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익명의 기부자가 부산 해운대구 반송2동 주민센터 앞에 놓고 간 동전이 가득 든 종이상자 2개. 2005년부터 이어진 선행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뤄졌다. 반송2동 주민센터 제공
24일 부산 해운대구 반송2동 주민센터. 평범한 차림의 남성 2명이 종이상자를 하나씩 들고 와 민원대에 놓고는 아무런 말 없이 그대로 빠져나갔다. 이들이 남기고 간 상자에는 10원, 100원, 500원짜리 동전 1만2000여 개와 함께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구겨지고 녹슬고 때 묻은 돈일지라도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식한 사람이라 말도 글도 표현 못 하지만 적은 돈 죄송’이라는 내용이었다.
주민센터 직원들이 황급히 이들을 따라 나갔지만 두 사람은 총총히 차를 타고 사라졌다.
선행의 주인공들은 이 지역에서 ‘동전 천사’로 불린다. 2005년부터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후가 되면 반송2동 주민센터에 나타나 동전이 가득 담긴 큰 플라스틱 저금통이나 종이상자를 센터에 두고 급하게 사라진다. 지난해 12월 23일에는 동전 115만5340원이 든 박스를 두고는 일하던 직원의 어깨를 두 번 톡톡 치면서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리킨 뒤 사라졌다.
동전 천사가 올해 남기고 간 동전은 99만610원이었다. 일부러 동전으로 바꾼 게 아니라 꾸준히 모은 것으로 보여 한 해 동안 기부를 위해 매일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조금씩 모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전 천사가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1300여만 원에 이른다. 주민센터는 동전을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매년 기탁하고 있다.
이승용 반송2동 동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동전 천사가 매년 어김없이 찾아와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내년에도, 후년에도 센터를 찾아 온기를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가 없이 남에게 1만 원짜리 한 장 쓰기 쉽지 않은 세상. 동전 천사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한 기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는 얼굴 없는 천사들을 찾아봤다.
▼ “배고픈 사람 없어야죠”… 현금-과일-쌀 몰래 두고 가 ▼
이달 2일 아침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2동 주민센터에 쌀 10kg짜리 10포대와 라면 10상자가 도착했다. 인근 농협 하나로클럽에서 50, 6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구입한 뒤 주민센터로 배달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선행은 올해로 10년째다. 정호형 용암2동장은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2011년부터지만 이전 근무자들로부터 2006년부터 같은 분이 비슷한 기탁을 해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실제 이분의 선행은 10년 정도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해마다 설과 추석, 연말에 쌀과 라면을 보내고 있다. 얼굴은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 인근 마트에 의뢰해 쌀, 라면 등을 주민센터로 배달한다.
‘동네 주민인 것 같다’는 심증이 생기면서 직원들이 누군지 파악하기 위해 한때 그를 찾으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냥 어려운 사람들한테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거듭 밝혀 직원들도 더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광주 광산구 하남동 주민센터에도 2011년부터 설, 추석 명절 때마다 과일과 쌀을 주민센터 주차장에 놓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가 있다. 이 기부자는 과일, 쌀을 가져다 놓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자필 메모를 남긴다.
올해 추석을 앞둔 9월 23일에는 사과 50박스(한 박스 5kg)를 갖다 놓았다. 궁금한 마음에 주민센터 직원들이 폐쇄회로(CC)TV를 돌려봤더니 전날 오후 11시경 낡은 봉고차 한 대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모습이 찍혔다. 하지만CCTV의 해상도가 낮아 차량 번호와 운전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남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그분은 건물에 불이 켜져 있으면 오지 않는다”며 “1, 2년 전 우연히 한 직원이 주차장에서 익명의 기부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만났지만 ‘물품 배달 부탁을 받은 직원’이라고 말하며 황급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키다리 아저씨, 쌀 아저씨… “모든 걸 나눕니다”
얼굴 없는 기부천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가진 많은 부분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돈이 많건 적건 ‘우선 나눈다’는 것이 이들의 철칙이다.
