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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6일 화요일

노벨상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 12가지

투유유(85·여) 중국전통의학연구원 교수를 포함한 3명이 지난 5일(현지시간) 말라리아 치료법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2015년 노벨상 시즌의 막이 올랐다. 노벨위원회는 6일 물리학상, 7일 화학상, 9일 평화상, 12일 경제학상 수상자를 잇달아 발표할 예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매년 10월 둘째 주 목요일에 발표해 온 관례에 따라 8일 공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대중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기존 수상자들의 발언 등을 참고해 1901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한 노벨상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12가지를 다음과 같이 추렸다.

1. 정제된 소감 : 수상자들은 연말에 진행되는 노벨 시상식과 만찬에서 즉흥적으로 소감을 밝힐 수 없다. 2013년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랜디 셰크먼은 자신의 소감을 스웨덴어로 번역하기 24시간 전에 노벨재단에 미리 제출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2. 옥중 수상 : 감옥에서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사람은 지금껏 3명이 있었고, 모두 평화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평화운동가이자 작가인 카를 폰 오시츠키(1935년 수상),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1991년 수상), 중국의 인권운동가 류 샤오보(2010년 수상)가 그 주인공들이다.

3. 노벨상 메달의 가치는? :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 레온 레더만은 올 초 요양비를 마련하기 위해 메달을 경매에 내놨다. 경매업체 측은 경매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76만5000달러(약 9억원)에 팔렸다고만 밝혔다. 노벨상 수상자 생존시에 팔린 노벨상 메달은 이를 포함해 모두 3개다.

4. 팔렸다가 다시 돌아온 메달 : 러시아 재벌 알리셰르 우스마노프는 지난해 제임스 왓슨의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 메달을 475만달러(약 53억원)에 샀다가 되돌려줬다. 우스마노프는 “업적을 기리는 상은 원래 주인에게 있어야 한다”면서 자신이 낸 돈이 연구자금으로 쓰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암으로 부친을 잃은 우스마노프는 암 치료 연구에 밑거름을 제공한 왓슨을 도우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 성가신 보안 검색 : 201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브라이언 슈미트는 노벨상 메달을 갖고 비행기를 탔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할머니를 뵙기 위해 미국 네브래스카주 파고에 도착했는데, 그의 소지품 중에서 수상한 물건을 발견한 검색요원이 그를 막아선 것. “가방 안 박스에 든 게 뭡니까?” “큰 금메달이에요.” 결국 슈미트는 박스를 열어 메달을 보여줬다. “뭘로 만들어진 겁니까?” “금입니다.” “어디서 난 거죠?” “스웨덴 국왕한테 받았습니다.” “왜 스웨덴 국왕이 당신한테 이걸 줬나요?” “우주의 팽창 가속도를 발견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죠.” 대화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슈미트는 이 메달이 노벨상임을 설명하고 나서야 검색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슈미트는 “노벨상을 어디론가 갖고 가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파고에 도착해 엑스레이 머신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말했다.

6. 수상자들은 ‘한물 갔다’? : 노벨상 수상자 평균 나이는 59세다. 2007년 노벨경제학상(엄밀히 따지면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은행 경제학상’이다)을 받은 레오니드 후르비츠가 당시 90세로 역대 최고령 수상자였다. 지난해 17세 나이로 평화상을 받은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최연소 수상자다.

7. 내 돈은 어디 있소? : 아돌프 히틀러 전 독일 총통은 1937년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다. 반체제 평화운동가인 카를 폰 오시츠키가 평화상을 수상한 것에 격노해서다. 이 때문에 리하르트 쿤(1938년 화학상),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생리의학상) 3명은 수상자로 선정이 되고도 상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상과 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금은 주어지지 않았다.

8. 시작은 험난했다 : 1895년 11월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마지막 유언장에 서명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재산 대부분을 노벨상 제정·유지에 쓰라는 내용이었다. 노벨은 1년 뒤 죽었으나 유언은 즉각 집행되지 못했다. 우선 유족들이 반대했고, 스웨덴 내부에서는 ‘국적에 관계 없이 최고의 공로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국부 유출’이라는 논란이 벌어졌다. 노벨이 지명한 수상 위원회도 그의 유지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뒤인 1901년에서야 노벨상 시상이 시작됐다.

9. 두 번째는 달라요 : ‘트랜지스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학자 존 바딘은 1956년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으나, 가족을 고향에 남겨둔 채 시상식에 홀로 참석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영상 에디터에 따르면 그는 아들들에게 “학교 빼먹지 말고 시험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스웨덴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스웨덴 국왕은 시상식에서 바딘을 크게 나무랐다. 바딘은 “다음 번에는 꼭 가족을 데려오겠습니다”라고 약속해야만 했다. 허언처럼 여겨졌던 이 말은 나중에 현실이 됐다. 바딘이 1972년 또다시 노벨상을 받게 되면서 역사상 세 번째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이 된 것. 바딘은 두 번째 시상식 때는 가족을 모두 데려왔다고 한다.

10. 사후 수상 : 노벨재단은 1970년 ‘죽은 이에게는 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결정했다. 그 전에는 상이 추서된 경우가 두 번 있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2011년 랠프 스타인먼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한 이후에야 그가 숨진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발표 사흘 전에 사망한 것이다. 위원회는 고심 끝에 수상 결정을 철회하지 않기로 했다.

