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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 금요일

뚜레쥬르, 디자인 표절 논란…英삽화작가 항의에 사과


표절 논란을 빚고 있는 뚜레쥬르 크리스마스 홍보물, 제품 디자인(오른쪽)과 원작 영국 작가 짐 필드 작품(왼쪽). (출처 네이버카페 '디젤매니아')
CJ그룹 계열사 CJ푸드빌이 운영하는 제과점 뚜레쥬르가 또 디자인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영국의 삽화 작가 짐 필드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자신의 트위터에 "어떻게 하면 이 골칫거리 인간들(뚜레쥬르)이 내 작품의 잘못된 버전(모방판)을 담은 케이크를 팔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이와 함께 디자인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뚜레쥬르의 크리스마스 홍보물, 크리스마스 케이크 포장 사진과 자신의 삽화 작품을 함께 올렸다.

뚜레쥬르 크리스마스 디자인의 핵심인 산타클로스, 다람쥐 등의 이미지가 짐 필드의 작품과 거의 같다는 게 짐 필드와 누리꾼들의 지적이다.

짐 필드가 모방 논란을 인지한 것도 국내 한 누리꾼이 짐 필드에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전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뚜레쥬르의 디자인 표절에 항의하는 내용을 담은 영국 삽화작가 짐 필드 SNS 화면
이에 대해 뚜레쥬르는 지난달 31일 뒤늦게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띄우고 "해당 홍보물과 게시물을 철수했다"며 "앞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뚜레쥬르 관계자는 "디자인 팀에서 해당 작가에게 문의를 하지 않은 채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 같다"며 "현재 작가와 연락해 보상 등을 협의 중"이라고 전했다.

뚜레쥬르는 지난 2009년에도 제품 포장 등에 사용한 피겨선수 김연아의 이미지가 국내 한 작가의 작품을 무단 도용한 것이라는 의혹과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기사 출처 : 연합뉴스>

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1학생 1악기' 위해 초·중교 1000곳에 바이올린 1만5천대 지원

서울 광진구 신양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지난 7월 오케스트라 악기체험을 하고 있다./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교육부, 학교체육·예술교육 강화…수영 실기교육 초등학교 3~6학년으로 확대

학생들이 누구나 악기 하나씩은 다룰 수 있게 하기 위해 전국 초·중학교 1000곳에 바이올린 1만5000대가 지원된다. 또 초등학생 수영 실기교육이 3~6학년으로 확대된다.

교육부는 17일 이런 내용을 담은 '학교체육·예술교육 강화 지원계획'을 발표했다. 학생들이 누구나 1스포츠 1예술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학교스포츠클럽과 수영실기교육을 확대하고 1학생 1악기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우선 학교예술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63억원을 투입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1000곳에 악기를 지원한다. 1학생 1악기교육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올 하반기에 9개 교육청을 대상으로 바이올린 1만5000대를 우선 지원한다. 교육부는 내년부터 바이올린 외에도 악기 종류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1학생 1스포츠 활동을 위해 교내 학교스포츠클럽대회 운영 시범학교를 새로 200곳 지정한다. 또 기존의 우수 학교스포츠클럽 4500팀 외에 300팀을 추가로 지원할 계획이다. 신체활동이 적은 여학생과 고등학생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200팀을 우선 지원하고 나머지 100팀은 초·중학교를 지원한다. 여학생들의 학교스포츠클럽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학교스포츠클럽리그에 여학생 종목을 5개 이상으로 늘릴 예정이다. 

현재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수영실기 교육도 2018년까지 3~6학년으로 확대한다. 이를 위해 전국에 4곳 있는 초등학교 수영장을 내년에는 6곳으로 늘리기로 했다. 시·도 공영수영장과 연계해 추진할 계획이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학생들이 체육과 예술 활동을 만끽하며 얻은 성공과 성취의 경험이 행복한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기사 출처 : 뉴스1>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콩쿠르 1점 준 심사위원?… 괜찮아요, 그 의견 존중해요"

