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 오경수 |
▶ 털 난 대부분의 동물은 봄과 가을에 털갈이를 하며 털이 다 빠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카락은 3~5년을 자라고 나야 저절로 털갈이를 하지요. 60㎝까지도 자랍니다. 요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머리카락이 귀한 분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탈모 때문이네요. 머리카락과 나의 인생, 둘의 관계는 생각보다 밀접합니다. 20년 전 수북했던 머리카락과 슬프게 이별한 ‘탈모인’이자 광고인 오경수씨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자 그의 몸에서 물결이 넘실거렸다. 매혹의 설렘을 담은 수만개의 하늘거림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전한다. 길고 짧음, 구불거림의 폭, 색깔, 탄력성의 정도, 숱이 많고 적음. 머리카락은 또 하나의 얼굴이다. 개성을 표현하는 어떤 풍경이다. 그래서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머리를 가꾼다는 것은 자신의 뒷모습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시시대에 인간의 머리카락은 뇌를 더위와 추위로부터 막아주고, 그것의 손상을 방지하고 충격을 흡수했다. 모자나 헬멧, 우산을 쓴 이후로는 머리를 보호하는 기능은 퇴색했다. 한때는 신분, 계급, 성별, 혼인 여부, 종족 등을 구분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역사가 흐르면서 이제는 그런 기능은 없다. 현대사회의 머리카락은 디자인 대상, 성적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소중한 머리카락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예상보다 빨리 나의 몸을 떠난다면? 탈모의 운명, 그것은 두려움을 내포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약자의 마음을 읽는 대표 코드다.
삼손에게 공감하고 라푼젤을 동경하는 그들
인생에서 머리카락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의 대표로 그가 떠올랐다. 머리카락을 잃고 힘을 잃어버린 삼손에게 깊이 공감하고, 그림형제가 쓴 동화 <라푼젤>에서 라푼젤의 탐스러운 머릿결을 동경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광고대행사 덴츠코리아의 수석국장이자 연기자인 오경수(47)씨를 6일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만났다. 오씨는 보일러, 제과, 가발 등 광고 70~80편에 출연하고 드라마 <달자의 봄> <장난스런 키스> <천일의 약속> <샐러리맨 초한지> 등에서 연기했다.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다. 대홍기획, 제일기획을 거쳐 지금 회사까지 20년 동안 여러 광고를 만들어온 ‘스타 광고인’이기도 하다. 만든 광고로는 거꾸로 타는 보일러, 전인권과 인순이도 달았다는 위성방송, 쇼를 하라던 통신사, 지금은 연인이 된 배우 김태희와 가수 비가 처음 만났다는 소셜코머스 광고, 카메라를 찍은 사진에서 카메라가 살아 움직이고 글라스 연주를 하는 카메라 광고 등이 있다.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다. ‘탈모인’을 만나면 머리카락이 비어 있는 공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밝고 너른 이마 아래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더 환하게 보이기까지 2시간. 인터뷰 내내 유쾌한 그의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집안에 대머리가 저밖에 없어요. 아버지, 할아버지도 나이가 드신 뒤 머리숱이 적어지긴 했지만 틀은 유지가 됐어요. 어머니도 외가도 탈모는 없어요. 그런데 24살, 막 군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돼 머리가 슬슬 빠지더라고요. 이러다 대머리가 될 수 있겠다고 마음이 기운 건 그로부터 몇년 뒤예요. 사회생활 시작할 때니까 딱 20년 전이네요. 광고하는 직업이 신경을 많이 쓰잖아요. 그런 데서 가속도가 붙지 않았나…. 아이디어 하나와 머리카락 하나를 바꾸지 않았나 생각하죠. 하하하.”
의학계에서는 전국의 탈모 인구를 800만~1000만명으로 추정한다. 이 중 350만명 이상이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데, 그쯤 되면 탈모는 ‘국민병’이다. 탈모의 원인은 남성호르몬과 관련이 있다. 두피에는 남성호르몬을 변화시키는 5-알파-환원효소(5-Α-reductase)가 있다. 이 효소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분해해 다이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을 만드는데, 다이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된 모낭에선 모발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가늘어지다 빨리 빠진다. 뒷머리와 옆머리보다 정수리와 앞머리가 많이 빠지는 것은 모낭이 있는 위치에 따라 이 호르몬에 대한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강력한 탈모 원인은 탈모 유전인자의 강도다. 남성호르몬의 감수성 차이다. 탈모라 하면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를 떠올리기 쉽다. 유전적 소인이 있더라도 남성호르몬이 부족한 여자들은 탈모가 잘 발생하지 않는다. 또 여성은 아로마타제라는, 탈모를 예방하는 효소가 주로 앞머리의 모발선 근처에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남성처럼 완전한 대머리는 별로 없다. 콩팥 옆에 있는 부신이라는 내분비기관과 난소에서 소량의 남성호르몬이 나오기 때문에 여성형 탈모(정수리에 숱이 없는 경우)가 올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스트레스, 과음과 흡연, 환경오염과 공해, 중금속과 유기용제, 영양 결핍 등의 이유로도 탈모는 발생할 수 있다.
