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강, 갠지스
한국 식당을 찾아 나서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잠에서 깼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선풍기 팬이 부지런히 바람을 내보내고 있지만 그마저 후덥지근했다. 얼마나 잤을까. 손전화기 시계를 봤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서너 시간 잠을 잤다. 온몸이 끈적거린다.
인도에 와서 딱 한 번 샤워한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단벌로 가지고 온 옷을 열흘 내내 입고 다녔다. 흰옷이 때 구정물에 절어 거무스름해졌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3층인데 2층에 공동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다.
30도가 넘는 한낮의 태양열에 샤워 꼭지에서 나오는 물조차 미지근해져 있다. 미처 비누를 챙기지 못했다. 가볍게 샤워하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라나시로 출발하기 전에 델리에서 산 누리끼리한 줄무늬의 인도풍 옷이다. 샤워를 하고 나니 허리가 푹 꺾일 정도로 허기가 몰려온다.
인도에 와서 열흘 내내 젊은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분에 넘치도록 잘 먹고 다녔다. 하루에 한두 끼로 보냈던 한국보다 더 잘 먹었다.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산나물을 캐서 무쳐 먹거나 한두 가지 반찬으로 해결했기에 생활비도 아주 적게 들었다. 한 달에 50만 원 정도의 비용을 예상하고 인도에 왔다. 그 돈으로 이동하고 먹고 자는 일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을 최소로 줄여야 한다. 바라나시에서 가장 싼 숙소를 잡았기에 일단 숙소 잡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숙소에서 심부름을 하는 젊은 사내에게 물었다.
"바라나시에 한국 식당이 여럿 있다는데 아세요?"
"이 근처에 맹구 식당 있습니다."
"맹구? 아, 거기 좀 알려 주세요."
'맹구'라는 말이 반가웠다. 한국 식당은 분명 인도 식당보다 비쌀 것이었다. 끼니 해결보다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 바라나시에서 가장 가 보고 싶었던 화장터의 위치를 자세히 알고 싶었다. 숙소 계단을 내려서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헤이! 친구! 나 좀 봐요."
분명 나를 향해 부르는 소리다. 긴 수염은 없지만 인도 요기들처럼 윗옷을 벗고 목에 염주를 주렁주렁 매단 사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손짓한다.
"무슨 일이죠?"
"잠깐 들어와 볼래요?"
내가 멈칫거리자 사내가 내 옷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당신 옷 어디서 샀나요? 여기서 싸게 팔고 있어요. 구경해 보시죠."
바라나시 옷 가게 주인과 친구가 되다
나는 옷에 대한 관심보다는 요기(yogi, 요가 수행자)처럼 보이는 그가 더 궁금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열댓 벌의 옷이 진열된 그의 작은 옷 가게는 어림잡아 두 평 반 남짓했다. 옷 가게라기보다는 그만의 소박한 신전에 가까웠다. 흙으로 꾸며진 작은 공간의 중앙에는 그가 모시고 있는 신이 낡고 조악한 그림으로 앉아 있었다. 삼지창을 들고 있는 것으로 짐작건대 인도의 3대 신 중 하나인 시바 신인 듯싶었다.
그는 이 작고 비좁은 공간에서 시시때때로 명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덥수룩한 수염의 내 모습이 수행자처럼 보였는지 그가 묻는다.
"한국의 요기입니까?"
"명상에 관심이 많긴 한데 수행자는 아닙니다. 그냥 여행자입니다."
그는 내가 여느 외국인 여행자들처럼 영어를 잘하는 줄 알고 길게 말한다.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 요점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라나시의 힌두 사원에 기거하고 있는 큰 스승을 모시는 힌두 수행자다. 옷 장사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다. 내가 주로 하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는 일, 명상이다."
그는 짜이를 내주면서 델리에서 파는 가격보다 50루피 싸게 팔 테니까 옷을 살 친구들이 있으면 데려오라고 한다. 옷을 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또 옷을 사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 때나 친구처럼 짜이를 마시러 놀러 오라고 한다.
