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낯선 이름들 (下)
우리 겨레는 죽음을 ‘자연(우주)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죽음은 본디로의 환원(還元)인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전통은 그 사회의 정신적 기틀을 짜는 재료다.
피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이 죽음을 애써 외면하는 시각이나 삶에의 집착 또한 엄연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식의 속담이 적지 않다. 죽음과 사후(死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의 애착과 더불어 복잡한 심리를 짓는다. 사람들이 생사의 문제를 종교에 묻는 까닭일 것이다.
다소간 차이는 있으나 종교는 죽음을 대개 ‘새로운 시작’으로 설명한다. 죽음이 ‘막장’이고 다만 허무(虛無)라면 종교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초라할 것이다. 죽음 이후를 장엄하게 묘사하고 그 광경을 흠모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한 의미 아닌가. 종교 동네에서 죽음을 부르는 이름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시민들의 말과 꽤나 다른 것도 그런 이유겠다.
기독교(개신교)에서 죽음을 부르는 이름은 ‘소천(召天)’이다. ‘소천했다’는 ‘죽었다’와 같은 말이다. 하늘[天]이 부른[召] 것이다. 그 하늘은 기독교의 신(神)이다. 피할 수 없다는 점과 그 다음 세상은 우리(인간)의 몫이 아닌 그 신의 주관 사항임을 보듬은 제목이다.
칼 도(刀)자와 입 구(口)자가 합쳐진 召자는 그 불가피성을 웅변하는 것과도 같다. 칼처럼 (확고하게 입으로) 부르는, 하늘의 명령이려니. 서양 종교가 중국 사회에 수입되어 서로 절충되는 습합(習合)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한자 이름으로 짐작된다. 세상의 만사가 하늘의 뜻 아닌 게 어디 있을까, 그 작명(作名)의 탁월함은 동아시아 문자의 미덕이기도 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를 치르며 익숙해진 말 ‘선종(善終)’은 가톨릭교회가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착하고 거룩하게 삶을 마쳤다는 것이다. 착할 善과 마칠 終의 글자가 그런 이미지를 보여준다.
아무 죽음이나 다 선종인 것은 아니다. 그 교회의 ‘기준’에 합당한 죽음이 선종이다. 십계명 등 하느님의 법을 크게 거슬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사죄(死罪)]를 범하지 않았어야 하고, 죽음에 임박해 가톨릭 사제(司祭)로부터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기준이라고 한다.
천주교 용어집은 선종을 ‘한국천주교 초기부터 써 온 용어로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줄임말’이라고 풀었다. 한자는 ‘착하게 살고, 복되게 마치다’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말은 무척 다양하다. 그런데 ‘죽음’이란 글자, 이를 테면 사(死)자와 같은 죽음을 직설적으로 이르는 말이 그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공통적이다. 뜻을 톺아보면 마치 비유법(比喩法)의 품평회장 같다. 불교가 죽음을 어떻게 보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명상(瞑想)의 어휘들이다.
입적(入寂)은 적막함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적막함을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해탈(解脫)의 뜻인 열반은 불교의 키워드 중 하나다.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성불(成佛)]이다. 삶의 고해(苦海) 건넌 중생(衆生)에게는, 스스로 부처를 이루지 않더라도, 열반이 주어진다는 것일까? 스님의 죽음인 입적과 열반이 죽음의 일반명사로도 기능한다.
열반은 인도의 고대 표준 문장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범어·梵語)의 니르바나(nirv?na)를 음역(音譯)한 한자어다. 한글 영어 같은 소리글인 산스크리트 단어의 소리에 적당한 한자를 정해 중국에서 쓰기 위한 단어를 만든 것이 (한자)음역이다. 우리는 그 음역된 한자를 한국어의 한자어로 읽는다. 우리말 발음 [열반]과 [니르바나]가 차이를 보이는 이유다.
뜻도 그런 차이를 품는다.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쌓인 앙금 흙인 열(涅)과 쟁반을 뜻하는 반(槃)이 합쳐진 그 단어 ‘열반’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라는 니르바나의 뜻을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소리를 이렇게 적고, 그 뜻으로 이해하자고 약속한 것이 음역이다.