[파리 독주회 성공리에 마친 '21세 쇼팽' 조성진 인터뷰]
내년 연주만 60회… 3배 늘어… 하루에 잠 4~5시간 '강행군'
"피아노 앞에선 피곤 사라져… 연주 여행이 제겐 휴가예요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로 제 이름 올라있는 게 신기"
파리 독주회 다음 날인 8일 오후(현지 시각) 루브르박물관 옆 카페에서 만난 조성진. /파리=김경은 기자
피아노에서 손을 내려놓자 기립 박수가 시작됐다. 7일 밤 10시 30분(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의 콘서트장 살 가보. 조성진(21)이 앙코르를 위해 무대로 걸어나오자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9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브라보!'를 외쳤다. 파리 시민 엘렌 카디외(48)씨는 "오늘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은 연주는 드물었다"고 했다.
조성진에겐 이날이 파리에서의 첫 독주회였다. 티켓은 일찌감치 동났고 겨우 남아 있던 3층 시야장애석 세 자리는 한 시간 먼저 달려온 현지 관객들이 낚아챘다. 오후 8시 30분. 조성진은 쇼팽의 '녹턴 작품 48'로 문을 열었다. 쇼팽 콩쿠르 본선 무대를 압축한 프로그램이었다. '소나타 2번'은 느슨하게 풀어주다가 한꺼번에 잡아당기는 타건(打鍵) 으로 긴장감을 살렸고, '24개의 전주곡'으로 황홀과 비감의 깊이를 더했다. 앙코르는 콩쿠르에서 '최고 연주상'을 안겨준 '폴로네즈 작품 53' '녹턴', 그리고 "쇼팽 아닌 걸 치고 싶어 도전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로 장식했다.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로 돌아온 그를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의 스승 미셸 베로프가 얼싸안았다.
다음 날 오후 루브르 박물관 옆 카페에서 만난 조성진은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3일과 5일 아슈케나지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국 무대에 데뷔한 데 이어 파리 독주회까지 성공적으로 치러낸 덕분이다. 쇼팽콩쿠르 우승 이후 하루 네댓 시간 눈 붙이는 빠듯한 일정이지만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피곤이 사라진다"며 웃었다. "기분 좋아요. 콩쿠르 참가 이유가 연주 기회를 얻기 위해서인데, 지금까지 확정된 연주만 60회거든요. 1년에 스무 번 남짓이었던 예전과 비교하면 세 배 넘게 늘었어요." 그는 "준비 과정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걸 이겨내고 결과물로 보여줄 수 있는 연주 여행이 내겐 '휴가'나 다름없다"고 했다.
지난달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우승자로 이름이 불렸을 땐 멍했다. "그때까지 이름 안 불린 사람이 4명이나 더 있었거든요." 지금도 믿기지 않긴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연락해오는 걸 보면서 조금씩 실감하죠. 무엇보다 더 이상 콩쿠르에 안 나가도 된다는 게 신나요." 우승 상금 3만3000유로(약 4000만원)는 어디에 쓸 거냐고 물으니 '21세 쇼팽'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요."
"브라보" 파리의 관객들 기립박수 - 7일 오후 10시 30분(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의 콘서트장 살 가보에서 첫 독주회를 마친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관객 900명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파리=김경은 기자
지난 9개월, 그는 매일 쇼팽과 살았다. 쇼팽의 묘지가 파리에 있고, 화가 들라크루아가 그려준 초상화도 이곳에 있어 가보고 싶은 데가 많았다. 쇼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박물관과 유적지, 문화재는 그의 '쇼팽'을 살찌웠다. 3시간씩 다섯 번 본 루브르 박물관은 너무 커서 아직도 다 못 봤단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4시간 연습은 빼먹지 않는다. "대(大)작곡가들의 작품 중 치기 쉬운 곡은 하나도 없어요. 쇼팽을 잘 치려면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도 잘 알아야 그들과 쇼팽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할 수 있죠. 그런 작품들을 쉽게 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해요." 모국에서의 '조성진 돌풍' 소식에 청년 피아니스트는 얼굴을 붉혔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로 자기 이름이 올라 있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란 타이틀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고 했다. "한때 '조성진다운 게 뭘까' 많이 고민했는데, 이제는 안 하려고요. 개성은 억지로 만든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몸에서 나오는 거죠. 자연스럽게."
콩쿠르 심사위원 대부분이 10점 만점에 8점 이상을 줬는데 반해, 심사위원 필립 앙트르몽이 본선 무대에서 1점을 줬다는 걸 알게 됐을 때에도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제 음악, 아니면 제가 싫었을 수 있어요. 그분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요. 어쨌든 제가 우승한 걸요(웃음)." 조성진은 "타고난 성격이 긍정적"이라고 했다. "연주 일정이 없을 때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잘되겠지, 생각했어요. '나를 왜 안 알아봐 줄까' 싶은 마음도 물론 들었죠.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썼어요." 만사에 '쿨'해 보이는 이 청년에게도 고민이 있을까. "사소한 거긴 한데, 연주할 때 제 얼굴 표정요. 그게 맘대로 안 돼요. 연주에 집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와요."

앞날이 창창한 이 젊은 대가는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책임감이 커졌을 뿐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연주자로서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기사 출처 : 조선일보>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트레비 분수, 17개월만에 가동 재개


【로마=신화/뉴시스】이탈리아 로마의 명물 트레비 분수가 17개월동안의 수리를 마치고 3일(현지시간) 시원하게 다시 물을 내뿜고 있다. 2015.11.04
이탈리아 로마의 명물 트레비 분수가 17개월간의 수리를 마치고 3일(현지시간) 다시 힘차게 물을 내뿜기 시작했다. 

라레푸블리카, 안사통신 등은 이날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트레비 분수가 재가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환호했다고 보도했다. 또 전통에 따라 사람들이 어깨 뒤로 동전을 분수에 던지며 즐거워했다고 전했다. 

트레비 분수는 1732년에 건설됐으며,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라 돌체 비타'를 비롯해 수많은 작품의 테마가 되는 등 300년 가깝도록 오랜 세월동안 로마 시민은 물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트레비 분수 수리에는 총 220만 달러(약 25억원)의 비용이 들었으며, 이탈리아 패션업체 펜디가 대부분 비용을 지원을 했다. 