옷 가게에서 빠져나와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맹구 식당을 찾아가면서 인도에서 낯선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며 내주는 그 어떤 것이든 받아먹지 말라고 적혀 있는 인도 안내서를 떠올렸다. 짜이를 다 마시고 나서 생각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 경고장이 앞서 떠올랐으면 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경계했을 것이고, 친구로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맹구 식당을 찾아가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조각을 떼어 놓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숙소로 되돌아갈 길을 찾기 위해 미로와 같은 낯선 골목을 꺾어 들어갈 때마다 빵 조각을 흘리는 대신 인상 깊은 건물들을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맹구 식당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졌다. 맹구식당 주인은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인도 현지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둔 일본 여자가 운영하고 있었다.
음식값도 비쌌다. 메뉴판을 보니 비교적 싼 음식이 내가 묵고 있는 하루 숙소 비용과 맞먹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싼 국수 종류를 시켜 먹고 맹구 식당 주인이 알려준 골목길을 따라 갠지스 강으로 향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갠지스 강으로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처음 출발했던 길을 두 차례나 반복해서 오고 간 끝에 겨우 골목을 빠져나와 갠지스 강 앞에 설 수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지만 길을 헤매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더 이상 당황스럽지 않았다.
골목길에서 빠져나온 곳은 공교롭게도 시장을 끼고 있는 가트의 중심지, 메인 가트(목욕 제단)였다. 그 메인 가트 양옆으로 갠지스 강줄기를 따라 총 6km에 이른다는 가트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강가에는 거지와 분간하기 힘든 헝클어진 머리에 남루한 옷차림의 요기들이며, 울긋불긋 옷차림의 인도 여인들과 흰옷을 입은 힌두교인들, 카메라를 앞세워 강가를 하릴없이 배회하는 외국인들 등 온갖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30도를 웃도는 한낮의 따가운 태양을 피해 오래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거나 쓰레기들이 널려 있는 강가에 몸을 담가 목욕하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거기다 인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소와 개들이 곳곳에 누워 있거나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강가를 바라보며 오래된 사원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저만치 화장터라 짐작되는 곳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낚시를 하거나 빨래를 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인 '천 년 도시 바라나시'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났다.
'강가'에서 씻어내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나는 화장터가 보이는 오른쪽 가트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가트 중간 중간에서는 힌두교도들이 땡볕을 피해 천막을 친 그늘 밑에 모여 앉아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머리를 삭발했다.
"밖으로 나가세요."
"예?"
힌두교도들의 종교의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내게 손짓을 한다. 그가 가리키는 바닥에 금이 그어져 있었다. 일정한 공간을 성역처럼 확보해 놓고 그 안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 의식을 이끄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중에는 열일곱 살도 안 돼 보이는 청소년도 있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경전을 암송하면서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놓인 빈 접시에 제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나는 함께 구경하던 중년의 인도 사람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는 내게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가트에서 종교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은 모두 힌두교도들이며 가족 단위로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의식의 목적은 갠지스 강을 상징하는 강가 신에게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Ganges) 강을 '강가'(Ga?g?)로 부르는데, '강가'는 갠지스 강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강가는 영어 표기인 갠지스 강의 본래 힌디어 이름이며, '어머니 강가'로 신성시 여기고 있다.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성지로 여기고 있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에 몸을 씻으면 죄와 업이 씻겨나간다고 믿고 있다. 또한 시신을 태워 그 재를 갠지스 강에 뿌리면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이 의식을 치르고 있는 바로 아래에서는 오물투성이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어떤 이는 입을 헹구기도 한다. 더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자리만큼 더러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물이 흐르는 강가에서 저들이 씻어 내는 것은 몸의 때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겨 더러운 마음자리, 탐진치(불교 용어로, 탐욕스럽고, 분노하며, 어리석은 상태)를 씻어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 강가'. 자식이 그 어떤 추악한 죄를 저질렀다 해도 용서해 주는 존재가 어머니가 아니던가. 인간들이 온갖 오물로 '어머니 강가'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고 있지만 '어머니 강가'는 그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었다.
