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 발목잡는 ‘부양의무자’ 제도
부모·자녀·사위·며느리 등 1촌 직계혈족과 그 배우자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부양의무자’로 규정돼 있다. 이들에게는 국가 대신 가족의 가난을 함께 짊어질 의무가 주어진다. 이들이 중위소득(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세울 때 딱 중간에 있는 가구의 소득)의 50% 미만인 상대적 빈곤층이거나, 부양해야 할 가족과 오랫동안 단절된 삶을 살았다는 게 증명되면 그제야 그 의무는 국가로 넘어간다. 전문가들은 이들에 대한 규정, 즉 부양의무자 기준이 빈곤층을 지독한 가난에 묶어두는 족쇄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부양의무자 소득 따라 수급액도 출렁=노순례(가명·82) 할머니는 지난해 8월 더 이상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라는 통보를 받았다.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노 할머니는 처음 수급자가 된 2010년 1월부터 3년8개월 동안 정부 처분 따라 사는 처지였다. 주면 받고 안 주면 못 받았다. 받는 액수도 매달 달랐다. 처음 1년 반은 줄곧 17만원 안팎이 들어왔다. 이후 6개월은 24만~35만원씩, 다음 6개월은 매달 8만원을 받았다. 그 다음 6개월은 한 푼도 없었다. 지난해 1~8월은 매달 3만6000원이 입금됐다. 통장에 숫자가 찍힌 뒤에야 노 할머니는 그달 얼마의 예산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형편은 그대로인데 정부로부터 받는 돈이 30만원 넘게 출렁인 건 세 딸네의 소득 때문이었다. 할머니와 딸의 형편은 정확히 반비례했다. 여섯 자녀 중 부양의무자인 세 딸과 사위들의 수입이 많아지면 할머니 생활비는 줄었고, 딸네 수입이 줄면 할머니 수입이 늘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딸 둘과 사위 한 명의 일용소득까지 사회복지통합관리망(행복e음)에 노출되면서 결국 수급자격을 잃게 된 것이다.
◇‘부양 간주소득’의 덫=노 할머니는 딸들에게 정기적인 부양비를 받지 못했다. 같이 살지도 않는 딸들은 형편 따라 이따금씩 10만~20만원의 용돈을 주는 정도였다. 생활비로 쓸 수 있는 고정 수입은 기초노령연금 9만8000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법은 노 할머니에게 매달 71만5000원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이상한 계산은 ‘부양 간주소득’ 규정에서 나온다. 수급 탈락 직전 노 할머니 셋째 딸의 소득은 5인 가구 기준 340만원이었다. 이 중 15만4000원이 부양 간주소득이 된다. 부양의무자인 셋째 딸이 노 할머니에게 매달 지원했을 것으로 ‘간주’되는 소득이 이 액수라는 뜻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부양의무자가 여럿이면 이들의 부양 간주소득을 전부 더해야 한다. 노 할머니의 경우 나머지 딸 둘과 사위 한 명의 부양 간주소득까지 전부 합쳐야 한다. 이 금액이 지난해 1인 가구 최저생계비(57만2167원)를 넘는 71만5000원이 된 것이다. 실제 이 금액이 부양비로 쓰였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가족관계 단절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부담=쪽방촌을 전전하는 오정현(가명·71) 할머니는 잦은 폭행으로 이혼한 남편이 예전 아내와 낳은 자녀 때문에 수급자가 될 수 없었다. 전 남편의 자녀 6명은 오 할머니 자녀로 등록돼 있었다. 남편과는 이혼했지만 자녀관계가 정리되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오 할머니는 이 가운데 4명과는 함께 산 적이 없고, 2명은 성인이 된 이후 집을 나가면서 연락이 두절됐다.
하지만 행복e음에는 오 할머니의 사정을 감안할 정보가 담겨 있지 않았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닌 6명의 부양의무자가 오 할머니의 수급을 가로막았다. 글을 모르는 오 할머니는 이의제기도 하지 못했다. 구청 직원이 “자격이 안 된다”고 하니 통보를 그대로 따를 뿐이었다.
췌장염 환자로 전혀 일을 하지 못 하는 장경찬(가명·43)씨는 어머니가 부양의무자여서 수급자가 될 수 없었던 경우다. 생활비 지원은 거의 못 받는 상황인데 문제는 집이었다.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증까지 겹친 장씨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진즉 끊어졌다. 하지만 현재 어머니 명의의 집에 살고 있어 가족관계가 단절됐다는 판정을 받기 힘들었다.
◇노인이 가난한 나라=우리나라 노인의 상대빈곤율은 2010년 기준 47.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다. 첫 번째 이유로 꼽히는 것이 부양의무제로 인해 높아진 기초생활보장제의 문턱이다. 가난한 자녀의 부양 간주소득이란 덫에 묶인 노 할머니나 가족관계 단절을 증명하지 못한 오 할머니 같은 사연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다보니 노인들이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벌어진다.
부양의무제 폐지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이상은 교수는 “부양의무제를 당장 폐지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노인과 장애인에 대해서라도 부양의무제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미곤 연구위원도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는 훨씬 더 과감하게, 큰 규모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양의무제는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빈곤층도 부양의무자가 일정 기준 이상의 소득이나 재산이 있으면 기초생활수급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한 제도. 부양의무자는 1촌의 직계혈족이나 배우자를 말한다. 이들에게 기준 이상 소득이 있으면 수급권자를 부양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기사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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