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2일 일요일

페북 친구로 스며들어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네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그 남자의 유혹법

이제 서른다섯이다. 그리고 이혼녀다. 결혼하면 행복하게 나머지 인생이 살아질 줄 알았던 H의 믿음은 오래전에 깨졌다. 더이상 젊지 않은 나이를 생각하면, 이혼은 선뜻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이별은 시끌벅적 다가왔으나 조용히 마감되었다. 남편은 자신의 짐을 싣고 떠났다. 옷장에 빈 공간이 생겼고 아파트에 남은 사람은 그녀 혼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후 그 남자를 만난다.
“너 정말 선수 같아, 이건 당황스럽잖아”
그를 처음 알게 된 곳은 페이스북이었다. 1년 전이었다. 친구들끼리만 오가던 그녀의 계정에 낯선 남자가 친구신청을 해왔다. 친구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단정하면서도 선이 굵은 외모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올라온 사진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숱 많은 20년 전 모습을 올려놓은 민머리 중년도 있었고 인터넷 쇼핑몰 모델 사진을 자기 얼굴인 양 올려놓은 여인도 있었다. 페이스북의 페이스는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의 목소리와 같았다. 사람들을 유인하여 바다에 빠뜨리는. 실체는 알 수 없으나, 듣기에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보기에 아름다운 페이스들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세이렌의 전설처럼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되 인간이 아닌 것의 몸을 하고 있을지. 그래도 호기심을 억누르진 못했다. 그의 담벼락에 들어가 게시물을 훑어봤다. 용모만큼 절제된 삶을 사는 남자처럼 보였다. 싱글이고 혼자 하는 운동을 즐기고 조용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과장되지 않고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투가 맘에 들었다. 허세 없는 진중함도 느껴졌다. 직업을 확실히 밝힌 점도 좋았다. 직장 동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끔씩 친구 담벼락에서 댓글로만 접하는 그의 모습은 정중하고 예의발랐다. 클릭, 단 한번에 그와 그녀는 ‘친구’를 맺었다.
둘 사이에 감도는 것은 침묵이었지만, 매번 그녀가 올리는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그의 반응은 H를 뿌듯하게 했다. 그가 올리는 글에도 그녀 역시 ‘좋아요’로 답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그들은 서로의 글에 댓글도 달기 시작했고 대화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까지 이어졌다. 한동안은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친밀감은 증폭되었다. 잔잔한 파문처럼. 어느 날이었을까. 그들의 문자가 끊이지 않고 십여분가량 이어졌다. 그의 교통사고 소식에 그녀가 조금 걱정을 했고 그는 별일 아니라며 오히려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감기로 고생 중이라고 그러셨잖아요. 괜찮으세요.
한번쯤은 만나보고도 싶었지만 둘 다 조심스러웠다. 온라인상으로는 이제 1년째 친구였고 나이가 같다는 것을 알고 얼마 전부터 말을 놓기로도 했다. 몇년 전 이혼한 경험이 있는 이혼선배로서 그의 조언을 듣기도 했다. 다가오는 속도는 조금 느린 편이었지만, H로서는 그 정도가 적당했다. 그녀의 반응을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고 과다한 호감을 표시하는 일도 없었다. 어쩌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직후는 아니지만 한시간 이내에는 꼬박꼬박 답변이 왔다. 그 역시 가끔 안부를 묻는 인사를 전해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 소식을 주고받게 된 친절한 대학 친구 느낌이었다. 감정적으로 위태로운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만나자는 이야기를 서로 꺼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구체적 약속 잡기를 미뤄두었을 뿐. 전화 통화는 몇차례 오고 갔다. 낮고 울림이 맑은 목소리였다. 첫 통화부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H야. 의외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전남편이 아닌 남자로부터 불리는 자신의 이름은 오랜만이었다. 통화를 오래 끌지는 않았다. 그들이 주고받은 메시지도 장시간 이어지는 일은 없었듯이. 피와 살로 직접 마주하기 전에 미리 가까워지는 일은 두려웠다. 펜팔의 쓰라린 경험은 물론이고 인터넷 동호회에서 전남편을 만난 이후, 문자와 목소리로 주고받는 소통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보기도 전에 몸집을 불린 환상은, 실체를 마주하면 부푼 풍선처럼 터져버리기 마련이었다. 운 좋게 첫 대면에서 좋은 인상을 받게 될지라도, 오래 쌓아두었던 흥분은 시야를 가려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덕분에 사랑에 더 빨리, 가파르게 빠져들었다. 문제는 그렇게 굴러들어간 곳이 낯선 장소라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심어준 미망에 보기 좋게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안다고 믿었던 그 남자는 그곳에 없었다. 너무 쉽게 운명을 믿었다. 그녀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는 생각지도 않고, 오래도록 찾아온 반쪽답게 그녀를 속속들이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난다.
정오를 조금 넘겨 그녀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으로 그가 찾아왔다. 거의 다 왔다는 소식에 미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건너편에 지나가던 차가 유턴을 했다. 반쯤 내려간 검은 차창 너머로 그의 옆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본 옆모습인데도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깔끔하고 정돈된 스타일에 안심이 되었다. 사실 그가 미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있기에 기분 좋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의 차에 올랐다.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새 남자를 마주하자 숨이 조금 가빠졌다. 건강하고 혈색 좋은 얼굴, 밝은 미소, 안정적인 자세. 여자들도 남자를 처음 볼 때 재빨리 스캔하는 것들이 있다. 신체적 장점과 단점 역시 눈에 들어온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다룰 줄 아느냐에 따라 호감도가 달라진다. 잘 맞는 옷을 입듯,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은 남자였다. 인사를 나누었다. 직접 듣는 목소리에는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차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낯선 남자의 페북 친구신청
좋아요, 댓글, 문자, 통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감각적으로 다가와버린 그

