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4일 수요일

세상의 끝, 왕피천에서 길을 묻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나를 달래주는 왕피천의 숲
왕피천 생태탐방 제2구간 용소. 검푸른 물에 하얀 바위가 비쳐 절경을 이룬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세상의 끝, 왕의 피신처로 떠나는 힐링 여행.

국내 최대 생태경관보전지역 왕피천 탐방로 문을 열다.

울진 서면 왕피리 속사마을의 가을풍경. 왕피천은 물길따라 산을 돌아가지만 차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세상의 끝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두 곳은 결코 대중적인 관광지는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접근성과 편의시설 즐길거리 등 일반적인 관광지로서 매력을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갖췄다고 보기 힘든 곳이다. 바로 경북 울진의 왕피천과 소광리 금강소나무군락지 얘기다. 

경북 봉화에서 울진으로 넘어가는 36번 도로는 한국에서 가장 험난한 국도 중 하나다. 봉화 소천면 현동에서 울진에 이르는 약 54km 구간은 2차선 국도의 제한속도인 시속 60km로 달리는 게 불가능하다. 경사가 가파르진 않지만 불영사 계곡을 따라 꼬불꼬불 돌아가기 때문이다. 1984년 개설된 이 국도는 지금 곡선을 직선으로 펴는 선형개량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이 정도만 해도 울진은 충분히 멀고 험한 곳이다. 봉화 분천이나 울진 서면을 지날 때면 ‘이런 곳에도 마을이 있구나’ 싶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왕피천에 닿으려면 국도와 연결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산을 넘어야 하고, 소광리 금강소나무군락지까지 가려면 또 계곡을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야 한다. 그저 ‘대게 먹으러 울진 가는 길에 혹은 동해 바다 구경하러 가다가’ 잠깐 들를 만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왕피천 생태탐방 제2구간 용소부근, 초록빛 계곡물에 흰 바위와 소나무가 그대로 비친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왕피리, 세상의 끝에서 길을 묻다.

자동차로 왕피천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상류쪽은 36번 국도에서 서면 왕피리 속사마을로 가야하고, 하류쪽은 7번 국도에서 근남면 구산리 굴구지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두 마을간 거리는 왕피천 물길로 불과 5km 남짓이지만 연결 도로가 없다. 차로 돌면 50km 거리다. 왕피천의 비경은 바로 이 두 마을을 연결하는 생태 트레킹 코스에 숨어 있다. 

왕피천 상류인 왕피리 가는 길은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서면 삼근리에서 연결된 도로는 산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임도(林道)같은 느낌이다. 시멘트 포장이 잘 돼있다는 것만 빼면 마을을 잇는 길로는 보이지 않았다. 서면만 해도 산골 중에 산골인데 거기서 또 산을 넘어 민가가 있으리라곤 상상이 되지 않았다. 차 한대가 비껴가기 힘든 길을 구비구비 돌아 오르면 박달재(해발고도를 표시하는 앱이 566m를 가리킨다) 정상이다.왕피천 생태탐방로 안내판에 이곳에 서식하는 동물을 나무기둥에 조각해 놓았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왕피천 유역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양·삵·담비 등과 노랑무늬붓꽃·산작약 등 멸종위기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입니다” 왕피천 안내판과 함께 감시초소가 있다. 

근무하는 지역주민에게 더 갈 수 있는지 물었다. 버스도 들어간다는 대답을 듣고도 자꾸만 걱정이 앞선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 길이다. 소나무 숲이 가로수를 대신하는 오솔길이다. 위험하지만 푸근하고 아늑하다. 세상의 바닥까지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간다.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찻길이 없던 시절 울진장을 보려면 돌아오는 길에 삼근리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는 초소주민의 말이 실감난다.속사마을 주민이 도토리를 말리고 있다.