탐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신성한 어머니 강가를 더럽히는 오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오물이나 다름없는 죄 많은 인간들은 강가에 몸을 담가 그 자비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자비심은 멈춤 없이 흘러가는 강줄기처럼 무한했다. 강가는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온 강이다. 인간을 정화하는 어머니 강가는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대자연의 힘이기도 했다.
강가를 따라 가트 깊숙이 들어서자 동양인 처녀가 인도 아이들과 놀이를 하면서 해맑은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여성이었다. 그들 앞에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숙소에는 2인실밖에 없다고 했다. 원룸이 하나 있는데 한국인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보다 두 배 이상 비싼 2인실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나와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터 사람들에게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앉아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왼편에서는 목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오른편에서는 시신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내 곁에 앉았다. 나는 그때까지 화장터에 시선을 고정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헛도는 음반처럼 마음속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 때리고' 앉아 있었기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에 앉아 있는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과 고해성사... "무슨 생각 하세요?"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을까. 내 등 뒤로 서 있는 건물들이 강가로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무렵 누군가 내 곁에 앉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화장터 가까이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사내였다. 그를 본 순간 '나는 누구일까'를 반복하면서 화장터 코앞에서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사내를 내내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영어로 물어왔다.
"한국 사람이세요?"
"예, 그런데요."
"저도 한국 사람인데, 혹시 담배 피우세요?"
"예? 담배요?"
"죄송한데 담배가 떨어져서..."
그가 다시 내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라고 물어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기도 했다.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뱉던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살타는 냄새를 맡아가며 열흘 가까이 화장터에 앉아 있었죠, 대체 내가 뭘 하면서 살아왔는지... 내 안에 분노심만 키워오면서 내 잘난 맛에 살아왔을 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어리석은 존재였더라고요."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온 길이 그랬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몸을 던져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생의 아픈 마음자리를 보듬어 주는 자비로운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었다. 반거충이로 분노심만 키워왔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욕심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나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탐욕스런 인간이 없더라고요. 그런 내가 불쌍해 열흘 내내 눈물만 쏟고 가는 것 같네요."
그가 화장터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에 오기 전 이혼을 했다고 한다. 인도는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서 10여 년을 살았고, 그 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가 먼저 속없이 털어놓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 소박맞은 여인들처럼 궁상맞게 살아온 이야기를 저물어 가는 강가에 쏟아부었다.
"제 살아온 얘기가 추잡한 삼류 소설 같지요. 모든 게 다 내 업보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수행자의 길을 가던 놈이 한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해 이 꼴이 되고 말았지요. 그 오만과 자만심으로 결국 이 꼴이 됐으니 자업자득이지요."
"내 처지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끊임없이 이혼을 요구하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딸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제 딸은 부모와 달리 한없이 착합니다. 부모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진흙탕 같은 곳에서 핀 연꽃 같은 녀석이지요."
"내게도 그런 두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바보처럼 푸하하 웃다가, 분통을 터뜨리다가 어느 순간 인생의 패배자처럼 우울해지곤 했다. 그 사이에 땅거미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화장터의 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낯선 곳, 그것도 주검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화장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혼한 그와 별거 중인 내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동병상련에서였을까. 나 또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할 얘기, 못할 얘기들을 다 쏟아냈다. 만난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안 돼 우리는 서로 어떤 이야기든 자유롭게 주고받았다.
오늘 밤 헤어지면 평생 만날 수 없는 인연이라 여겼기에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내일 아침, 히말라야 깊숙한 곳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마치 천 년 전, 바라나시 어딘가에서 만난 까마득한 인연들처럼 아무런 기약 없이 이름도 성도, 그 흔한 손전화기 번호도 모른 채 헤어졌다.
천 년의 세월 속으로...