11. 업적과 수상 사이 :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공로를 세운 시점과 실제 상을 수상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있다.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0년에서 30년 정도 차이가 난다. 1910년대 초반 종양 유발 바이러스를 발견한 페이튼 라이스는 50년여가 지난 뒤에야 그 업적을 인정받아 1966년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반면에 양천닝과 리정다오는 1956년 패리티법칙에 관한 연구 업적을 세운지 1년 만인 1957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2. 자기 홍보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 지금껏 152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기고를 한 적이 있다. 이들이 이 잡지에 쓴 글은 모두 246건에 달한다.
<기사 출처 : 세계일보>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겉도는 해외석학 초빙] 특강 2~3번에 연봉 2억 ‘노벨상 교수님’


#1. 국내 S대 A교수는 얼마 전 해외 학회에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외국인 교수들이 대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을 해 왔기 때문이다. 몇몇 교수들이 “한국 대학에 초빙교수나 석좌교수로 갈 수 있게 다리를 놔달라”고 했다. 외국인 교수에 대한 금전적 처우는 좋지만 강의 부담은 크지 않은 한국 대학에서 연구년 개념으로 쉬면서 일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A교수는 기자에게 “한국 정부나 대학들이 목적의식 없이 외국인 교수들을 경쟁하듯 초빙하고 있는 사실이 외국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2. 한 학회 실무자 B씨는 최근 개최했던 국제포럼만 생각하면 넌더리가 난다. 무조건 노벨상 수상자를 섭외해 초청하라는 지시에 골머리를 앓았다. B씨는 “노벨상 수상자만 모셔 오면 학회 홍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그러다 보니 현재 학문 추세와 상관없이 거액을 들여서라도 수상자를 데려오라는 식의 주문이 포럼 때마다 되풀이된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예산 문제로 노벨상 수상자 초빙이 무산됐지만 다음 행사 때는 또 닦달할 것”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해외 석학들을 앞다퉈 국내에 불러오고 있지만 겉만 요란할 뿐 실속은 못 차리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고액을 들여 외국인 학자를 초빙하고도 홍보를 위한 ‘얼굴마담’이나 각종 평가지표의 국제화 부문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당초 외국인 연구자를 초빙하려고 했던 초심(初心)이 퇴색했다는 목소리도 학계 안팎에서 커지고 있다.

21일 교육부 등에 따르면 2002년 1454명이었던 국내 외국인 교수 영입 규모는 2007년 2919명으로 두 배가 됐고, 2013년 613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지난해 6034명으로 소폭 감소한 데 이어 올해에도 9월 현재 5961명으로 줄었다.

국내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외국인 교수 1인당 투자하는 비용은 1년에 1억~2억원선이다. 주요 타깃은 노벨상 수상자이지만 실제 유치한 사례는 10명 안팎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해외 저명 연구자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을 주로 석좌 혹은 석학교수, 초빙교수 등으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들도 대부분 1년에 3~4차례 혹은 한번에 1주일 정도 국내에 체류하며 2~3번 특강을 하는 수준에 그친다.

201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거론됐던 그래핀 분야의 석학 김필립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2012년 3월 서울대 초빙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김 교수는 하지만 공동연구나 대학원생 지도는 하지 않고 한 학기에 한 번씩 1년에 두 차례 서울대 특강만 진행할 뿐이다.

외국인 석학에게는 일반적으로 기본 연봉에다 방한 시 여행 경비와 국내 체재비가 제공된다. 연간 유지 비용은 1억~2억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한 과학계 인사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경우는 수상 시기나 연구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국내 체류 중 1회 강연에 5000~1만 달러 안팎의 강연비를 받는다”고 전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대학들이나 연구기관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얻겠다는 사전 계획이 없이 해외 석학들을 데리고 오기 때문에 비싼 돈만 주고 아무런 효과가 없는 특강이나 몇 번 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연구 능력이나 국내 적응 등의 여건을 고민하지 않고 초빙 자체를 목적으로 하다 보니 중도에 떠나는 외국인 연구자도 속출한다. 건국대는 2009년 당시 19세였던 알리아 사버 박사를 공대 신소재융합학과 외국인 전임교수로 채용하면서 ‘최연소 교수로 기네스북 기록을 갈아치웠고 국내 연구에도 활력을 줄 것’이라고 대대적 홍보를 했다. 하지만 사버 박사는 정규 강의가 아닌 특강만 하다 한 학기 만에 되돌아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았다. 서남표 전 카이스트(KAIST) 총장은 “한국 대학의 경우 총장은 학교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부, 특히 외국에서 총장을 데려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며 “이런 사회적 폐쇄성은 대학이나 정부가 해외 석학을 데려오고 정착시키는 데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외국인 연구자들의 유치 실패는 한국식 연구 시스템의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연구 풍토에서 장기적 연구 내용보다는 단기적인 논문 생산 편수를 따지고, 연구자들에게 행정 업무까지 떠안기는 현실이 해외 우수 인재들을 중도에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설명이다.
<기사 출처 :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