전국에 있는 탈모인은
800만~1000만명으로 추정
이쯤 되면 가히 ‘국민병’이다
“제대 뒤 머리가 빠지더라고요
집안에 대머리는 저밖에 없어요”
연애·결혼하고픈 젊은이들에게
머리카락과의 이별은 청천벽력
우울하고 용기없고 불안해진다
“평소 나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며
외모에 대한 경계심 풀게 하세요”
유전도 아니었는데 신의 선택으로 탈모를 겪게 된 오씨의 젊은 시절은 소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감의 하락을 자주 느꼈다. 2012년 9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발표에 따르면, 5년간 ‘탈모증’ 진료인원 약 90만명의 46%가량인 40여만명이 20·30대였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젊은 시절에 찾아온 머리카락과의 이별은 불안한 미래를 부채질한다. 오씨 역시 그 굴레의 세월을 뱅뱅 돌았다. 두피 마사지가 좋다 해서 머리에 피가 날 때까지도 때려봤고, 털이 많으니 발모에 좋다며 송충이를 먹으라는 권유를 받는 시간을 지났다.
“머리카락 하나 때문에 우울한 편이었어요. 머리가 없으면 용기를 못 내요. 스스로 멀어지는 길을 택하죠. 젊은 시절 내내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도 내 모습이란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더라고요. 자꾸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서 다른 걸 더 발견해봐야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 매력을 발산해볼까 고민하면서 오히려 나의 외모를 더 가꾸게 됐어요.”
머리카락이 은유하는 힘은 세다.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아름다운 매력을 상징한다. 남성의 머리카락은 지도력, 힘, 강인함을 가리킨다. 그래서 고대 전사는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는 듯한 장식이 들어간 투구를 쓰고 전장으로 나섰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패자의 머리털을 잘라 버려 승리를 만끽했다. 중세 초기 게르만족이 지배한 사회에서는 주권과 자유를 가진 이들은 긴 머리를 했다. 반대로 짧은 머리는 구속과 굴종을 의미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는 간통을 한 여성한테 머리를 삭발하도록 해 모욕감을 주었다. 요즘도 탈모인들은 사회의 차별이 약간은 남아 있다고 느낀다. 인종, 국가, 문화마다 조금 다를 뿐 대부분 머리카락이 없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한다.
오씨는 부족한 머리카락 대신 개성을 창조했다. 방송인 홍석천이 삭발을 해버린 대신 운동으로 몸을 만들었듯이, 연기자 김광규가 노총각 이미지를 구축하며 연약한 이미지로 여성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듯이, 오씨는 턱수염을 동그랗게 기르고 안경도 동그랗게 특징 있는 걸로 골라 썼다. 그만의 캐릭터가 생겼다. 광고를 만들고 출연도 했다. 12년 동안 보일러 광고 모델을 하며 ‘호감 있는’ 캐릭터로 거듭났다. 인지도가 올라가자 티브이 드라마에까지 진출했다. 끼가 특별해서지만 대머리 연기자가 귀한 이유도 있다.
오씨한테도 사회에서 대머리에게 부여한 이미지가 주로 적용됐다.
“처음에 제일 많이 들어오는 게 노총각 역이었어요. 여자 주인공이 맞선 보는 상황. 한번 갔다 왔거나 아직 결혼 못 했는데 대머리인 노총각. 김광규씨한테 주로 갔던 역인데 광규가 출연료가 올라가니까 내가…. 하하하. 머리 때문인지 처음 봤을 때부터 광규랑 친해졌어요.”
대머리 노총각 외에도 20대 주인공을 아들로 둔 50대 아빠(<장난스런 키스>), 나이 든 회사 상사(<천일의 약속> <샐러리맨 초한지>, 영화 <완벽한 파트너> <나의 PS 파트너>) 등 실제 나이보다 들어 보이는 캐릭터 의뢰가 많다. 구두쇠와 졸부, 도둑, 성욕이 남다른 남성 등 대머리 이미지 캐스팅이 많다. 사회에서 대머리에 대한 차별이 여전함을 유추할 수 있다. 오씨가 말했다.