펜디의 수석디자이너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는 이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너무나 감동적이다. 특히 우리 로마 시민들에게는 더욱 그렇다"며 시민들의 품으로 트레비 분수가 돌아온데 대해 감격을 나타났다. 이날 트레비 분수 재가동식에서 피에트로 베카리 펜디 최고경영자(CEO)는 "로마에 대한 사랑의 제스처로서, 로마 시내의 다른 유서깊은 분수들을 수리하는데에도 펜디가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기사 출처 : 뉴시스>

은퇴 앞둔 강수진 "아쉬움 없다…끝이지만 새로운 시작"


강수진, 은퇴 작 '오네긴' 선택 (서울=연합뉴스) 김수진 기자 =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오른쪽)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오네긴'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2016년 7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은퇴하는 강수진 단장의 은퇴 작으로 오는 6~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서 선보인다.
강수진 은퇴작 '오네긴' 무대에 

"어릴 때부터 언제나 늦기 전에 그만두고 싶었어요. 저는 저 자신에 굉장히 만족하고 하는 공연마다 최선을 다 했습니다. 내년이면 거의 쉰 살인데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후회나 아쉬움은 전혀 없습니다."

내년 7월 22일 독일에서 예정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오네긴'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는 발레리나 강수진(48)은 '강철나비'라는 별명답게 30년 무용인생을 마감하는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도 지극히 담담했다.

그는 내년 정식 은퇴에 앞서 이달 고국에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함께 이 은퇴작을 먼저 선보인다. 한국에서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무대다. 

강수진은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무대에서 제가 원하는대로 춤출 수 있다고 느낄 때 그만두고 싶었다"며 "당연히 더 할 수 있지만 그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전에는 은퇴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어요.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직을 받아들이면서 은퇴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작품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크고, 저 자신에 대한 존경심도 굉장히 중요해요. 언제나 100% 최고의 수준에서 해야한다고 생각하죠. 특히 관객들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년이면 은퇴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퇴공연 소감 말하는 강수진
그리고 은퇴작으로 '오네긴'을 직접 선택했다. 

"제게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작품으로 이것 이외에 더 이상의 작품은 없어요. 1996년 처음 오네긴의 '타티아나' 역을 맡은 순간부터 이 역할과 사랑에 빠졌어요. 어떤 작품은 어느 순간이 되면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느낌이 들고 실제로 그동안 많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그만뒀죠. 그러나 오네긴은 하면 할수록 더 가볼 수 있는 역할이었어요. 제 스타일에 맞고 저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역이기 때문에 은퇴작으로 선택했습니다."

'오네긴'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대표작이자 강수진을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중 한명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1961년부터 12년간 예술감독을 지내며 독일의 지방 발레단에 불과했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안무가 존 크랑코의 작품이다.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남자 '오네긴'과 순진한 시골 처녀 '타티아나'의 엇갈린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러시아 문호 푸슈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녹턴', '사계'와 같은 차이콥스키의 서정적인 음악을 입혔다. 

1965년 4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초연한 이 작품은 주인공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춤에 섬세하게 담아낸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꼽힌다. 

철부지 시골 처녀가 가슴 깊이 간직한 사랑을 떠나보내며 성숙하고 강인한 여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얼마큼 섬세하게 표현하느냐가 공연의 성패를 가르는 작품이다. 

강수진 마지막 무대 '오네긴' 기자간담회
한국에서는 2004년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내한해 선보인 적이 있다. 

강수진은 "발레리나로서 마지막 무대라고 하지만 그날이 돼봐야 어떨지 알 것 같다"며 "사실은 새로운 시작인 느낌도 함께 든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강수진은 지금 후배 무용수들을 키우고 발레단을 성장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발레리나로서 공연 준비와 예술감독으로서 발레단 운영을 병행해야 해 두세 시간씩 눈을 붙이며 쪽잠을 자는 생활의 연속이지만 행복하단다. 

"후배들과 함께 작업하고, 발전하는 후배들을 보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마지막 무대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의미를 크게 생각할 시간도 없어요. 또 그 의미라는 것이 크면서도 크지 않은 것은 제게 또 다른 행복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끝이지만 시작이라는 느낌이 벌써 시작되고 있습니다. 은퇴 다음 날도 계속 일하고 있을 테니까요."

공연은 오는 6∼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관람료는 5만∼28만원. 문의 ☎ 1577-5266.
<기사 출처 : 연합뉴스>

2015년 10월 29일 목요일

악수한 남녀에 태형 99대… 이란 "부적절한 성적 행위"


【서울=뉴시스】미국 인권단체인 '이란의 인권을 위한 국제 캠페인'이 28일(현지시간) CNN에 제공한 이란 여류 시인 파테메흐 에크테사리(왼쪽)와 남성 시인인 메흐디 무사비의 사진. 이란 사법 당국이 이성과 악수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각각 99대의 태형을 선고해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고 CNN이 이날 인권단체들을 인용, 보도했다. 2015.10..29 (사진출처: CNN 인터넷판)
이란 사법 당국이 이성과 악수했다는 이유로 남녀 시인에게 각각 99대의 태형을 선고해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고 CNN이 28일(현지시간) 인권단체들을 인용, 보도했다. 

국제인권단체인 ‘표현의 자유 프로그램(PEN)’ 미국 지부는 이날 CNN에 이란 여류 시인 파테메흐 에크테사리와 남성 시인인 메흐디 무사비가 스웨덴에서 열린 시 관련 행사에서 참가자들과 악수했다는 이유로 이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며 이란에서는 친족 이외의 이성과 악수를 부적절한 성적 행위로 본다고 전했다. 

