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사학자에겐 주체가 없다
◆역사학은 현재적 정체성 찾기 작업
한국의 실증사학자에겐 주체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의 주체가 있을 뿐이다. 실증식민사학자들은 객관이나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주체 없음을 은폐하고 있다. 자국의 관점이 없는 역사학이 어찌 역사학이 될 수 있는가. 한국사는 당연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 성립되지 않듯이 주체가 없는 사학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적 입장에서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다. 역사학은 또 결코 원류를 찾는 작업이 아니다. 원류를 찾아가면 결국 모든 인류는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공동조상의 자손일 뿐이다. 역사적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재의 영토(공간)를 기준으로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혈통(시간)을 기준으로 찾는 것이다.
동북아시아를 기준으로 볼 때 중국은 대륙에 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토를 기준으로 찾을 수밖에 없고, 이주세력인 한국이나 일본은 혈통을 기준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은 영토주의 대 혈통주의의 대결임을 잘 말해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노골적으로 영토주의를 드러내고 있고, 일본은 다시 내선일체를 숨기고 군국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은 일종의 역사적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과거의 제국주의적 역사해석을 되풀이하는 한 절대로 아시아태평양 시대를 이끌어갈 수가 없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현대사의 흐름에서 고대 조선(朝鮮)·발해(渤海)문명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과 소명이 여기에 있다.
일제 식민지통치로 인해 삼국사나 삼국유사를 불신하고, 오늘의 삼국사나 삼국유사 같은 독자적(독립적)으로 기술된 ‘조선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나 주장을 토대로 그것이 틀리니, 맞느니 하면서 남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다. 한국의 사학을 대표하는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일본과 중국을 대변하는 기관처럼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역사학자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저술을 통해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조선총독부사관)과 최근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의 모화사관이 매국(賣國), 매사(賣史)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는데 이는 결국 우리의 주체적 사관이 없는 당연한 귀결이다.
사대식민사학에 대항하는 길은 민족주의·대륙사관 연대를 구성하는 길이다. 민족주의·대륙사관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야 한다.
첫째 한국사가 고대 조선 때부터 만리장성 이북의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를 무대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조선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 즉 삼국사와 삼국유사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이며,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김부식의 삼국사의 사관을 유교적 사대주의로 폄하할 필요도 없고, 일연의 삼국유사의 사관을 불교적 윤색이라고 매도해서도 안 된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모든 역사적 관점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개성의 표출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사의 전개를 삼국의 바탕 위에 굳건히 두고 있지 않는가.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대륙사관의 핵과 같은 것이다. 한사군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민족사학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에서 동’(중국의 지형)으로 흐르는 강을 ‘동에서 서’(한국의 지형)로 흐르는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기록까지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중국의 역사지리서인 ‘수경(水經)’은 “패수는 낙랑(樂浪)군 누방(鏤方)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臨浿)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고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낙랑군의 위치는 중국의 1차 사료에 따르면 일관되게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 문헌들은 모두 요동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후한서(後漢西)’ ‘광무제(光武帝)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둘째 동아시아 문화와 문명의 흐름으로 볼 때 고대에서 근대 이전까지는 문화와 사람들이 대륙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흐르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중추세력은 모두 북방에서 흘러 온 세력들이고, 일본은 다시 한반도에서 2차적으로 이주한 세력들이다. 일본은 왕가의 혈통에서부터 한반도 세력과 인연을 끊을 수 없으며, 일본의 고대·중세 문화는 한국 문화가 ‘일본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조선과 고구려 강역의 한반도설은 어불성설이며, 임나일본부나 전방후원분도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역측(逆測·거꾸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나 ‘고사기(古事記)’의 사관은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려 세운, 역(逆)식민지적 방식의 정체성 찾기의 기술이다. 말하자면 식민을 당한 자가 식민을 한 것처럼 위장하고 조작하는 ‘복수의 역사학’인 것이다.