식당에서, 초콜릿 가게에서
능숙한 배려와 손길의 여운
엄청난 훈련과 계산의 결과?
그렇다 하여 나쁠 게 있으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식당으로 안내하는 모습도, 새우 요리가 나오자마자 익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겨 그녀 앞에 놓아주는 모습도. 경계등이 발동했지만, 그는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양 여유로웠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그녀의 맨팔에 살짝 올라갔던 그의 손길은 여운을 남겼다. 그녀를 슬며시 이끌어 구석 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었을 때,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슬쩍 미소가 오갔지만 이내 눈을 돌렸다. 식당부터 카페까지, 그는 마음에 두고 온 곳이 있는 듯했지만, 그녀에게 먼저 의사를 묻는 일은 잊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는 그녀가 좋아한다던 초콜릿 가게에 들러 박스 하나를 사서 전해주기도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매끄러웠다. 눌러도 자꾸 고개를 드는 의심이 더 뻣뻣이 등을 곧추세웠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긴장을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의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지 몰랐다. 그는 솔직했고 다정했다. 미심쩍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이야기 중간중간 그의 일상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덧붙였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줄도 알았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엄청난 훈련과 계산의 결과일지. 그렇지만 그게 왜 나쁠까. 그녀는 어쨌든 그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고 편안했다. 그들 사이를 오가는 설렘은 간만에 부는 미풍처럼 간지러웠다. 이혼한 지 몇달이 지났을 뿐이다. 벌써부터 고민하고 방어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라도 심적 안정과 균형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았고, 그는 그 기대를 웃도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여자는 부록을 좋아한다
카페를 나와 그녀의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가는 차 안, 화장실에 다녀온 뒤 씻은 손이 건조했다. 가방에서 로션을 찾아 바르는데 그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나도 좀 줄래?”
잠시 멈칫했다가 그의 손에 손톱만큼 얹어줬다. 그는 운전 중이었고 그녀에게 내민 팔을 아직 거두지 않았다.
“발라줘.”
도대체 이 사람은 뭐지?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너, 정말 선수 같아. 이런 건 좀 당황스럽잖아.”
그는 금세 팔을 거두었고 이내 도착한 아파트 정문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녀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의문을 거두고 돌아가고 싶었다. 차 시동을 끄고 창문을 조금 연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만나자고 말하기까지 몇달이 걸렸잖아. 오기 전까지 정말 망설였고 또 두려웠어. 나는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야. 회사에서 발표를 할 때에도 직전까지 얼마나 많은 리허설을 혼자 하는지 몰라. 너를 데리러 올 때까지 수없이 다짐했어. 너는 내 여자친구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이미 몇달은 만난 사람처럼 여유롭게 대하자고.”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아니, 적어도 그 순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아직 남아 있는 로션을 제 손으로 펼쳤다. 그의 손 구석구석까지 스며들 수 있도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감각적으로. 그가 다가왔던 방식대로 그렇게.
유혹은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있을 때 더 강력하게 다가올 수 있다. 조금 더 느리고 답답할지라도. 신중함이 배려를 입을 때, 마음은 더 쉽게 열린다. 물론 적절한 감각의 자극은 필요하다. 청각으로, 시각으로, 후각과 미각으로 그리고 촉각으로 이어지는 자극은 몸을 열리게 한다. 한 방의 도발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조금 간지러운 설명도 부록으로 넣어주길. 여자는 부록을 좋아한다.
이서희
이서희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기사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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