이란 사법부 대변인은 이들에 대한 사건에 대해 언급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PEN은 또한 CNN에 앞서 둘은 이달 초 신성 모독 내용을 담은 책을 썼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에크테사리는 11년 6개월, 무사비는 9년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은 상태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이란 정부부처인 이슬람 교리부의 승인을 받고 이 책을 발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린 도이치 칼레카 PEN 미국 지부장은 올해 초 발표한 성명에서 “두 시인이 당국에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정의를 희롱한 것이며 이란에서 이미 사면초가에 몰린 창조 예술 공동체의 창조활동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CNN은 이번 사건은 국제사회에 온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달리 이란 사법당국은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영화 제작자 카이반 카리미도 이들 시인과 같은 혐의로 최근 6년 징역형과 223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고 미국 인권단체 '이란의 인권을 위한 국제 캠페인'이 밝혔다.

이 단체의 사무국장인 하디 가에미는 CNN에 “이란 강경파는 단지 정치적 운동가만 공격하지 않는다”며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모든 사회적, 문화적 표현을 근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사 출처 : 뉴시스>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고흐 '해바라기'…찬란한 노란색 옅어져

이탈리아 과학자, 화학적 성분 분석 결과 드러나 

▲ 반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가 화학적 변화로 색이 바래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사진제공=뉴사이언티스트]
찬란했던 노란색
태양같이 뜨거운
그 색이 바래졌다


화려하게 빛났던, 태양처럼 타올랐던 '해바라기'의 색이 바래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적 작품인 '해바라기'의 색이 빠르게 퇴색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상세한 부분을 조사했더니 많은 부분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보호 작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는 지적했다. 

해외 과학매체인 뉴사이언티스트는 27일(현지 시간)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연구결과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7개의 해바라기 중 네 개는 크롬 황색으로 부르는 색소로 그려졌다. 크롬 황색은 19세기에 발명된 납과 크롬이 기본이다. 반 고흐는 미세한 대조와 음영 등을 위해 이 크롬 황색을 섞는 둥의 작업을 했다. 

이 같은 색조가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면서 수년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됐다. 이탈리아 페루자대학의 모니코(Letizia Monico) 박사는 이전 연구에서 "유황이 풍부한 크롬 황색은 빛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변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모니코 박사 연구팀은 최근 이동 분광계와 X-레이 스캐너를 통해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해바라기'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빛에 매우 민감한 색조를 포함하고 있는 '고 위험' 지역이 나타났다. 정밀 모니터링이 필요하고 나아가 빛의 노출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니코 박사는 고성능의 X-레이를 이용해 '해바라기'에서 미세 현미경으로 관찰 가능한 샘플을 분석했다. 그 결과 그림의 표면에 있는 크롬산납의 일부분이 초록빛의 산화크롬으로 변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반 고흐가 그렸을 당시의 노란색 보다 색깔이 더 어둡고 갈색 색조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모나코 박사는 "이미 변질된 부분의 색조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며 "더 이상 퇴색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빛의 노출, 특히 초록과 파랑 빛으로부터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사 출처 : 아시아경제>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쓰레기인줄 알고…" 이탈리아 환경미화원, 설치미술품 내다버려


'우리 오늘밤 어디로 춤추러 갈래?'이탈리아 출신 사라 골드슈미츠와 엘레오노라 치아리가 만든 설치미술작품 . (트위터 캡쳐)
"한눈에 봤을 때 쓰레기처럼 보였어요. 제 눈에 그건 예술 작품처럼 전혀 보이지 않아 모두 치우기로 했죠."

이탈리아의 환경미화원들이 미술관 전시실에 설치된 작품을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탓에 전시회가 중단되는 소동이 빚어졌다.

2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탈리아 북부 볼차노시 무세이온 미술관에서 열린 아방가르드 미술전에서 환경미화원이 설치미술 작품을 청소해 전시회가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작품은 '우리 오늘 밤 어디로 춤추러 갈래?'란 설치미술품으로 밀라노 출신 사라 골드슈미드와 엘레오노라 치아리가 1980년대의 정치적 부패와 쾌락주의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담배꽁초, 빈 술병, 종이로 만든 장식용 띠, 색종이 조각, 못 신는 신발과 옷을 재료로 만들어졌다.

박물관에 출근한 환경미화원들은 미술작품을 보곤 전날 밤 파티 때 남은 쓰레기더미라고 여겼다.

그들은 즉시 쓰레기봉투를 들고 작품들을 치워버렸다. 유리와 종이, 플라스틱별로 공들여 분리수거까지 했다.

이 미술관의 레티치아 라갈리아 큐레이터는 "금요일 밤 행사가 있긴 있었다"라며 "로비만 청소하고 그 외 모든 것은 가만히 두라고 직원들에게 알렸다"라고 지역신문 알토 아디제에 밝혔다.

그는 환경미화원들이 전시실을 로비라고 착각한 게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이런 사실은 작품이 분리수거장에 보내지기 전에 알려졌고 원상복구될 예정이다.