지난달 30일 경남 합천군 합천읍 동서로 66-1에 있는 우체통에서 우편물을 수거하던 우체부는 현금 40만 원과 손으로 쓴 쪽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라도 줄 수 있을지. 너무 적은 금액입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충남 보령시에도 이달 7일 한 노부부가 주민센터를 찾아와 돼지저금통과 플라스틱통 2개를 전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통 세 개 안에는 97만 원이 들어 있었다.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는 20대 여성이 전화를 걸어와 “기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문의한 뒤 모금회 계좌로 1400만 원을 보내왔다. “오빠(30대)와 함께 3년간 용돈에서 조금씩 모아 한 통장에 매달 저축해 왔는데, 어려운 이웃이 많다는 뉴스를 보고 그동안 모은 1400만 원을 오빠와 상의해서 기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인적사항 등을 물었지만 이 여성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자신을 알리기를 거부했다.
나누는 일이라면 국적도 상관이 없다. 경기공동모금회가 경기 성남시에서 실시간 유선방송을 통해 모금을 진행하는 중에 30대 베트남 여성이 모금함에 봉투를 넣는 장면이 목격됐다.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됐다고 밝힌 이 여성은 “나도 못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도 어려운 이웃들이 있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었다”고 말했다.
23일 오후 4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근처 식당에 있으니 잠깐 나와서 돈 받아 가이소!” 매년 이맘때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는 모금회 직원에게 근처 식당으로 잠깐 나와 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김미정 모금사업팀장이 급히 식당을 찾았다. 낯익은 60대 남성이 그를 반겼다. 지인과 식사하던 그는 “이거 받으이소”라며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 속에는 수표와 접힌 광고 전단이 들어 있었다. 수표에 인쇄된 금액은 1억20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전단 뒷면에는 “꼭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대구공동모금회 직원들은 그를 동화 속에 나오는 익명의 후원자에 빗대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첫 기부는 2012년 1월 1억 원부터 시작됐다. 같은 해 12월에는 모금회 사무실 근처 국밥집에서 1억2300만 원, 2013년 12월에도 1억2400만 원을 전달했다. 올해까지 키다리 아저씨가 낸 성금은 총 5억9000여만 원. 하지만 그의 부탁에 따라 모금회 직원들은 이름이나 주소를 절대 밝히지 않고 있다. 오죽하면 수표를 통해 신원이 드러날까 정확한 액수도 공개하지 않는다.
기부를 위해 아예 ‘투잡(two job)’으로 일한 기부자도 있다. 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올해 7월 28일 익명의 기부자가 현금 1억 원을 송금했다. 정년퇴직한 60대 소방공무원으로 추정되는 이 기부자는 쉬는 날(비번일)마다 폐지와 고철을 수집해 팔았다고 했다. 이렇게 20년간 땀 흘려 번 현금 1억 원을 남을 위해 내놓았다.
“내 고향, 우리 동네에 눈물 흘리는 이웃 없기를…”
얼굴 없는 기부천사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향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배고프고 아픈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도 11년째 나타나는 얼굴 없는 천사가 있다. 그는 고향의 지인을 통해 2005년부터 매년 설과 추석 명절 때마다 10kg짜리 500포대의 쌀을 보내고 있다. 매번 300포대를 보내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 주다 보면 쌀이 좀 모자라더라”라는 읍사무소 측의 얘기를 지인을 통해 전해 들은 뒤 지난해 추석부터는 500포대를 보내기 시작했다. 돈으로 따지면 매번 1000만 원이 넘는다.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대리인이 주문하고 송금해 누군지는 모른지만 어린 시절 고향에서 어렵게 살다 출향해 수도권에서 건설 관련 회사를 운영하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읍사무소 측은 이 쌀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었다.