우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저만치 메인 가트에서 '아르디 뿌자(ArtiPooja)'라는 의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매일 저녁 강가 가트에서 벌어지는 뿌자는 강가의 여신에게 제를 올리며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힌두교의 전통 의식이라고 한다. 나는 그 수많은 사람 틈에 끼어 앉았다.
화로에 담긴 향불이나 불꽃을 흔드는 무용수들의 부드러운 몸짓을 이끌어 내는 인도의 전통 음악을 듣다가 어느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천 년 세월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아득해졌다. 조금 전 화장터 부근에 만났던 사내와의 인연이 까마득한 과거 같았다. 암리차르 황금 사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알 수 없는 그 혼미한 내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개를 몇 차례 흔들어댔으나 소용없었다.
뿌자 의식이 끝나갈 무렵 수많은 사람이 강가 여신에게 소원을 담아 띄운 '디와'(꽃이 담긴 작은 나뭇잎 접시의 기름 심지에 불을 밝힌 것)들이 강줄기를 타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천 년 도시 바라나시의 첫 날 밤은 그렇게 기분 좋은 것도, 기분 나쁜 것도 아니었다. 혼미한 내 의식 속으로 작은 불꽃들이 수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내 존재 의식처럼.
▲ 바라나시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젊은 화가들. |
ⓒ 송성영 |
한국 식당을 찾아 나서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잠에서 깼다.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선풍기 팬이 부지런히 바람을 내보내고 있지만 그마저 후덥지근했다. 얼마나 잤을까. 손전화기 시계를 봤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서너 시간 잠을 잤다. 온몸이 끈적거린다.
인도에 와서 딱 한 번 샤워한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단벌로 가지고 온 옷을 열흘 내내 입고 다녔다. 흰옷이 때 구정물에 절어 거무스름해졌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3층인데 2층에 공동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다.
30도가 넘는 한낮의 태양열에 샤워 꼭지에서 나오는 물조차 미지근해져 있다. 미처 비누를 챙기지 못했다. 가볍게 샤워하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라나시로 출발하기 전에 델리에서 산 누리끼리한 줄무늬의 인도풍 옷이다. 샤워를 하고 나니 허리가 푹 꺾일 정도로 허기가 몰려온다.
인도에 와서 열흘 내내 젊은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분에 넘치도록 잘 먹고 다녔다. 하루에 한두 끼로 보냈던 한국보다 더 잘 먹었다.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산나물을 캐서 무쳐 먹거나 한두 가지 반찬으로 해결했기에 생활비도 아주 적게 들었다. 한 달에 50만 원 정도의 비용을 예상하고 인도에 왔다. 그 돈으로 이동하고 먹고 자는 일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을 최소로 줄여야 한다. 바라나시에서 가장 싼 숙소를 잡았기에 일단 숙소 잡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숙소에서 심부름을 하는 젊은 사내에게 물었다.
"바라나시에 한국 식당이 여럿 있다는데 아세요?"
"이 근처에 맹구 식당 있습니다."
"맹구? 아, 거기 좀 알려 주세요."
'맹구'라는 말이 반가웠다. 한국 식당은 분명 인도 식당보다 비쌀 것이었다. 끼니 해결보다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 바라나시에서 가장 가 보고 싶었던 화장터의 위치를 자세히 알고 싶었다. 숙소 계단을 내려서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헤이! 친구! 나 좀 봐요."
분명 나를 향해 부르는 소리다. 긴 수염은 없지만 인도 요기들처럼 윗옷을 벗고 목에 염주를 주렁주렁 매단 사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손짓한다.
"무슨 일이죠?"
"잠깐 들어와 볼래요?"
내가 멈칫거리자 사내가 내 옷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당신 옷 어디서 샀나요? 여기서 싸게 팔고 있어요. 구경해 보시죠."