일본인의 DNA를 분석하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의 특성이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일본의 고대·중세 문화뿐 아니라 일본인의 구성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세력들로서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역사흐름의 적반하장
세계적인 동양미술사학자이면서 일본문화통인 존 카터 코벨(1910∼1996)은 일본의 고대문화가 모두 한국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만년에 한국 문화를 연구하다가 돌아갔다. 코벨은 일본이 한때 가야를 지배했음을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는 사실을 뒤집어놓은 것이라고 역설했다.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 교수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 505년까지 100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 가야를 지배한 것은 부여족이었다. 부여족들은 일본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인 360년쯤 부산 부근을 일종의 기지로서 활용한 것이다. (중략) 일본의 지배층이 된 부여족들은 부산에 일종의 분실황가로서 남겨두고 온 가야의 귀족층과 국제결혼을 했다. 일본이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그들이 한반도 남동지역 한 부분을 다스렸다고 하는 주장은 완전히 그 반대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 들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로 인해 이 사실은 매우 미묘하면서도 긴장된 사안이 되었다.”
고대에 한반도 세력의 식민지가 된 일본은 돌연 근대에 이르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하기 위해 거꾸로 고대에서부터 한반도에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것처럼 날조하는 심리적 도착·자기 속임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고대사 열등 콤플렉스’는 돌연 ‘근대사 우월 콤플렉스’로 반전되어 정한론(征韓論·일본이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임나일본부는 고대사 전체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역사왜곡이다. 근대의 일본 문화는 ‘신격화된 일왕’을 숭배하는 신도(神道)와 사무라이 전통이 통합된, 일본 특유의 군국주의적 색채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고고인류학의 주체성 확립 절실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딴 역사학자들과 수시로 일본의 연구소를 들락거리면서 연구를 해온 실증사학자들은 완전히 일본의 주구가 되어 돌아온다. 일종의 먹이연쇄인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만이 역사학인 줄 안다. 그러니 한국의 주체적인 사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도 없다.
예컨대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측정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400년이나 늦추어졌다. 2000년 10월까지 수습된 목탄, 목재, 토기 등 13점에 대한 방사성동위원소 측정을 한 결과 서기전 199년에서 서기 231년으로 나타났다. 이 유적을 처음 발굴한 고고학자 김원룡은 당시 이 유적을 서기전 1세기부터 공주 천도 시까지 500년간의 유적으로 보았다. 이것은 일본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불식시킬 수 있는 자료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병도 사단의 압력을 받은 김원룡은 이를 철회하고 말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유적 보존 정비’를 이유로 풍납토성 일대를 재발굴하여 ‘백제의 성장과정에서 3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물질문화의 요소’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3세기로 후퇴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400년을 뒷걸음질친 것이다. 과학적 역사학이라는 고고학이 실증사학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슬픈 역사·고고학의 현실이다.
경주의 나정(蘿井)과 조양동(朝陽洞) 고분과 구정동(九政洞) 고분의 발굴결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헌실증을 앞세우면서 문헌의 의미 왜곡과 자의적 해석을 일삼고 있는 식민사학보다는 고고학적 결과에 우리는 더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 고고학은 이병도 식민사학의 굴레를 벗어나서 과학적 역사학자다운 태도를 보여야 한다. 세계 고고학계의 편년에도 없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을 고고학적으로 조작하여 뒷받침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도 빼버려야 한다.