“솔직히 대머리 연기자가 멜로연기 하는 건 못 봤잖아요. 대부분 대머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배경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멜로를 하면 코미디가 되어버리는. 방송계가 대머리 멜로연기를 늘려줬으면 좋겠어요. 나 정말 잘할 수 있거든요.”
광고 영역뿐 아니라 연기로도 인정받고 싶은 그는 “머리카락은 배우에게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기억하게 하는 요소인데, 머리카락이 없으면 배역에 한계가 있다”며 배우 이덕화씨를 포함한 여러 탈모 연예인들이 가발 착용을 권유한다고 설명했다.
머리카락은 신의 영역이다
중년 이후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빠지는 건 탈모라고 하지 않는다. 노화일 뿐이다. 젊어서부터 탈모가 왔다고 해도 중년이 되면 탈모 스트레스가 더는 늘지 않는다. 탈모가 문제인 이들은 따로 있다. 모두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쁜 삭막한 세상에서 탈모를 숨기며 살고 싶은 20·30대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고민은 대체로 하나, 연애와 결혼이다. 첫인상 판정에서 탈락할 것이란 두려움이 많은 예비 탈모인에게 오씨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자신의 과거를 사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전략은 따뜻했다. 경험에서 이어진 냉철한 분석이었다.
“팁을 하나 드리자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 맞선 보면 안 돼요. 솔직히 우리가 맞선에서 잘된다면 그건 정말 하늘이 맺어주시는 거죠. 그런 모험보다는 평소 나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며 나의 외모에 대해 경계심을 풀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대머리일수록 교회든 봉사단체든 나가세요. 갑작스럽게 애인이 될 수 있는 관계 말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서로가 흡수되는 만남의 장을 만드는 게 좋다는 말이에요. 직장 동료도 좋고요. 이거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외모 때문에 날 택하지 않는 여성이라면 결혼할 필요도 없어요. 사랑하면 날 사랑하는 거잖아요. 내 머리카락을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오씨는 “다행히 머리를 안 보고 사람을 크게 봐준” 부인과 교회에서 만나 32살에 결혼했다. 결혼식 사진은 오래 남는 거라는 말에 가발을 쓰고 찍었다. 지금은 그 결정을 후회한다. 평소의 내가 아닌 머리숱 많은 한 남자가 사진 속에 있음이 “좀 이상하다.” 지금 결혼식 사진을 보며 ‘그때 그만큼 예민했구나’라고 웃어넘길 수 있어 다행이다.
“세상에 양면성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머리카락이 많을 때는 그다지 특징이 없었어요. 머리숱이 많았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겠죠. 광고를 했다 해도 연기까지 이어지지 않았겠죠. 우리가 잊고 사는 게 있는데 대머리는 사실 절대 장애가 아니거든요. 머리카락이 없는 분들도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반전의 매력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물론 흑채는 너무 좋은 발명품이고, 만약 탈모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의학이 진보한다면 그건 어느 난치병 치료제의 개발 이상일 거지만요. 하하하.”
“오경수에게 머리카락은 어떤 의미인가요?”
“한이자 운명 같구나 생각해요. 이게 나쁜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좋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주목받을 운명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건… 신의 영역 같아요. 신이 아름다운 인간을 질투한 건 아닐까, 오만함에 겸손을 배우라며 머리카락 하나 뺏어간 건 아닐까요?”
“자연에는 여러 형태의 구가 있을 필요가 있다. 위에는 천체가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에는 사람의 머리가 둥글게 만들어져 영혼들이 살게 되어 있으며, 거대한 원 안에 미세한 세계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 완전한 형태와는 거리가 먼, 털로 뒤덮인 머리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단순한 영혼들에게는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현명한 영혼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덕성에 따라 별이나 민머리에 들어가 산다. … 대머리는 그래서 하늘의 둥근 천장처럼 보이는 것이며, 천구에 대한 찬사는 대머리에 대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시네시우스 <대머리 찬가> 부분)
영국 프리미어리거 웨인 루니나 유명 연예인들처럼 모발 이식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제품을 사용해 벗어지는 시간을 유예한다 해도 “올 건 온다.” 머리카락이 또 하나의 얼굴이라면, 머리카락이 없는 이들의 얼굴은 어떨까? “콤플렉스가 아닌 건 아니지만 나름 개성 있는 얼굴”이라고 오씨는 강조했다.
<기사 출처 : 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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