바라나시 옷 가게 주인과 친구가 되다
▲ 숙소 앞에서 만난 인도요기. 아주 작은 옷가게를 운영 하고 있다. |
ⓒ 송성영 |
나는 옷에 대한 관심보다는 요기(yogi, 요가 수행자)처럼 보이는 그가 더 궁금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열댓 벌의 옷이 진열된 그의 작은 옷 가게는 어림잡아 두 평 반 남짓했다. 옷 가게라기보다는 그만의 소박한 신전에 가까웠다. 흙으로 꾸며진 작은 공간의 중앙에는 그가 모시고 있는 신이 낡고 조악한 그림으로 앉아 있었다. 삼지창을 들고 있는 것으로 짐작건대 인도의 3대 신 중 하나인 시바 신인 듯싶었다.
그는 이 작고 비좁은 공간에서 시시때때로 명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까 덥수룩한 수염의 내 모습이 수행자처럼 보였는지 그가 묻는다.
"한국의 요기입니까?"
"명상에 관심이 많긴 한데 수행자는 아닙니다. 그냥 여행자입니다."
그는 내가 여느 외국인 여행자들처럼 영어를 잘하는 줄 알고 길게 말한다. 영어가 짧은 나로서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 요점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라나시의 힌두 사원에 기거하고 있는 큰 스승을 모시는 힌두 수행자다. 옷 장사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다. 내가 주로 하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는 일, 명상이다."
그는 짜이를 내주면서 델리에서 파는 가격보다 50루피 싸게 팔 테니까 옷을 살 친구들이 있으면 데려오라고 한다. 옷을 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또 옷을 사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 때나 친구처럼 짜이를 마시러 놀러 오라고 한다.
옷 가게에서 빠져나와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맹구 식당을 찾아가면서 인도에서 낯선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며 내주는 그 어떤 것이든 받아먹지 말라고 적혀 있는 인도 안내서를 떠올렸다. 짜이를 다 마시고 나서 생각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 경고장이 앞서 떠올랐으면 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경계했을 것이고, 친구로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맹구 식당을 찾아가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조각을 떼어 놓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숙소로 되돌아갈 길을 찾기 위해 미로와 같은 낯선 골목을 꺾어 들어갈 때마다 빵 조각을 흘리는 대신 인상 깊은 건물들을 머릿속에 입력시켰다.
▲ 바라나시 강가 메인 가트에서 만난 거지 형색의 요기. |
ⓒ 송성영 |
맹구 식당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졌다. 맹구식당 주인은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인도 현지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둔 일본 여자가 운영하고 있었다.
음식값도 비쌌다. 메뉴판을 보니 비교적 싼 음식이 내가 묵고 있는 하루 숙소 비용과 맞먹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싼 국수 종류를 시켜 먹고 맹구 식당 주인이 알려준 골목길을 따라 갠지스 강으로 향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갠지스 강으로 향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처음 출발했던 길을 두 차례나 반복해서 오고 간 끝에 겨우 골목을 빠져나와 갠지스 강 앞에 설 수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지만 길을 헤매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더 이상 당황스럽지 않았다.
골목길에서 빠져나온 곳은 공교롭게도 시장을 끼고 있는 가트의 중심지, 메인 가트(목욕 제단)였다. 그 메인 가트 양옆으로 갠지스 강줄기를 따라 총 6km에 이른다는 가트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강가에는 거지와 분간하기 힘든 헝클어진 머리에 남루한 옷차림의 요기들이며, 울긋불긋 옷차림의 인도 여인들과 흰옷을 입은 힌두교인들, 카메라를 앞세워 강가를 하릴없이 배회하는 외국인들 등 온갖 사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 힌두교도들의 성지 바라나시 강가 풍경. |
ⓒ 송성영 |
30도를 웃도는 한낮의 따가운 태양을 피해 오래된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거나 쓰레기들이 널려 있는 강가에 몸을 담가 목욕하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거기다 인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소와 개들이 곳곳에 누워 있거나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강가를 바라보며 오래된 사원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저만치 화장터라 짐작되는 곳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낚시를 하거나 빨래를 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인 '천 년 도시 바라나시'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났다.
