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이 모아온 폐지를 손수레에 싣고 고물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 |
·퇴직 이후 소득수준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시기, 이른바 ‘소득절벽’ 위에서 50대가 떨고 있다. 퇴직과 연금수령시기가 길게는 15년까지 차이나고, 자녀들의 결혼 및 분가 시기가 맞물리면서 경제적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진다. 재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이라 빈곤 위험성에 노출된다. 자구책이라고 해봐야 싼 집으로 이사를 하거나 덜 먹고 덜 쓰는 등 주거조건을 악화시키는 게 고작이다. 은퇴자들의 크레바스, 어떻게 넘어야 하나.
“우리 나이대 사람들 보면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머리 염색 안 해. 어디라도 일해야 되는 사람들은 젊어 보이려고 꼭 염색하지.”대구에서 어린이집 차량 운전기사로 일하는 김학용씨(59)는 외모를 단장하는 데서도 일자리를 구하려는 고령층의 경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물론 주민증 까면 진짜 나이야 다 나오지만 겉으로 보이는 나이도 무시 못한다. 예전 같지 않아서 알음알음으로 일자리 구하기가 쉬운 게 아니라, 면접까지 보고 뽑는 데가 많아졌는데, 이왕이면 젊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 뽑을 것 아닌가.” 퇴직 이후로도 가능한 한 오래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고령층 인구가 늘면서 청년층의 ‘면접 성형’ 못지않은 고령층의 외모 꾸미기 전략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씨에게 ‘정년까지 다닌 직장’이란 의미로 이전 직장이 어딘지를 물었다. 김씨는 오랜 기간 다닌 전 직장 대신 퇴직 이후, 현재의 어린이집 직전 일한 직장을 말했다. 50세에 퇴직 후 10년 가까이 너댓 곳을 옮겨다닌 김씨에게 ‘평생 직장’과 같은 의미로 남아 있는 예전 직장의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자동차부품 납품업체 다니다 관련 협회에 자리가 생겨 옮겼고, 그마저도 오래 못다니고 나오고 나서는 뭐라도 일만 있으면 했다. 당연히 비정규직이고 월급은 예전의 반도 안 되지. 가릴 처지가 안 되니까.” 김씨는 부인이 부동산에서 일하며 벌어오는 돈을 합해 생활비에 충당하지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될 때 수중에 모아놓은 돈이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더 벌고 모으기보다는 더 적게 쓰는 데 익숙해지는 게 빠르다.”
퇴직 이후 소득수준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시기, 이른바 ‘소득절벽’을 처음 겪기 시작하는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그에 따라 소득절벽에 적응해야 하는 기간은 길어진다. 반면 이른 퇴직으로 소득수준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과 달리 소비수준은 쉽게 낮추기 어렵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가구별 지출규모 역시 낮아지긴 하지만 그 폭은 소득규모에 비해 완만하다. 한국에서 소득절벽과 한 쌍으로 나타나는 것은 소득불평등 현상이다. 소득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높아지는 양상을 나타냈다. 그 결과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절벽’ 폭 넓어지고 시기도 길어져
2007년만 하더라도 40대 가구소득 대비 104%로 전체 세대 중에서 가장 높은 소득수준을 보였던 50대의 가구소득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2013년 1분기에 이르면 40대 가구소득의 94% 수준으로 급락한다. 퇴직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가구소득 수준이 정점을 찍고 떨어지기 시작하는 연령대도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다. 50대를 지나 60대에 이르면 소득수준의 감소폭은 더욱 급격하게 커진다. 2013년 1분기 60대 이상의 가구소득은 40대 가구소득의 53%에 불과했다.이 기간 동안 소득절벽 현상은 고령층의 소득불평등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0에서 1까지의 수치로 나타나는 지니계수는 1에 가까워질수록 불평등이 심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2007년 0.460이었던 은퇴연령 인구의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12년 0.531로 상승했다. 전체 세대의 지니계수가 0.340에서 0.338로 소폭 줄어든 것과 비교되는 수치다. 30대에 비해 40대의 소득불평등 정도는 11%, 50대는 31%, 그리고 60대는 52% 높게 나타났다. 소득절벽의 폭이 커지고 연령대가 낮아지는 양상과 동일하게 고령층의 소득불평등은 점차 심해진 것이다.
