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5일 금요일

예능이 사라진 TV, 분노와 슬픔만 남았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어야 할 자리엔 분노(怒)와 슬픔(哀)만이 있었다. TV는 인생사 모든 것이 반영된 곳이다. TV를 보며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해야 하지만, 지금의 TV에는 인생사의 절반만이 남아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 직후 방송사들은 예능과 드라마 등 오락적 요소가 강한 프로그램들을 전면 중단했다. 지극히 당연했다. 실종자들의 귀환을 기원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해야 하는 시기에 TV가 유희의 장(場)일 수는 없었다. 

주말을 지나면서 일부 드라마와 공익적 요소가 있는 프로그램이 선별적으로 편성되기 시작됐다. 드라마 편성은 논란의 여지가 남기도 했지만, 시청자들은 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예능 프로그램은 여전히 ‘올스톱’이다. 방송가 일각에선 천안함 침몰 사태를 떠올리며 ‘1개월 불방’을 전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적 슬픔은 천안함 침몰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예능 프로그램 편성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능 프로그램이 사라진 자리는 뉴스 특보와 시사 프로그램 등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 프로그램들이 채웠다. 역시 지극히 당연했다. 국민들의 모든 관심은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팽목항을 지켜봤다. 무엇보다 300여명에 달하는 실종자들이 구조돼 귀환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TV를 떠날 수 없었지만, 사고 당일 176명으로 알려졌던 구조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174명으로 줄었다. 실종자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 자리는 사망자 숫자가 대신했다. 희망은 점차 실낱처럼 가늘어졌다. 절망으로 바뀌어갔지만 기적을 바라며 TV 앞을 지켰다. 기적의 가능성마저 희미해졌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슬픔만이 교차하고 있다.

1주일이 지나갔다. 온 국민이 간절한 마음으로 TV 모니터를 지켜봤다. 노란 리본과 ‘R=VD’(Realization=Vivid Dream,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 문구가 SNS에 가득했다. TV에서 보곤 했던 기적이 현실에서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현실을 보여준 TV에서 기적은 없었다. 

승객을 내팽개치고 배를 탈출한 선장과 선원, 실종자와 그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는 고위 공직자들, 과잉 속보 경쟁과 오보 남발 속에 실상은 전하지도 못하는 언론, 너절리스트가 돼버린 저널리스트(Journalist) 그리고 오열하는 희생자 가족들… TV 속 세월호 참사의 모습은 추악했다. 분노와 슬픔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사람들이 TV를 보는 이유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다. TV 속에 펼쳐진 또 다른 희로애락 인생사를 보며 웃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팍팍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함이다. 하지만 요즘 TV 속에 펼쳐진 현실은 팍팍한 현실보다 더 절망적이다. TV를 보기 너무 괴롭고 힘들다. 안 보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시선은 뉴스 특보의 세월호 소식을 향한다. 지치고 무기력해진다. 국민적인 트라우마가 우려되는 현실이다.

세월호 참사 앞에 TV는 자신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을 결방하고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 프로그램의 집중 편성으로 최소한의 도리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론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중편성을 하고 슬그머니 드라마를 밀어 넣은 것을 탓할 생각도 없다. TV의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TV는 시청자들에게 위안을 줘야 한다. 희망을 안겨줄 수 있어야 하고, 감동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세월호 침몰 같은 대형 참사 앞에서 더더욱 TV는 국민들에게 힐링(Healing)을 안겨주는 존재여야 한다. 분노와 슬픔으로 지쳐가는 모든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TV의 행태는 직무유기였다.

사고 1주일을 넘어가면서 TV는 결방됐던 프로그램들의 방영 재개를 놓고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드라마와 교양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방영 재개로 가닥을 잡은 양상이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분위기다. 세월호 관련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방송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자칫 국민 정서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치 보고 고민할 필요 없다. TV의 역할에 대한 본질을 성찰하면 된다. 슬픔과 분노에 젖은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드라마든 교양 프로그램이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물론 왁자지껄 웃고 즐기는 프로그램은 곤란하다. 차분한 가운데 희미하게 미소 짓고 나직이 눈물 흘리며 감흥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국민들도 기꺼이 시청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힐링, 상처의 치유다. 물론 당장은 불가능하다.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고 이후 TV는 자신의 본령을 전혀 해내지 못했다. 이제라도 해야 한다. 프로그램 방송 재개 여부나 재개 시기에 대해 눈치를 보고 고민을 할 때가 아니다. 힐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 고민할 때다. 결방된 기존 프로그램 중에 마땅한 프로그램이 없다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

현재 결방중인 프로그램 제작진도 다시 방송을 시작할 때엔 국민들의 상처 치유라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프로그램의 본질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 결방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프로그램은 대체로 예능 프로그램일테니, 본질인 재미와 즐거움의 창출은 가지고 가야 한다. 하지만 좀 더 세심한 배려로 힐링하는 프로그램이 돼야 함은 잊어선 안될 것이다.
<기사 출처 : enew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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