중국 홍산(紅山)문화의 발굴은 앙소(仰韶)문화와 용산(龍山)문화에 의존하던 중국의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를 매우 당황케 하고 있다. 고대사의 중심이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편년(6000∼7000년 전)은 동북아시아가 찬란한 고대문화를 형성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는 고대 조선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제 고고학과 더불어 한국사의 새로운 전개를 뒷받침하는 유물자료가 증대되고 있다. 고고 발굴자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륙사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의 주체성 확립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역사학은 현재적 정체성 찾기 작업
한국의 실증사학자에겐 주체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의 주체가 있을 뿐이다. 실증식민사학자들은 객관이나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주체 없음을 은폐하고 있다. 자국의 관점이 없는 역사학이 어찌 역사학이 될 수 있는가. 한국사는 당연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 성립되지 않듯이 주체가 없는 사학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적 입장에서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다. 역사학은 또 결코 원류를 찾는 작업이 아니다. 원류를 찾아가면 결국 모든 인류는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공동조상의 자손일 뿐이다. 역사적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재의 영토(공간)를 기준으로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혈통(시간)을 기준으로 찾는 것이다.
동북아시아를 기준으로 볼 때 중국은 대륙에 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토를 기준으로 찾을 수밖에 없고, 이주세력인 한국이나 일본은 혈통을 기준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은 영토주의 대 혈통주의의 대결임을 잘 말해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노골적으로 영토주의를 드러내고 있고, 일본은 다시 내선일체를 숨기고 군국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은 일종의 역사적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가 과거의 제국주의적 역사해석을 되풀이하는 한 절대로 아시아태평양 시대를 이끌어갈 수가 없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현대사의 흐름에서 고대 조선(朝鮮)·발해(渤海)문명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과 소명이 여기에 있다.
일제 식민지통치로 인해 삼국사나 삼국유사를 불신하고, 오늘의 삼국사나 삼국유사 같은 독자적(독립적)으로 기술된 ‘조선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나 주장을 토대로 그것이 틀리니, 맞느니 하면서 남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다. 한국의 사학을 대표하는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일본과 중국을 대변하는 기관처럼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풍납토성 발굴 모습과 출토유물. 백제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발굴 초기에는 기원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이후 3세기 정도로 추정연대가 후퇴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사대식민사학에 대항하는 길은 민족주의·대륙사관 연대를 구성하는 길이다. 민족주의·대륙사관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야 한다.
첫째 한국사가 고대 조선 때부터 만리장성 이북의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를 무대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조선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 즉 삼국사와 삼국유사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이며,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김부식의 삼국사의 사관을 유교적 사대주의로 폄하할 필요도 없고, 일연의 삼국유사의 사관을 불교적 윤색이라고 매도해서도 안 된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모든 역사적 관점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개성의 표출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사의 전개를 삼국의 바탕 위에 굳건히 두고 있지 않는가.
한사군의 위치 비정은 대륙사관의 핵과 같은 것이다. 한사군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민족사학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에서 동’(중국의 지형)으로 흐르는 강을 ‘동에서 서’(한국의 지형)로 흐르는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기록까지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중국의 역사지리서인 ‘수경(水經)’은 “패수는 낙랑(樂浪)군 누방(鏤方)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臨浿)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고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낙랑군의 위치는 중국의 1차 사료에 따르면 일관되게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 문헌들은 모두 요동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후한서(後漢西)’ ‘광무제(光武帝)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둘째 동아시아 문화와 문명의 흐름으로 볼 때 고대에서 근대 이전까지는 문화와 사람들이 대륙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흐르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중추세력은 모두 북방에서 흘러 온 세력들이고, 일본은 다시 한반도에서 2차적으로 이주한 세력들이다. 일본은 왕가의 혈통에서부터 한반도 세력과 인연을 끊을 수 없으며, 일본의 고대·중세 문화는 한국 문화가 ‘일본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조선과 고구려 강역의 한반도설은 어불성설이며, 임나일본부나 전방후원분도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역측(逆測·거꾸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나 ‘고사기(古事記)’의 사관은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려 세운, 역(逆)식민지적 방식의 정체성 찾기의 기술이다. 말하자면 식민을 당한 자가 식민을 한 것처럼 위장하고 조작하는 ‘복수의 역사학’인 것이다.