내리막이 끝나고 속사삼거리를 지나자 그제서야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왕피천이다. 최종 목적지는 속사마을, 끝난 줄 알았던 산길이 다시 시작된다. 언덕(만만찮은 산길이지만 방금 넘어온 박달재에 비하면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을 하나 넘자 아래쪽으로 거짓말처럼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실제로는 왕피천 양쪽에 붙은 군색한 다락논밭에 불과하지만 이 산중에선 상대적으로 넓어 보였다. 속사마을은 노랗게 벼가 익어가는 들판 끝자락에 자라잡고 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신 한 종교단체 신도들이 신앙생활 하듯 농사를 하며 생활하는 곳이라 마을과 들은 제법 풍성해 보였다. 종교의 목적 중 하나가 번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는 수양이라면 아주 제대로 된 곳을 골랐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은 큰 맘 먹고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존재조차 알기 힘든 세상의 끝이다. 계곡은 물길 따라 산을 휘돌아 이어지지만 도로는 산을 넘지 못하고 여기서 끝난다. 왕피천 생태탐방로는 이곳부터 아래쪽 굴구지마을로 이어진다.왕피천 생태탐방 제2구간 용소부근, 은어떼가 가끔씩 은빛비늘을 번뜩이며 헤엄친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초록 물속에 은어 떼 펄떡거리는 완전한 자연.

생태 탐방은 하류 굴구지마을(구고동)에서 시작하는 게 그나마 쉬운 편이다. 왕피리 속사마을만큼은 아니지만 굴구지마을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구고동이나 굴구지나 ‘아홉 구비’라는 뜻이라니 어떨지 짐작이 간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역시나 시멘트 길이 이어진다. 그렇게 약 4km 산길을 넘으면 굴구지마을이다. 시멘트 포장은 마을을 지나서도 이어지지만 이곳부터는 걷는 게 현명하다. 차를 돌려 나오기도 힘들지만 도로 폭이 좁아 무리했다가는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왕피천 생태탐방 제2구간 용소부근, 초록빛 계곡물에 흰 바위와 소나무가 그대로 비친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도로는 끊일 듯 끊일 듯 약 1.5km나 더 이어진다. 낡은 양철지붕에 스러져가는 민가가 두어 채 보이고 새로 지은 집이 또 두 가구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감시초소가 있고 생태탐방로는 왕피리 속사마을로 이어진다. 길은 초소에서 바로 내리막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들릴 뿐 어떤 인공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개복숭아와 밤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엔 이곳도 집터였나 보다. 짧은 구간 숲을 지나면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초록빛이 감도는 투명한 물결 따라 모래와 자갈까지 일렁이는 듯하다. 상류로 갈수록 자갈은 덩치가 커지고 약 1km 지점 용소(龍沼)에서는 마침내 바위절벽이 협곡을 이룬다. 매끈하게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바위가 깊이만큼 검푸른 물속에 비친 모습은 한 폭의 데칼코마니 작품이다. 용소는 65km에 달하는 왕피천에서 가장 폭이 좁고 깊은 곳이다. 스러질 듯 하얀 바위 위엔 붉은 소나무가 위용을 뽐내고, 푸르다 못해 검은 물속에선 은빛비늘 번뜩이며 은어가 헤엄치는 곳, 잠시 쉬어가는 길손조차 초록으로 물들 것 같은 풍경, 신선이 노니는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이런 곳에 전설 하나쯤은 기본이다. 이곳에 살던 용이 대홍수를 예감하고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하늘을 오르는데, 그 광경을 본 만삭의 새댁이 금빛 비늘이 붙은 아이를 나았단다. 그걸로 끝, 용소 안내판의 전설은 허망하게도 다음 이야기가 없다. 대신 왕피천에 대한 전설은 나름 설득력 있다. 왕피천은 이름 그대로 왕이 피란했다는 곳이다. 정설은 없으나 부근에 안일왕 산성이 있다. 안일왕은 삼한시대 말기 삼척 실직국의 군왕이었다. 강릉 예국의 임금이 삼척으로 쳐들어오자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항전하다 끝내 목숨을 잃었단다. 거리고(병기를 보관했던 창고)·임광터(군사들이 쉬어간 곳)·병위 등 자연부락 이름도 군사용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탐방객들이 울진 서면 소광리 금강소나무 군락지에서 산책하고 있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국내 최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가는 힐링 여행