라갈리아는 "사진을 보고 모두 원래대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사건은 2001년 영국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런던전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환경미화원은 그의 설치미술에서 재떨이와 빈 맥주병, 커피컵들을 대형 파티 후 남은 쓰레기로 알고 모두 청소해 버렸다.
<기사 출처 : 연합뉴스>

2015년 10월 16일 금요일

인스타그램에서 유행중인 '썬번아트'...피부세포 손상

사진공유 SNS 인스타그램에서 최근 ‘썬번아트’가 유행중이다. 그러나 유행을 따르다가는 피부 건강을 위협해 피부세포 손상 뿐만 아니라 피부암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2일(현지시간) 주요 외신들은 장시간 햇볕에서 노출해 피부에 타투처럼 문양을 새기는 이 행동이 여름철을 맞아 유행하고 있지만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피부과 전문의들은 “썬번아트가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유해한 자외선에 피부를 노출하면 피부암과 피부노화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유행중인 썬번아트
인스타그램에서 유행중인 썬번아트
인스타그래머들은 해시 태그 #sunburnart나 #tantattoo 등을 사용해 썬번아트 사진을 공유하고 있다. 썬번은 태양열을 오래 쬐어 생기는 피부화상을 가리킨다. 인스타그래머들은 스티커를 몸에 부착하거나 선크림을 사용해 피부 위에 모양을 낸 다음 피부를 장시간 햇볕에 노출시킨다.
시간이 지나서 부착했던 스티커를 떼거나 선크림을 씻어내면 그 부분의 피부를 빼고 타기 때문에 모양이 새겨지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외선에 노출되는 모든 부위에 SPF30 이상인 선크림을 바를 것을 권장했다.
<기사 출처 : 지디넷코리아>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본방사수'는 옛말…24시간이 '골든아워'

드라마·영화, 다시보고 몰아보고 영구소장까지…
VOD가 대세…미디어시장 틀이 바뀐다

20~30대 TV시청시간 10년새 반토막
IPTV 가입자는 작년 1000만명 돌파
극장영화 안방서 동시개봉도 급증

통신사는 모바일 VOD 사용자 늘자
데이터 중심 요금제 잇따라 도입



[ 전설리/이호기 기자 ]
서울 홍익대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김수진 씨(41) 집엔 TV가 없다. 혼자 사는 데다 집도 작아 굳이 TV를 구매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챙겨 본다. 스마트폰 모바일TV를 통해서다. 김씨는 “저녁엔 바빠 일 끝나고 여유로운 시간에 몰아서 본다”며 “원하는 시간대에 볼 수 있어 편하다”고 했다. 직장인 유병진 씨(52) 가족은 주말마다 거실에 모여 인터넷TV(IPTV)로 극장 동시상영 영화를 즐긴다. 이씨는 “영화 티켓 한 장 가격으로 가족 네 명이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주문형비디오(VOD) 시장이 2011년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이 같은 시청 행태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 ‘탈(脫)TV’ 가속화로 미디어산업이 요동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VOD 이용량, 모바일 시청률 등을 반영한 통합 시청률 도입을 추진 중이다. VOD 이용량이 급증해 실시간 TV 시청률만으론 지표의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영화 배급·유통시장도 급변하고 있다.

쑥쑥 크는 VOD시장

VOD시장이 활짝 열린 건 기술 진화 덕분이다. 디지털TV와 스마트폰 태블릿 등 기기, LTE(4세대 이동통신) 등 통신망, IPTV와 모바일TV 등 서비스의 발달로 영화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화질 동영상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됐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디지털TV 보급률은 2011년 49.7%에서 지난해 76.3%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 스마트폰 보유율도 24.2%에서 79.5%로 껑충 뛰었다.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통신 3사의 IPTV 가입자 수는 2011년 494만명에서 지난해 1084만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통신 3사의 VOD 총매출도 1344억원에서 4150억원으로 급증했다. 작년 말 기준으로 KTIPTV 서비스인 올레TV 가입자 600여만명 가운데 VOD를 이용하는 가구는 55%에 이른다. 월평균 VOD 총 이용 횟수는 약 3억건, 가구당 이용 횟수는 13회에 달한다. CJ헬로비전 티브로드 등 케이블TVVOD 매출도 증가세다. 지난해 1600여억원을 기록했다.

‘폭식 시청(binge viewing·빈지 뷰잉)’ 등 새로운 시청 행태도 생겨났다. 주말 등 여유로운 시간에 종영 드라마 등의 VOD를 한꺼번에 내려받아 보는 방식이다. DVD를 수집하듯 VOD를 소장하는 서비스도 나왔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VOD로 보는 이용자도 늘고 있다.

VOD 이용량이 증가한 반면 실시간 TV 시청 시간은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방송 콘텐츠 주요 소비 계층인 20·30대의 하루 평균 TV 시청 시간은 2002년 3.2시간에서 지난해 1.4시간으로 10여년 만에 반토막났다.

TV·영화·통신산업 급변

과거 지상파TV는 막강한 실시간 시청률을 기반으로 광고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최근 실시간 시청률이 하락해 관련 수익이 줄어드는 추세다. 대신 IPTV 또는 케이블TV에 제공하는 방송 VOD 등 콘텐츠 수익이 늘었다.

닐슨코리아는 “(지상파TV) 황금시간대 시청률 지표가 무의미해졌다. 이제 24시간이 황금시간대”라고 분석했다.

영화 배급사들의 윈도 전략(홀드백 전략)도 변했다. 윈도 전략이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콘텐츠를 언제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배급할지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우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는 “과거엔 영화관→홈비디오·DVD→캐치온 등 유료채널→지상파TV 순서로 배급했으나 최근엔 극장과 유료방송(VOD)에 동시에 배급하는 극장 동시상영 서비스를 내놓는 등 전략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영화 기획사 및 배급사들은 극장 중심의 영업 관행에서 벗어나 VOD 등으로 판매망을 다변화하고 있다. 작년 VOD 시장에서 인기를 끈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대표적인 예다. ‘겨울왕국’은 작년 VOD로만 시청건수 128만건, 매출 110억원가량을 올렸다.