입적과 열반 외에도 불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이름은 멸도(滅度) 입멸(入滅) 입연(入宴) 입정(入定) 적화(寂化) 등 다양하다. 불교의 4가지 원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중의 滅은 ‘번뇌(煩惱)를 없앤 깨달음의 상태’인데, 이렇게 죽음을 표현하는 말로도 활용된다.
민속신앙의 타계(他界)는 말 그대로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뜻이다. 곧 저승(행)이다. 이승의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곳이 저승인데 무격(巫覡·샤머니즘)이 도교(道敎) 불교 등과 습합한 죽음의 이름이다. 우리 겨레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타계’ 이미지는 지구촌 크고 작은 겨레들의 생사관(生死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종교의 바탕이 아닐까?
종교가 죽음을 부르는 이 정중(鄭重)하고도 장중(莊重)한 어휘들은 인간을 우러른다. 너와 나, 세상 구석구석의 티끌 같은 저 사람들의 고귀함을 넘어서는 존재란 없다. 좋은 종교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존엄(尊嚴)이다.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우리 겨레는 죽음을 ‘자연(우주)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죽음은 본디로의 환원(還元)인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전통은 그 사회의 정신적 기틀을 짜는 재료다.
피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이 죽음을 애써 외면하는 시각이나 삶에의 집착 또한 엄연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식의 속담이 적지 않다. 죽음과 사후(死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의 애착과 더불어 복잡한 심리를 짓는다. 사람들이 생사의 문제를 종교에 묻는 까닭일 것이다.
다소간 차이는 있으나 종교는 죽음을 대개 ‘새로운 시작’으로 설명한다. 죽음이 ‘막장’이고 다만 허무(虛無)라면 종교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초라할 것이다. 죽음 이후를 장엄하게 묘사하고 그 광경을 흠모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한 의미 아닌가. 종교 동네에서 죽음을 부르는 이름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시민들의 말과 꽤나 다른 것도 그런 이유겠다.
2009년 2월20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교황장(葬)으로 치러지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자격을 갖춘’ 죽음을 이르는 선종(善終)은 ‘착하게 살고, 복되게 마치다’라는 뜻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칼 도(刀)자와 입 구(口)자가 합쳐진 召자는 그 불가피성을 웅변하는 것과도 같다. 칼처럼 (확고하게 입으로) 부르는, 하늘의 명령이려니. 서양 종교가 중국 사회에 수입되어 서로 절충되는 습합(習合)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한자 이름으로 짐작된다. 세상의 만사가 하늘의 뜻 아닌 게 어디 있을까, 그 작명(作名)의 탁월함은 동아시아 문자의 미덕이기도 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를 치르며 익숙해진 말 ‘선종(善終)’은 가톨릭교회가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착하고 거룩하게 삶을 마쳤다는 것이다. 착할 善과 마칠 終의 글자가 그런 이미지를 보여준다.
아무 죽음이나 다 선종인 것은 아니다. 그 교회의 ‘기준’에 합당한 죽음이 선종이다. 십계명 등 하느님의 법을 크게 거슬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사죄(死罪)]를 범하지 않았어야 하고, 죽음에 임박해 가톨릭 사제(司祭)로부터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기준이라고 한다.
천주교 용어집은 선종을 ‘한국천주교 초기부터 써 온 용어로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줄임말’이라고 풀었다. 한자는 ‘착하게 살고, 복되게 마치다’라는 뜻이다.
2010년 3월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의 다비식(茶毘式)이 열리고 있다. 다비식은 입적한 스님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불교의 장례의식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입적(入寂)은 적막함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 적막함을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해탈(解脫)의 뜻인 열반은 불교의 키워드 중 하나다.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성불(成佛)]이다. 삶의 고해(苦海) 건넌 중생(衆生)에게는, 스스로 부처를 이루지 않더라도, 열반이 주어진다는 것일까? 스님의 죽음인 입적과 열반이 죽음의 일반명사로도 기능한다.