'강가'에서 씻어내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 바라나시 강가 |
ⓒ 송성영 |
▲ 바라나시 강가에서 목욕을 하면서 기도를 올리는 힌두교도 |
ⓒ 송성영 |
나는 화장터가 보이는 오른쪽 가트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가트 중간 중간에서는 힌두교도들이 땡볕을 피해 천막을 친 그늘 밑에 모여 앉아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머리를 삭발했다.
"밖으로 나가세요."
"예?"
▲ 어머니 강가를 향해 종교 의식을 치르는 힌두교도들 |
ⓒ 송성영 |
힌두교도들의 종교의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내게 손짓을 한다. 그가 가리키는 바닥에 금이 그어져 있었다. 일정한 공간을 성역처럼 확보해 놓고 그 안에서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 의식을 이끄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중에는 열일곱 살도 안 돼 보이는 청소년도 있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경전을 암송하면서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놓인 빈 접시에 제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나는 함께 구경하던 중년의 인도 사람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는 내게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가트에서 종교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은 모두 힌두교도들이며 가족 단위로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의식의 목적은 갠지스 강을 상징하는 강가 신에게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Ganges) 강을 '강가'(Ga?g?)로 부르는데, '강가'는 갠지스 강을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강가는 영어 표기인 갠지스 강의 본래 힌디어 이름이며, '어머니 강가'로 신성시 여기고 있다.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성지로 여기고 있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에 몸을 씻으면 죄와 업이 씻겨나간다고 믿고 있다. 또한 시신을 태워 그 재를 갠지스 강에 뿌리면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이 의식을 치르고 있는 바로 아래에서는 오물투성이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어떤 이는 입을 헹구기도 한다. 더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자리만큼 더러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물이 흐르는 강가에서 저들이 씻어 내는 것은 몸의 때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겨 더러운 마음자리, 탐진치(불교 용어로, 탐욕스럽고, 분노하며, 어리석은 상태)를 씻어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 강가'. 자식이 그 어떤 추악한 죄를 저질렀다 해도 용서해 주는 존재가 어머니가 아니던가. 인간들이 온갖 오물로 '어머니 강가'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고 있지만 '어머니 강가'는 그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었다.
탐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신성한 어머니 강가를 더럽히는 오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오물이나 다름없는 죄 많은 인간들은 강가에 몸을 담가 그 자비로운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자비심은 멈춤 없이 흘러가는 강줄기처럼 무한했다. 강가는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온 강이다. 인간을 정화하는 어머니 강가는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대자연의 힘이기도 했다.
▲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만난 한국인 젊은 여성과 인도 아이들이 웃음을 주고 받고 있다. |
ⓒ 송성영 |
강가를 따라 가트 깊숙이 들어서자 동양인 처녀가 인도 아이들과 놀이를 하면서 해맑은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여성이었다. 그들 앞에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숙소에는 2인실밖에 없다고 했다. 원룸이 하나 있는데 한국인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보다 두 배 이상 비싼 2인실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나와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터 사람들에게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앉아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왼편에서는 목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오른편에서는 시신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내 곁에 앉았다. 나는 그때까지 화장터에 시선을 고정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헛도는 음반처럼 마음속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 때리고' 앉아 있었기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에 앉아 있는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과 고해성사... "무슨 생각 하세요?"
▲ 바라나시 강가 가트에서 매일 저녁 열리는 힌두교 종교의식 뿌자. 강가 여신을 경배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
ⓒ 송성영 |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을까. 내 등 뒤로 서 있는 건물들이 강가로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무렵 누군가 내 곁에 앉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화장터 가까이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사내였다. 그를 본 순간 '나는 누구일까'를 반복하면서 화장터 코앞에서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사내를 내내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영어로 물어왔다.
"한국 사람이세요?"
"예, 그런데요."
"저도 한국 사람인데, 혹시 담배 피우세요?"
"예? 담배요?"