스마트폰으로 영화와 드라마 등을 시청하는 가입자가 급속도로 늘자 통신사들은 데이터 요금제를 도입했다. 최주식 LG유플러스 부사장은 “데이터가 동영상 시청 등에 가장 많이 쓰여 비디오 요금제를 선보였다”고 말했다.
<기사 출처 : 한국경제신문>

2015년 4월 3일 금요일

"숙녀가 어떻게 벌거벗은 남자 그림을" - '젠틸레스키'에서 '게릴라 걸즈'까지

"최상의 여인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여인"이라고 일찍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말했다. 그래서일까. 미술사에서 이름을 떨친 여성화가를 꼽아보자니 수를 헤아리는 손이 민망할 지경이다. 

여성화가, 20세기 들어와서는 더러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남녀를 차별하는 사회 분위기와 교육의 불평등을 꼽고 있다. 

왕립 아카데미 여자 회원들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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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조퍼니 <왕립아카데미 회원들>
ⓒ 요한 조퍼니

이 그림을 보자. 요한 조퍼니는 1771~1772년에 걸쳐서 새로 설립된 왕립 아카데미를 축하하는 미술가들이 남성모델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모여있는 그룹초상화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을 그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 회원들 중에 여성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1768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 설립단원 중에는 앙겔리카 카우프만과 메리 모저라는 두 명의 여성 미술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더욱 이상한 일이다. 

요한 조퍼니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에 그녀들을 분명히 그려넣었다. 어디 있을까? 

답은 바로 모델들이 서있는 무대 뒤 벽에! 조퍼니는 이 두 여성 회원의 상반신 초상화를 그려넣는 것으로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을 '모두' 그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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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조퍼니 그림 부분확대도
ⓒ 요한 조퍼니

이 그림은 당시 여성화가들이 처해있던 어려움들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 그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술에 대한 논의 속에 두 여성 회원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아카데믹한 훈련과 표현의 기초가 되었던 누드 모델 연구에서 배제되었다. 

정숙한 숙녀가 벌거벗은 남성의 몸을 그린다니! 만약 그렸다면 그들은 미심쩍은 윤리관을 가졌다고 의심받았을 것이다. 조퍼니의 그림은 왕립 아카데미 미술가들의 이상을 담은 것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카우프만과 모저는 미술작품의 생산자가 아닌 대상물로 표현되었다. 

즉, 이 여성미술가들의 초상화는 남성 미술가들이 사색하고 영감을 얻는 대상이었던 부조 작품이나 석고상들과 나란히 놓여있다. 그들은 '재현물(representations)'이 된 것이다. 즉 미술사의 흐름에서 여성은 생산자라기보다는 재현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랬다. 옛 여성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왠지 모를 어색함, 특히 인체 드로잉이 미숙했던 이유. 그녀들은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예로 들어보면 당시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솜씨뿐 아니라 고대 미술에 대한 지식과 함께 원근법, 해부학 등 여러 학문에 정통해야 했다. 또 이 도시 저 도시를 찾아다니며 대가들의 미술기법도 익혀야 했다. 

하지만 당시 여성은 그런 교육의 혜택이나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19세기 말까지 여성은 나체를 모델로 하는 누드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의 가장 궁극적 단계인 이 과정을 박탈한다는 것은 실제로 중요한 예술작품 창조의 가능성을 박탈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마치 의과 대학생들에게 인간의 몸을 해부할 기회를 주지 않거나 혹은 아예 그것을 살펴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남성 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부학적 지식이 빈곤한 여성 미술가들은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서사적 주제를 다루지 못했다. 

19세기 중엽까지 여성 화가의 주제는 초상·정물·풍속에 한정되었고,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던 서양미술사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금녀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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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8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젠틸레스키


그러나 이런 악조건을 딛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남성 못지않은 성취를 이룩한 강하고 개성적인 여성 미술가들도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년). 그녀는 여성화가의 일반적 규칙을 깨고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화려한 성공을 거둔, 서양 미술사에서 금녀(禁女)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여성화가이다.

한 남자의 품에 안겼던 부드러운 소녀였을 유디트. 그녀가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고 싸늘하게. 서양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의 수줍은 눈짓이나 옆으로 돌린 시선을 찾아볼 수 없다. 유디트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살인현장은 충분히 끔찍스럽다. 

유디트의 칼이 유대민족의 원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반쯤 꽂혀있고, 그녀를 돕는 하녀는 죽음의 공포에 에워싸인 홀로페르네스를 옆에서 꽉 붙들고 있다. 그의 목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아올라 흰 침대를 적시고 있다. 하얀 시트의 주름진 골을 따라 흐르는 피는 마치 진짜같다. 그 '더러운' 피를 안 묻히고자 팔을 걷어붙인 모습에서 그녀가 용의주도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유디트는 아시리아인들로부터 민족을 구해낸 유대의 영웅이고, 홀로페르네스는 유대인들을 공격했던 아시리아의 장수이다. 유디트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적진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유혹하고 잠든 틈에 칼로 죽인 여인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고향 티란의 베툴리아를 해방시켰다. 

