아일보에는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 한다”는 김용주 당시 경상북도 도회의원의 발언이 실려 있다.
김무성 대표가 부친과 혼동한다고 주장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김용주는 1920년생으로 김 대표 부친보다 15살이 어리다. 그는 1941년 만주국이 항일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1943년 9월, 아사히신문 국내판에 실린 징병제 참여 독려 광고에도 김용주 당시 포항무역주식회사의 대표가 등장한다. 같은해 15살이 어린 김용주는 만주군에서 훈장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두 명의 김용주 모두 여러 사료를 통해 실제 친일 행적이 확인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문헌 자료 등을 볼 때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 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달 17일 공개했던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행적 자료를 다시 홈페이지 상단에 게재한 뒤, 김무성 대표가 공개토론을 원할 경우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무성 대표를 향해서는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은폐하고 왜곡한다고 해서 있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며 “부정의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할 수 있는 용기도 공인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의 하나다”라고 밝혔다.
연구소가 홈페이지에 게재한 ‘김용주, 과연 애국자였나’라는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 전 회장은 경상북도 도회의원,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사업부장 등을 지냈다.
연구소가 열거한 김용주 전 회장의 친일행각은 문명기 등 특급 친일파와 함께 전시체제하 근로보국을 위한 국민개로운동 독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위해 신사 건립, 내선동조동근론 전파, 군용기 헌납운동 주도 등이다.
연구소는 “김용주가 명백한 친일파라는 점은 그가 박중양, 문명기, 장직상, 서병조, 정해붕 등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이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거물 친일파들과 반열을 나란히 하며 식민지배와 전쟁동원에 기여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행적은 그가 비행기 헌납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라며, 구체적 근거로 김용주가 1944년 7월9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낸 기명 광고를 제시했다.
실제로 당시 아사히신문에는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김용주의 기명 광고가 실렸다.
연구소는 “1945년 김용주가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한 경상북도 영일군에서만 100만원 상당이 모금돼 패전 직전까지 경북도민이 총 109대의 비행기를 헌납했다”면서 “1940년 1월 금값을 기준으로 당시 1만원은 현재 1억원 상당의 가치를 가졌다”고 밝혔다.
또한 연구소에 따르면 김용주 전 회장은 1943년 10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도 했다.
김무성 대표는 27일 부친을 둘러싼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해 해명자료를 배포하고 반박에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 “모두 (부친과) 동명이인”이라고 밝힌 김무성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고 공개토론을 제안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무성 대표 측은 이날 오전 ‘고 김용주 선생의 친일행적 논란에 대한 입장’이라는 자료를 내고 일부에서 제기하는 주장을 반박했다.
김무성 대표 측은 “선친의 지난 삶을 감추고 미화하거나 애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의도와 의사가 전혀 없으며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김용주 전 회장의 매일신보 기고문을 근거로 친일행적을 주장하는 데 대해 “매일신보는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성 기고나 허위사실 기사화에 대한 기록과 증언이 다수 존재하는 만큼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평가내용을 담고 있는 신문기사 등을 근거자료로 제시했다. 김무성 대표 측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동아·조선일보에는 김용주 전 회장이 민족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으로 일제에 검거되고 조선인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야학을 개설해 한글을 가르쳤다고 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민족문제연구소가 10년 동안 300만여건을 검토했다던 친일인명사전에는 김무성 대표의 부친을 등재하지 않았다가 김 대표가 여당 대표가 되고 난 뒤 이제와서 ‘향후에 등재하겠다’는 식의 편향성과 공정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기사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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