강원 원주시 연세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는 환자 수백 명에게 사랑을 나눠 준 50대 여성이 있다. 2009년 9월 28일 오전 처음 병원을 방문한 이 여성은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희귀 난치성 질환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1억 원짜리 수표를 꺼내 놓았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잘 살아오신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었다”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그의 기부는 2012년까지 4년 연속 이어져 총 6억5000만 원을 기부했다. 난치성 질환 어린이, 노숙인 환자, 병원비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환자 가족 등 수백 명에게 사랑의 온기가 전해졌다. 직원들은 ‘VIP 건강검진권’을 준비해 놓았다가 주려고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차라리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최근 전북대에는 오랫동안 대학에 재직하고 퇴임한 한 명예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 본부장의 손을 이끌고 은행으로 간 기부자는, 그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을 찾아 대학 발전기금으로 전액 기탁했다. 기부자는 “학업에 뜻이 있으면서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며 자신을 절대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몰래 기부하는 이유는
기부는 남을 위한 이타주의에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싶은, 선한 인간의 마음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혹자는 “기부는 결국 자기만족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한다. “착한 일 하네”, “좋은 사람(또는 기업)”이라는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 아니냐는 것이다. 일부 기업의 경우 세제 혜택이나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해 기부를 한다. 널리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외국에서도 인간의 본성에 거스르는 ‘몰래 기부’의 이유를 궁금해했다. 2012년 9월 경제잡지 포브스는 ‘왜 기부할 때 익명으로 할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우선 “부자라는 것이 세상에 공표되면 자녀가 납치된다든지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접근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분석했다.
또 엄청난 부자들은 기부한 뒤 처할 수 있는 나쁜 상황을 예상한다는 것. A라는 단체에 좋은 마음으로 기부를 한 뒤, 이 사실을 접한 다른 단체들로부터 “왜 우리 단체에는 기부를 하지 않느냐”고 끊임없이 기부 요청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1년 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센터가 자선단체 관련자 563명의 설문 내용을 바탕으로 조사해 보니, 익명 기부자의 50.6%는 ‘다른 단체들로부터의 요청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이 기부 사실을 알리는 것은 양날의 칼처럼 위험하다. 가수 김장훈 씨는 본인은 월세를 살면서 100억 원 넘는 기부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자기 앞가림이 더 급해 보인다”는 등의 일부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몰래 선행을 베풀다 우연히 알려진 배우 문근영 씨도 칭찬의 말을 많이 들었지만 “훨씬 많이 벌었으니 한 것 아니겠느냐” “익명으로 계속하지 홍보를 위해 알린 것이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선의에서 시작한 일인데도 이름을 밝히는 순간, 갑자기 평가의 대상이 된다.
단순히 이런 이유만으로 몰래 한 선행을 전부 설명할 순 없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1954년 발표한 ‘매슬로의 욕구 5단계’는 인간의 욕구를 다양하게 나눠 설명한다. 생리적 욕구(1단계), 안전에 대한 욕구(2단계), 사회적 욕구(3단계)가 성취되면 사람은 자존과 존엄성 욕구(4단계)를 갖게 된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단계가 이때다. 그러나 이 단계마저 뛰어넘은 사람은 ‘자아실현의 욕구’(5단계)를 추구한다는 것이 매슬로의 설명이었다. 내 이름이 알려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스스로 목표를 이룬 것에 만족하는 단계다.
“다른 사람들의 기부 액수보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 때 사람들은 익명을 택한다”는 설명도 있다. 진화생물학자인 니콜라 라이하니는 2014년 1월 학술저널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발표한 글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기부가 남들과 비교당하는 것을 꺼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내 36개 자선단체에 기부한 기부 사례 3945건을 분석했는데 평균 기부액수는 33달러(약 3만5000원)였다. 기부자 중 5%는 익명으로 기부를 했는데 이들이 기부한 액수는 평균보다 소액이거나 고액이었다는 것. ‘너무 적은 돈이어서 이름을 내놓기 쑥스럽다’고 생각했거나 ‘많이 낸다고 생색내는 걸로 보이진 않을까’ 식으로 사회적 비난을 두려워한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름을 알리든, 알리지 않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기부는 따뜻한 불씨가 된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아니 나보다 더 어려운 것 같은데도 자신의 모든 것을 쪼개 남에게 나누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준다. 전선(電線)처럼 사랑을 전파한다.
올겨울에는 이런 기부 천사들이 더 많이 올까. 웅크린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 위로, 온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새하얀 눈처럼.
<기사 출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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