젠틸레스키에게 이 작품은 격정적인 분노와 정의의 구현이라는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을 배제하던 공적 영역에서 여성 역시 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규준을 초월한 여성영웅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 유디트는 미모의 연약한 여성이 아니다. 자기보다 힘이 강한 남성을 당차게 물리치는 용감한 영웅의 모습이다. 근육질의 에너지 넘치는 여전사는 예전의 서양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성상이며, 정신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남성을 압도한다. 그림 안에서 여성의 육체적 힘을 포착하여 표현한 점은 서양회화사에서 전례가 없다. 

남성욕망의 비극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자를 희생시킨 여인인데도 남성화가들은 아래의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그녀를 달콤하고 감각적으로만 묘사했다. 그러나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다르다. 그녀는 남성의 성적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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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치아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디트> 1515년, 로마 도리아-팜필리미술관
ⓒ 티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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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틴토레토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50/1560년,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틴토레토

그래서 그녀는 페미니즘 미술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이 매혹적인 몸으로 남성을 꾀어내는 이미지가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당당히 승리를 얻어낸 새로운 유디트로 탄생시킨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주목을 끌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강한 유디트를 그려낸 젠틸레스키가 얼마나 강인한 성품을 지녔는지는 미뤄 짐작할만하다. 하지만 이 강한 성품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에는 그녀 개인의 남다른 아픔이 있다. 

십대였을 때 그녀는 이미 천재적인 화가의 면모를 드러냈고, 23살이 되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초와 아버지의 친구 아고스티노 타시는 그녀에게 당대를 풍미했던 카라바조 풍의 강렬한 명암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타시는 그녀의 재능보다 엉뚱한 데에 관심이 많았고,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딸이 17살 되던 해에 타시를 상습강간범으로 법원에 고소했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피해자임에도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화가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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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틸레스키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영국왕실소장
ⓒ 젠틸레스키

자화상을 봐도 알 수 있다.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는 그녀. "나는 화가다"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듯하다. 당시까지 '재현의 대상'으로 밖에 미술사에 기여하지 못했던 그녀들. 하지만 젠틸레스키는 이제 여성인 나도 '생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했던 것이다. 

젠틸레스키는 작품을 주문한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이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확실하게 독자적인 '해방된' 여성임을 표방한 화가였던 셈이다. 

여성이란 오직 매혹적인 몸으로써 남성들에게 대상화되는 존재가 아님을 선포하고, 페미니즘 미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젠틸레스키. 하지만 여성의 몸을 그저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기까지는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세월에는 여성의 성(性)을 성적 대상이 아니라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의식을 가진 젠틸레스키의 후배 여성미술가들의 고군분투가 있었다. 그녀들은 내 몸은 내 것이라는 관점, 더 이상 내 몸을 타자화하지 않겠다는 의식, 말하자면 내 몸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여성이자 미술가였다.

직업모델 출신 화가 수잔 발라동, '객체'에서 '주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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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 발라동 자화상, 1883
ⓒ 수잔 발라동

이 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를 내어놓고도 차분하지만 당당하게 관찰자를 쳐다보고 있다. 흔히 벗은 여체를 그린 그림 속 여성들은 꿈꾸듯 애매한 눈빛으로 관찰자를 사선으로 비껴보곤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그림 속 여성은 자신이 자기 몸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 그리고 그림 속의 여인도 발라동이다. 그녀는 이 그림에서 자신을 전혀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 특히나 이 때 그녀는 방금 아이를 낳은 상태였다고 한다. 

방금 아이를 낳은 여인의 몸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즉 에로틱한 제재로는 적당하지가 않다. 어느 남자도 늘씬한 처녀의 몸 대신 아이를 낳고 방금 몸을 푼 여인의 몸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를 낳은 발라동의 몸은 결코 남성들의 눈길, 그들의 성욕의 대상이 아니다. 그 몸은 여성인 화가의 자기 주장일 뿐이다. 

게다가 그녀가 남성화가들의 성욕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누드화 속에 나오는, 바로 그 모델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그림을 그려낸 그녀가 더 놀랍게 여겨진다. 풍만하고 아름답고 유혹적이고 무방비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남성 화가들의 시선을 버텨낸 그림 속의 벌거벗은 여인이,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을 그리기 시작한 것 자체가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세탁부에서 식당 종업원, 서커스 곡예사로 전전하다가 몽마르트르 거리에서 화가들을 만나 직업모델이 되었다. 르누아르, 로트레크, 샤반, 드가 등 기라성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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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누아르 <머리를 땋고있는 수잔 발라동의 초상화> 캔버스 위에 유화, 56x47cm, 바덴, 랑 마트 재단, 1884
ⓒ 르누아르

하지만 모델이 역할을 바꿔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흔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엄청난 내면적 독립성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여성은 영감을 주는 '객체'였고, 남성은 창조하는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라동은 예술가로서 재능과 열정이 있었음에도 모델인 그녀가 여성화가로서 인정받기까지는 힘든 투쟁을 거쳐야만 했다. 

그녀를 키운 건, 팔할이 그녀 자신이었다. 체계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대신 그녀 자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어깨 너머로 데생을 배웠다. 자신의 선을 찾기 위해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읽어내는 힘을 기르기 위해, 그녀는 십여 년을 숨어서 혼자 공부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확신이 선 뒤 그림을 공개했을 때, 세상은 기존 남성화가들의 그림들과 전혀다른 초상화와 누드를 볼 수 있었다.