깊고 깊은 산골이라 이정도 소개는 주마간산으로 훑은 정도에 불과하다. 굴구지마을이 산촌체험마을로 선정되면서 3년여 전부터 알음알음 외지인의 발길이 늘고 있지만, 길이 어디서 연결되고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가늠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울진 왕피천계곡 에코투어 사업단’은 탐방객의 안전과 생태보전을 위해 ‘왕피천 생태관광 이야기’홈페이지(www.wangpiecotour.com)를 개설하고 10월부터 탐방예약을 받는다. 전국 최고의 생태경관보전지역에서 자연과 하나되는 힐링 여행인 셈이다. 탐방은 3개 구간으로 나눠 제한된 인원만 받고, 자연환경해설사가 동행해 진행한다. 제1구간(동수곡삼거리~실둑교, 12.7km) 탐방객은 셔틀버스로 삼근리에서 출발지점까지 이동해 트레킹이 끝나면 도착지점에서 다시 삼근리로 돌아온다. 제2구간(굴구지~거북바위조망대 왕복, 9.8km) 탐방객은 근남면 굴구지마을에서 민박을 하는 게 편하다. 제3구간(수곡리~불영계곡, 7.6km)는 내년부터 운영할 예정이다.

소광리 금강소나무 군락지 530년 된 소나무(가운데) 아래서 오감으로 숲을 느끼는 '신선놀음' 숲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울진=최흥수기자 choisoo@hk.co.kr

530년 금강송 기운 받으며 신선놀음에 빠지다.

울진이 금강송 최대군락지가 될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일조량이 소나무의 생존에 적합하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서면 소광리는 빛을 모으는 동네라는 뜻이다. 둘째 이유는 오지 중에 오지라는 점이다. 그만큼 강릉 삼척 봉화에 비해 일제의 수탈을 비껴갈 수 있었다. 

왕피천에 비하면 많이 알려졌지만 소광리 금강송군락지도 접근이 쉽지 않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산림청에서 직접 운영하는 금강소나무숲길 홈페이지(www.uljintrail.or.kr)에서 제3구간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 생태보전과 숲 이용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조화시키기 위해 방문객을 하루 80명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광2리 금강송펜션에서 출발해 530년(1984년 수령 500년으로 조사) 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는 군락지까지 걷는 자체가 건강과 힐링의 과정이다. 3시간 동안 숲과 계곡을 따라 오르다 이곳에 닿으면 얼추 점심시간이다. 그리고 특별한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소광리 주민들이 직접 만든 친환경 산촌음식이다. 고사리와 고추절임 멸치볶음 등 직접 기른 농산물로 정성을 들인 8가지 반찬이 어우러진 뷔페다. 가격은 6,000원, 트레킹을 예약할 때 미리 주문하면 된다. 

식사가 끝나면 간단한 숲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의무적으로 참가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숲을 느끼면 그만이다.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530년 된 금강송 아래에 앉아 나무와 숲의 기운을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때로는 눈을 감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눈을 감고 숲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다. 귀와 코 피부까지, 그 동안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감각기관들이 활짝 깨어난다. 온몸으로 느끼는 ‘신선놀음’이다. 숲해설가 최윤석씨는 금강소나무숲길 트레킹을 통해 “숲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감이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울진송이채취울진 쇠고기송이구이

마침 ‘울진금강송송이축제’가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울진 엑스포공원에서 열린다. 송이 채취 체험과 송이빵·송이비빔밥·송이국 등 송이요리시식, 즉석 중매와 깜짝 세일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올 가을 송이향 짙은 울진까지 갔다면 조금 더 시간을 내고 욕심을 부려보자. 국내최대 생태경관보전지역인 왕피천과 소광리에서 온전한 자연의 소리와 향기가 기다리고 있다.
<기사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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