일본인의 DNA를 분석하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의 특성이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일본의 고대·중세 문화뿐 아니라 일본인의 구성이 한반도에서 이주한 세력들로서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근대에 이르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며 ‘정한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인들이 정한론을 논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만권당 제공 |
세계적인 동양미술사학자이면서 일본문화통인 존 카터 코벨(1910∼1996)은 일본의 고대문화가 모두 한국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만년에 한국 문화를 연구하다가 돌아갔다. 코벨은 일본이 한때 가야를 지배했음을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는 사실을 뒤집어놓은 것이라고 역설했다.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 교수 학설에 따르면, 가야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고 369년부터 505년까지 100년 이상 일본의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 가야를 지배한 것은 부여족이었다. 부여족들은 일본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인 360년쯤 부산 부근을 일종의 기지로서 활용한 것이다. (중략) 일본의 지배층이 된 부여족들은 부산에 일종의 분실황가로서 남겨두고 온 가야의 귀족층과 국제결혼을 했다. 일본이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그들이 한반도 남동지역 한 부분을 다스렸다고 하는 주장은 완전히 그 반대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 들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로 인해 이 사실은 매우 미묘하면서도 긴장된 사안이 되었다.”
고대에 한반도 세력의 식민지가 된 일본은 돌연 근대에 이르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하기 위해 거꾸로 고대에서부터 한반도에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것처럼 날조하는 심리적 도착·자기 속임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고대사 열등 콤플렉스’는 돌연 ‘근대사 우월 콤플렉스’로 반전되어 정한론(征韓論·일본이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임나일본부는 고대사 전체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역사왜곡이다. 근대의 일본 문화는 ‘신격화된 일왕’을 숭배하는 신도(神道)와 사무라이 전통이 통합된, 일본 특유의 군국주의적 색채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첨병 노릇을 했다. 조선사편수회의 야유회 모습. 만권당 제공 |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딴 역사학자들과 수시로 일본의 연구소를 들락거리면서 연구를 해온 실증사학자들은 완전히 일본의 주구가 되어 돌아온다. 일종의 먹이연쇄인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만이 역사학인 줄 안다. 그러니 한국의 주체적인 사관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도 없다.
예컨대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측정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400년이나 늦추어졌다. 2000년 10월까지 수습된 목탄, 목재, 토기 등 13점에 대한 방사성동위원소 측정을 한 결과 서기전 199년에서 서기 231년으로 나타났다. 이 유적을 처음 발굴한 고고학자 김원룡은 당시 이 유적을 서기전 1세기부터 공주 천도 시까지 500년간의 유적으로 보았다. 이것은 일본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불식시킬 수 있는 자료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병도 사단의 압력을 받은 김원룡은 이를 철회하고 말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유적 보존 정비’를 이유로 풍납토성 일대를 재발굴하여 ‘백제의 성장과정에서 3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물질문화의 요소’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3세기로 후퇴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400년을 뒷걸음질친 것이다. 과학적 역사학이라는 고고학이 실증사학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슬픈 역사·고고학의 현실이다.
경주의 나정(蘿井)과 조양동(朝陽洞) 고분과 구정동(九政洞) 고분의 발굴결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헌실증을 앞세우면서 문헌의 의미 왜곡과 자의적 해석을 일삼고 있는 식민사학보다는 고고학적 결과에 우리는 더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국 고고학은 이병도 식민사학의 굴레를 벗어나서 과학적 역사학자다운 태도를 보여야 한다. 세계 고고학계의 편년에도 없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을 고고학적으로 조작하여 뒷받침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도 빼버려야 한다.
중국 홍산(紅山)문화의 발굴은 앙소(仰韶)문화와 용산(龍山)문화에 의존하던 중국의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를 매우 당황케 하고 있다. 고대사의 중심이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편년(6000∼7000년 전)은 동북아시아가 찬란한 고대문화를 형성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는 고대 조선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제 고고학과 더불어 한국사의 새로운 전개를 뒷받침하는 유물자료가 증대되고 있다. 고고 발굴자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륙사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의 주체성 확립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