인물의 내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표현해낸 초상화들, 그리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여인의 나신들…. 이전에 남성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누드가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미화된, 보여지는 사물로서의 여성이었다면, 그녀의 벌거벗은 여인들은 전통적인 미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평범하고 다소 살찌고 억센 몸매에 삶의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여성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듯 자신의 일이나 생각에 몰두해 있는 여성들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난하고 억세었던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여인의 육체이고 삶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포착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외관이 아니라 그러한 육체에 배어 있는 신산스럽고도 절실한 삶의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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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 발라동 <푸른방>,1923
ⓒ 수잔 발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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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 발라동 <목욕하는 두 여인들>,1923
ⓒ 수잔 발라동

누드 그림이 왜 이래? 프리다 칼로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모품으로 기능하는 여성누드에서 과감한 일탈을 시도한 작가는 비슷한 시기에 멕시코에도 있었다. 그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그녀의 그림은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감상자를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가슴을 가르고 몸을 관통하며 솟아오른 이오니아식 기둥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몸에는 못들이 화살처럼 박혀있으며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척추환자용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다. 

피흘리고 고통받는 여성누드를 담은 그녀의 작품은 더 이상 남성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그림이 아니다. 

프리다는 또 서구 미술계에서 거의 다루어진 바가 없는 출산·유산·낙태·월경과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등 터부를 깨뜨리기도 했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선구자이자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가 "미술사를 살펴볼 때, 그녀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주제를, 절대적이고도 비교할 수 없는 솔직함으로 다룬 첫번째 여인이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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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다 칼로 <부서진 척추> ,1944
ⓒ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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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다 칼로 <헨리 포드 병원> ,1932
ⓒ 프리다 칼로

1930년 프리다는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낙태를 해야했고, 이어 가진 아이도 1932년에 유산했다. 프리다는 유산의 충격을 그림으로 그렸다. 프리다의 아랫배 쪽 하얀 침대 시트는 피에 흥건히 젖어있으며 배는 임신 때문에 아직도 약간 불러있다. 골반 주위의 피바다 위로 뻗은 리본은 탯줄이 되어 자궁에 있는 자세의 거대한 남자 태아 배꼽에 묶여있다. 이 태아는 유산으로 잃은 아기다. 

프리다의 누드는 남성의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리게 하고 있다. 칼로는 앞서말한 금기를 무시하고 자신의 모습을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 아니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그녀는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미술계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고릴라 가면을 쓴 까닭

이어 1980년의 여성미술가들은 그림 속 여성들이 묘사되는 방식을 개선해보자는 개인적 차원의 변혁에서 벗어나, 여성미술가들의 처우와 그림 속 여성들의 모습을 같이 바꿔보자는 집단적 운동가로서의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게릴라 걸즈'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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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릴라 걸즈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벌거벗어야 하는가?> ,1989
ⓒ 게릴라 걸즈

이는 실제로 게릴라걸즈가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에 항의삼아 붙여놓은 포스터이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현대미술 섹션이 단 5%의 여성미술가의 작품을 걸고 있는 반면, 이 미술관이 소장한 누드 중 85%가 여성이다". 

즉 여자는 누드로서만 미술관에 들어가기가 쉽고 작가로서는 미술관에 들어가기가 아주 어렵다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남성 전용 마초미술관'이라고 이름을 달지 않은 공공기관의 하나인데도 말이다. 게릴라걸즈는 이같이 아연실색케 하는 현실을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에 화난 고릴라 마스크를 씌우는 방식으로 날카롭게 고발하고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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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릴라 걸즈의 모습
ⓒ 게릴라 걸즈

게릴라 걸즈는 198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예술가를 초청하여 진행한 '회화와 조각 국제 통람(An International Survey of Painting and Sculpture)'이라는 전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이 전시에 참가한 예술가 중 여성들은 단 13명뿐이었으며 모두 미국와 유럽 출신의 백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미술계에 여성과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때부터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포스터·스티커·책·인쇄물 등의 활동을 통해 정치계·예술계·영화계 등  전반적 문화계의 성차별을 폭로해왔다. 

개인이 아닌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들은 고릴라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활동하며, 지금 역시 그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세상의 모든 차별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게릴라 걸즈는 한 인터뷰에서 "성차별로 손가락질 했던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미술관들이 우리 포스터를 전시하고 있다"며 "도서관에서도 우리 포스터들을 문서기록실에 보관할 정도"라고 자신들의 활동결과에 만족을 표시했다고 한다. 

'여성' 수식어 뗀 '미술가'를 꿈꾸다

그렇다. 예전보다 여성들의 지위는 확실히 나아졌다. 여학생을 누드 클래스로부터 제외시키는 원시적인 성차별도 극복됐으며, '여성차별'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의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세상은 잘 '실천'하고 있을까. 아직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세상의 50%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그 비율만큼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을까?'를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사실 '여성미술가'라는 단어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직업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식의 표현은 남성들이 형성하고 있는 기존 사회에 여성들이 합류하는 것을 특별하고 남다른 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흔히 우리가 '남성미술가'라는 말은 쓰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미술가'들의 글을 따로 써야하는 것도 일종의 불행이다. '여성미술가'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 또 더 이상 그들이 세상과 차별과 억압에 항거할 필요가 없는 것. 그래서 이런 글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는 그 때가 바로, 여성이 '미술가'로서의 지위를 진정으로 얻게될 순간이지 않을까싶다.
<기사 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