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사회학은 스마트폰에 잡힌 우리 사회의 보편화된 인식이나 현상을 다루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호텔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습니까?"
출입문 근처에 서 있는 안내원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아, 리무진 버스 말씀이세요, 고객님? 공항 가는 리무진은 15분마다 한 대씩 있으세요, 고객님. 물론 요 앞에서 탑승하실 수 있으시구요, 고객님."
말끝마다 '고객님'을 친절하게 붙이는 그 아가씨에게 목례를 하고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뒤 그 아가씨가 밝게 웃으면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리무진 버스가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고객님. 지금 가서 탑승하면 되세요."
라이터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알바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카운터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라이터 하나 주세요."
그 말을 듣고 알바생은 진열대에서 빨간색 라이터 하나를 집어들더니 바코드를 찍었다.
"여기 있으세요."
"얼마지요?"
"오백 원이세요."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서 건네주다 보니 말끝마다 "~세요"라고 하는 그 친구에게 슬그머니 장난이 걸고 싶어진다. 마침 편의점 안에는 다른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말고, 저 노란색도 한 번 줘보세요."
빨간색과 노란색 라이터를 양 손에 하나씩 나눠 쥐고 알바생에게 또 물었다.
"어떤 게 더 예뻐요?"
"글쎄요. 저는 이 노란색이 더 예쁘세요."
"이거는요?"
"빨간색은 노란색보다 좀 별로세요…, 아니, 별로예요."
이 땅의 '을'들이 꼬박꼬박 붙이는 '~세요'
우리말에서 존대표현을 만드는 '~세~'나 '~시~'는 사물에는 쓸 수가 없다. 사람에게만 쓰는 게 옳다. '저 분이 제 할아버지세요'는 옳지만 '이게 제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세요'는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다. 알바생이 끝에 가서 '별로세요'를 '별로예요'로 스스로 바로잡은 것처럼 사실은 그게 틀린 말이라는 걸 호텔 안내원 아가씨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없던 이런 말법이 생겨난 까닭은 무엇일까. 요즘 젊은 아이들이 우리말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일까. 얼핏 그런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회적 관점에서 원인을 찾으면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청년실업의 증가', '갑을관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셋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부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 보니 사회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값싼 외부 노동력의 유입에 따라 물가상승률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저임금 때문에 청년실업은 증가하고, 고용불안 심리의 작용으로 대부분의 '을'은 '갑'의 부당한 횡포에 맞설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잘못된 '~세요'는 한마디로 '을'의 용어지 '갑'이 쓰는 말이 아니다. 어쩌다 말 한마디라도 삐끗했다가는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김수희의 노래 <애모>의 가사처럼 '갑'인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을'이 말끝마다 꼬박꼬박 붙이는 '~세요'는, 좀 안쓰럽게 들린다.
어느 날 여론조사 기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딱히 바쁜 일도 없고 해서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맨 마지막에 조사대상자의 연령대를 묻는 질문을 했다. 50대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20대 중반쯤으로 여겨지는 아가씨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머,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동안이시네요!"
<기사 출처 ㅣ 오마이뉴스>
▲ 한 카페의 안내 문구 |
ⓒ 송준호 |
"호텔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습니까?"
출입문 근처에 서 있는 안내원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아, 리무진 버스 말씀이세요, 고객님? 공항 가는 리무진은 15분마다 한 대씩 있으세요, 고객님. 물론 요 앞에서 탑승하실 수 있으시구요, 고객님."
말끝마다 '고객님'을 친절하게 붙이는 그 아가씨에게 목례를 하고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뒤 그 아가씨가 밝게 웃으면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리무진 버스가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고객님. 지금 가서 탑승하면 되세요."
라이터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알바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카운터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라이터 하나 주세요."
그 말을 듣고 알바생은 진열대에서 빨간색 라이터 하나를 집어들더니 바코드를 찍었다.
"여기 있으세요."
"얼마지요?"
"오백 원이세요."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서 건네주다 보니 말끝마다 "~세요"라고 하는 그 친구에게 슬그머니 장난이 걸고 싶어진다. 마침 편의점 안에는 다른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말고, 저 노란색도 한 번 줘보세요."
빨간색과 노란색 라이터를 양 손에 하나씩 나눠 쥐고 알바생에게 또 물었다.
"어떤 게 더 예뻐요?"
"글쎄요. 저는 이 노란색이 더 예쁘세요."
"이거는요?"
"빨간색은 노란색보다 좀 별로세요…, 아니, 별로예요."
이 땅의 '을'들이 꼬박꼬박 붙이는 '~세요'
우리말에서 존대표현을 만드는 '~세~'나 '~시~'는 사물에는 쓸 수가 없다. 사람에게만 쓰는 게 옳다. '저 분이 제 할아버지세요'는 옳지만 '이게 제 아버지가 쓰시던 컴퓨터세요'는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다. 알바생이 끝에 가서 '별로세요'를 '별로예요'로 스스로 바로잡은 것처럼 사실은 그게 틀린 말이라는 걸 호텔 안내원 아가씨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없던 이런 말법이 생겨난 까닭은 무엇일까. 요즘 젊은 아이들이 우리말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일까. 얼핏 그런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회적 관점에서 원인을 찾으면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청년실업의 증가', '갑을관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셋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부의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 보니 사회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값싼 외부 노동력의 유입에 따라 물가상승률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저임금 때문에 청년실업은 증가하고, 고용불안 심리의 작용으로 대부분의 '을'은 '갑'의 부당한 횡포에 맞설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잘못된 '~세요'는 한마디로 '을'의 용어지 '갑'이 쓰는 말이 아니다. 어쩌다 말 한마디라도 삐끗했다가는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김수희의 노래 <애모>의 가사처럼 '갑'인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을'이 말끝마다 꼬박꼬박 붙이는 '~세요'는, 좀 안쓰럽게 들린다.
어느 날 여론조사 기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딱히 바쁜 일도 없고 해서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맨 마지막에 조사대상자의 연령대를 묻는 질문을 했다. 50대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20대 중반쯤으로 여겨지는 아가씨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머,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동안이시네요!"
<기사 출처 ㅣ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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