급격하게 낮아지는 소득수준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은 이전보다 싼 집으로 이사하는 일이다. 식음료비와 광열비 같은 필수 지출항목을 줄이기 어려운 고령세대의 특성상 주거조건을 악화시키는 것 외에는 소득절벽에 대처할 방도가 없는 게 현실이다. 방모씨(68)는 월세방 계약이 끝나는 2년마다 걱정에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수입이 없이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어 계약 때마다 오른 방값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누라가 신장이 안 좋아서 투석을 해야 하는데, 그 병원비는 어떻게 더 줄일 수 없이 박혀 있는 지출이다. 지난 10년 동안 계속해서 줄여올 수 있었던 건 방 크기밖에 없었다.” 그나마 외동아들이 5년 전 직장을 잡은 뒤로 따로 방을 얻어 나가고 가끔씩 용돈을 부쳐줘서 형편은 좀 나아졌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력이 달리는 건강상의 문제는 점차 수입이 줄어드는 경제적인 문제로 뒤바뀌고 있다. “아시바(비계) 쌓다가 내려오면서 삐끗한 뒤로 발목 때문에 하던 일을 못하니까 들어오는 돈이 들쑥날쑥하게 됐지. 일용직이라 지역(건강)보험 가입하면 보험료도 비싼데, 막상 병원비 생각하면 갈 수가 없어.”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가운데 지나가던 한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를 지켜보고 있다. /정지윤기자 |
국제 노인인권단체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이 91개국의 노인복지 수준을 조사해 발표한 ‘글로벌 에이지와치 지수 2013’에서도 한국 고령층의 소득 안정성 지수는 끝에서 두 번째인 90위를 기록했다. 연금과 노인 빈곤율 등을 반영한 이 지수에서 한국은 100점 만점에 8.7점을 받아 2.1점을 기록한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최하위였다. 건강상태(8위), 교육·고용(19위) 등 다른 항목의 지수가 양호한 데 비해 극도로 낮은 소득 안정성 때문에 전체 순위에서도 39.9점을 받아 67위에 그쳤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65위·41.0)과 우크라이나(66위·40.2)보다 낮고 도미니카공화국(68위·39.3)과 가나(69위·39.2)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OECD 국가 가운데서도 한국은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2012년 기준 노인 빈곤율은 49.3%로 OECD 평균인 12.8%에 비해 4배 가까이 높았다. 2006년 46%에서 지속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노인 인구의 평균소득이 한국보다 낮았던 멕시코, 터키, 포르투갈 등과 비교할 때에도 상대빈곤율이 높다는 사실은 한국 고령층의 소득분포가 매우 불균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노인 자살률을 기록한 것도 고령층의 경제적 상황과 무관치 않았다. 한국은 2011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10만명당 79.7명이 자살했다. 이 연령대를 대상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를 묻는 설문에서는 30.8%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답했다.
고령층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는 추세에는 가족환경의 변화도 한몫 했다. 지난 20년간 자녀와 동거하는 대신 노인 혼자 살거나 노인 부부만 사는 가구가 크게 늘었다. 통계개발원이 펴낸 <한국의 사회동향 2013>에 따르면 전체 노인가구 중 1990년 각각 10.6%, 12.7%에 불과했던 노인 1인가구와 노인 부부가구의 비율은 2010년엔 34.3%, 33.6%로 늘어 자녀동거가구를 넘어섰다. 반면 노부모를 자녀가 부양하는 비율은 감소했다. 2012년 자녀로부터 부양을 받지 않는 노부모의 비율은 48.5%로 10년 전인 2002년에 비해 4.2%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층이 자녀세대와의 사회적·경제적 연결고리가 줄어들면서 그만큼 더 부담을 직접 짊어지는 추세인 것이다.
은퇴-연금수령시기 격차 해소해야
보통 자녀가 결혼하면서 독립된 가구를 꾸리는 경우가 많은 한국 사회에서 노후의 소득 불안정을 부르는 계기들이 특정 시기에 집중된 점이 소득절벽 현상을 악화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부모세대의 퇴직과 자녀세대의 결혼 및 분가 시기가 엇비슷한 시기에 맞물리는 것이다. 지난해 막내딸의 결혼과 함께 살던 집을 옮긴 강윤익씨(60)의 경우도 줄어든 소득수준으로는 큰 규모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자산을 처분한 예다. 두 명의 자녀를 연달아 결혼시키는 과정에서 이전 직장 퇴직금의 일부와 좁은 집으로 옮긴 집값 차액이 들어갔다. “같은 연배 친지를 만나는 자리에서 꼭 나오는 얘깃거리 중 하나가 자식 결혼문제다. 사실 결혼 준비야 (당사자가) 알아서 할 문제고 다들 걱정하는 건 돈 때문이지. 일을 안 하거나, 해도 벌이가 시원찮은데 들어갈 돈은 제일 많을 때니까.”
중견기업에서 부장까지 지낸 강씨는 자녀의 대학등록금은 물론이고 결혼 때 들어올 축의금까지 생각하면 최대한 퇴직을 늦추는 것이 50대 직장인들의 희망사항이라고 말했다. “첫째 결혼한 지 불과 1년도 안 돼서 둘째가 결혼했는데, 그 사이 퇴직을 하다보니 결혼식 때 들어오는 축의금 액수가 꽤 차이가 나더라. 퇴직하고 작은 회사 차려도 이름만 사장이지, 주변에서 받는 대우가 전보다 못하게 된 걸 둘째 결혼식에서 확 느꼈다.” 소득절벽을 경험하는 부분은 퇴직 전후의 월급 차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사회 전반적으로 퇴직연령은 점차 낮아져 왔다. 지난해 4월 퇴직정년을 60세까지 보장하기로 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까지 실제 평균 퇴직연령은 53세에 불과했다. 평균 정년이 57.4세로 보장된 데 비해서도 훨씬 빠른 것이다. 서울시복지재단이 55세 이상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55~59세 연령대의 평균 퇴직연령은 48.5세까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보다 윗세대인 60~64세와 65세 이상 연령대의 평균 퇴직연령이 54.1세, 57.6세로 나타난 것에 비하면 퇴직시기가 빨라지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퇴직과 국민연금 수령시기가 길게는 15년까지 차이 나는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소득절벽으로 인한 충격을 더는 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홍영 성균관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국민연금 도입 초기에는 55세 정년이 일반적이었지만 점차 연금수급 연령이 늦춰져 현재 청년층은 65세부터 연금을 받게 된다”며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해 50대와 60대가 비정규직이나 창업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퇴직 후 재취업을 해도 고용이 불안하고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라 연금 수급연령에 부합하도록 단계적으로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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