"죄송한데 담배가 떨어져서..."
그가 다시 내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라고 물어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서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기도 했다.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뱉던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살타는 냄새를 맡아가며 열흘 가까이 화장터에 앉아 있었죠, 대체 내가 뭘 하면서 살아왔는지... 내 안에 분노심만 키워오면서 내 잘난 맛에 살아왔을 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어리석은 존재였더라고요."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온 길이 그랬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몸을 던져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생의 아픈 마음자리를 보듬어 주는 자비로운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었다. 반거충이로 분노심만 키워왔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욕심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나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탐욕스런 인간이 없더라고요. 그런 내가 불쌍해 열흘 내내 눈물만 쏟고 가는 것 같네요."
그가 화장터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에 오기 전 이혼을 했다고 한다. 인도는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서 10여 년을 살았고, 그 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가 먼저 속없이 털어놓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 소박맞은 여인들처럼 궁상맞게 살아온 이야기를 저물어 가는 강가에 쏟아부었다.
"제 살아온 얘기가 추잡한 삼류 소설 같지요. 모든 게 다 내 업보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수행자의 길을 가던 놈이 한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해 이 꼴이 되고 말았지요. 그 오만과 자만심으로 결국 이 꼴이 됐으니 자업자득이지요."
"내 처지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끊임없이 이혼을 요구하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나마 딸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제 딸은 부모와 달리 한없이 착합니다. 부모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진흙탕 같은 곳에서 핀 연꽃 같은 녀석이지요."
"내게도 그런 두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바보처럼 푸하하 웃다가, 분통을 터뜨리다가 어느 순간 인생의 패배자처럼 우울해지곤 했다. 그 사이에 땅거미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화장터의 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낯선 곳, 그것도 주검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화장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혼한 그와 별거 중인 내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동병상련에서였을까. 나 또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할 얘기, 못할 얘기들을 다 쏟아냈다. 만난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안 돼 우리는 서로 어떤 이야기든 자유롭게 주고받았다.
오늘 밤 헤어지면 평생 만날 수 없는 인연이라 여겼기에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내일 아침, 히말라야 깊숙한 곳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마치 천 년 전, 바라나시 어딘가에서 만난 까마득한 인연들처럼 아무런 기약 없이 이름도 성도, 그 흔한 손전화기 번호도 모른 채 헤어졌다.
천 년의 세월 속으로...
▲ 인도의 전통 음악과 함께 향불과 불꽃 춤을 추는 뿌자의식. 천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
ⓒ 송성영 |
우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저만치 메인 가트에서 '아르디 뿌자(ArtiPooja)'라는 의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매일 저녁 강가 가트에서 벌어지는 뿌자는 강가의 여신에게 제를 올리며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힌두교의 전통 의식이라고 한다. 나는 그 수많은 사람 틈에 끼어 앉았다.
화로에 담긴 향불이나 불꽃을 흔드는 무용수들의 부드러운 몸짓을 이끌어 내는 인도의 전통 음악을 듣다가 어느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천 년 세월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는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아득해졌다. 조금 전 화장터 부근에 만났던 사내와의 인연이 까마득한 과거 같았다. 암리차르 황금 사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알 수 없는 그 혼미한 내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고개를 몇 차례 흔들어댔으나 소용없었다.
뿌자 의식이 끝나갈 무렵 수많은 사람이 강가 여신에게 소원을 담아 띄운 '디와'(꽃이 담긴 작은 나뭇잎 접시의 기름 심지에 불을 밝힌 것)들이 강줄기를 타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천 년 도시 바라나시의 첫 날 밤은 그렇게 기분 좋은 것도, 기분 나쁜 것도 아니었다. 혼미한 내 의식 속으로 작은 불꽃들이 수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내 존재 의식처럼.
▲ 강가의 여신에게 소원을 담아 띄우는 디와. 밤낮 없이 강줄기에 흘려 보낸다. |
ⓒ 송성영 <기사 출처 :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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