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3월부터 시행하는 임금피크제를 3~5년간 운용하면서 피크형 임금체계를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 직책과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역할급’ 임금체계를 도입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시간을 두고 새로운 임금체계를 만들어 적용할 계획”이라고 28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3월부터 적용하는 임금피크제는 갑작스러운 정년 연장에 대처하기 위한 과도기적 조치”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또다른 삼성 관계자는 “직무와 역할에 따라 임금을 다르게 지급하는 체계로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며 “3년 전부터 일부 계열사의 직책을 단순화해 시범운영한 결과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의 임금체계는 근속연수에 따라 매년 일정액씩 오르는 연공성 색채가 가미된 성과연봉제를 시행하고 있다. 삼성이 추진 중인 직무·역할급은 연공성(근속연수) 대신 직책에 따라 기본임금을 정해 지급하는 제도다. 여기에 성과급을 추가해 총임금액을 산출한다. 각 직책별 기본임금은 해당 직무의 난이도, 복잡성, 책임의 크기와 같은 특성을 따져 결정된다. 이렇게 되면 역할과 관계없이 근속기간이 길면 무조건 고임금을 받는 사례가 사라지게 된다. 인천대 김동배(경영학) 교수는 “역할급은 사람과 업무의 미스매치와 이로 인한 연공성 처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임금체계”라고 말했다.
여러 단계로 복잡하게 나눠진 직책은 단순화된다. 현재 사원 1~3,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7단계 직책(삼성전자)은 사원과 과장, 부장의 세 가지로 통폐합된다. 각 직책별 기본급은 일의 난이도와 공헌도에 따라 5단계로 세분화된다. 같은 과장이라도 업무 강도가 높고, 성과를 많이 내는 과장은 가장 높은 단계의 임금기준을 적용받게 되는 것이다.
부장으로 일하다 역할 수행능력이 떨어지면 과장이나 사원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이 경우 기본급도 떨어진다. 생산성이 저하되는 50대 후반 고령자의 경우 30대 과장보다 임금이 적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부장으로서 직책을 50세가 넘어서도 수행하면 임금은 부장 직책에 맞춰 많이 받게 된다. 일본 도시샤(同志社)대 이시다 미쓰오(石田光男·경제학) 교수는 “역할급을 활용하면 생산성이 줄어도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어 근로자에겐 종신고용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이시다 교수는 “근로자 총액 임금도 급격하게 늘지 않아 경영상 부담을 덜어줘 고령화 사회에 적합하다”고 덧붙였다. 삼성 관계자는 “역할급이 도입되면 정년이 65세로 더 연장되더라도 큰 무리 없이 고용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이 임금체계 개편을 서두르는 이유는 임금피크제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어서다. 임금피크제는 정년에 가까운 부장의 임금을 일률적으로 깎는다. 과장보다 적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부장으로서의 업무강도와 난이도, 책임성은 배제된 채 부장 대접을 못 받는 사태가 생기는 셈이다. 또 임금피크제가 평등권과 고령자고용촉진법에 위배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0년 일본의 한 철강기업 근로자는 “특정 연령(55세)에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은 능력과 성과가 아니라 나이만 따지는 불합리한 차별”이라며 요코하마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고용노동부가 정년 60세 의무화법에 임금피크제 명시를 강하게 반대한 것도 이런 점을 우려해서다.
직무·역할급은 일본에선 대부분의 기업이 채택하고 있다. 일본기업은 1980년대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자 3~4년간 임금피크제를 운용했다. 56세에 15%를 삭감하고, 58세에 10%를 추가로 줄이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임금피크제로 인한 문제가 불거지자 성과 중심의 역할급으로 전환했다. 일본 후지쓰의 이타쿠라 가즈토시(板倉和壽) 노조위원장은 “임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성과에 따라) 버는 것”이라며 “생산성과 관계없이 오래 일하면 무조건 임금을 더 받는 연공급으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고용을 늘리고, 직원의 정년을 보장하는 데는 지금 같은 역할급이 가장 낫다”고 덧붙였다.
<From : 중앙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