열반은 인도의 고대 표준 문장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범어·梵語)의 니르바나(nirv?na)를 음역(音譯)한 한자어다. 한글 영어 같은 소리글인 산스크리트 단어의 소리에 적당한 한자를 정해 중국에서 쓰기 위한 단어를 만든 것이 (한자)음역이다. 우리는 그 음역된 한자를 한국어의 한자어로 읽는다. 우리말 발음 [열반]과 [니르바나]가 차이를 보이는 이유다.
뜻도 그런 차이를 품는다.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쌓인 앙금 흙인 열(涅)과 쟁반을 뜻하는 반(槃)이 합쳐진 그 단어 ‘열반’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라는 니르바나의 뜻을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소리를 이렇게 적고, 그 뜻으로 이해하자고 약속한 것이 음역이다.
입적과 열반 외에도 불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이름은 멸도(滅度) 입멸(入滅) 입연(入宴) 입정(入定) 적화(寂化) 등 다양하다. 불교의 4가지 원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중의 滅은 ‘번뇌(煩惱)를 없앤 깨달음의 상태’인데, 이렇게 죽음을 표현하는 말로도 활용된다.
민속신앙의 타계(他界)는 말 그대로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뜻이다. 곧 저승(행)이다. 이승의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곳이 저승인데 무격(巫覡·샤머니즘)이 도교(道敎) 불교 등과 습합한 죽음의 이름이다. 우리 겨레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타계’ 이미지는 지구촌 크고 작은 겨레들의 생사관(生死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종교의 바탕이 아닐까?
종교가 죽음을 부르는 이 정중(鄭重)하고도 장중(莊重)한 어휘들은 인간을 우러른다. 너와 나, 세상 구석구석의 티끌 같은 저 사람들의 고귀함을 넘어서는 존재란 없다. 좋은 종교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존엄(尊嚴)이다.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 사족(蛇足)
13세기 유럽 교회의 설교 주제어로 미술과 음악, 문학 등 서구의 예술에 영향을 미쳐 온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警句)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힘이 세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2000)는 소설 ‘메멘토 모리’로 만든 심리극으로 유명하다. 우리 예술 시장에도 한때 ‘메멘토 모리’ 바람이 불었다. 같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영화가 여럿 만들어졌다. 죽음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 아닌가? 그 절대적인 힘이 ‘빽’이니.
메멘토 모리와 함께 서구의 예술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제목이 ‘지금을 붙잡으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구절이다.
메멘토 모리와 대조적인 의미여서 더 잘 맞는 짝이 될 수 있었을까? 두 말은 함께 어울려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카르페 디엠이란 말은 최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통해 우리와 더욱 익숙해졌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50년쯤 당시 ‘선진국’이었던 이집트의 연회를 저서 ‘역사’에서 묘사한 대목이 이 두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어 이채롭다. 이런 줄거리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앞에서 한 남성이 해골바가지를 들고 외친다. “이 음식과 술을 마음껏 즐기십시오. 다만, 우리는 곧 죽을 것임을 이 해골을 보며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2000년 첫 개봉 후 14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메멘토’ 포스터.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 ‘메멘토 모리’는 종교의 주제이면서 인간의 영원한 주제에 관한 것이어서 예술 분야에 널리 그 이미지가 쓰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2000)는 소설 ‘메멘토 모리’로 만든 심리극으로 유명하다. 우리 예술 시장에도 한때 ‘메멘토 모리’ 바람이 불었다. 같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영화가 여럿 만들어졌다. 죽음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 아닌가? 그 절대적인 힘이 ‘빽’이니.
메멘토 모리와 함께 서구의 예술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제목이 ‘지금을 붙잡으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구절이다.
메멘토 모리와 대조적인 의미여서 더 잘 맞는 짝이 될 수 있었을까? 두 말은 함께 어울려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카르페 디엠이란 말은 최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통해 우리와 더욱 익숙해졌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50년쯤 당시 ‘선진국’이었던 이집트의 연회를 저서 ‘역사’에서 묘사한 대목이 이 두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어 이채롭다. 이런 줄거리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앞에서 한 남성이 해골바가지를 들고 외친다. “이 음식과 술을 마음껏 즐기십시오. 다만, 우리는 곧 죽을 것임을 이 해골을 보며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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