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9일 목요일

대학 영어강의 남발…학문은 '뒷전'

신촌의 한 대학에 다니는 박재성(27)씨는 영어로 진행하는 경제학 전공수업을 들었다.

강의 교재는 영어로 된 원서였다. 평소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박씨는 책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몇 배의 노력을 쏟아야 했다. 담당 교수는 매시간 학생들에게 질문하라고 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분별한 영어강의가 넘쳐나는 가운데 대학 강의실에서조차 우리말이 홀대받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어 강의 중에는 학문에 중점을 둬야 하는 전공 강의가 다수 포함돼 있어 교수와 학생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다. 

9일 국어문화운동본부가 영어 강의를 시행하는 89개 학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영어 강의의 83%가 전공과목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 '영어 강의'는 영어영문학과 등 영어 관련 학과와 과목명에 '영어'가 들어간 과목처럼 영어를 꼭 써야 하는 과목을 제외한 다른 과목에서 수업 중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 강의 개설은 미디어나 자연, 상경, 법학, 인문, 예체능 등 계열을 가리지 않는다. 대부분 강의에서 영문으로 된 수업 자료를 쓰는 것은 물론 교수·강사가 영어로 말하고 과제물도 영어로 내야 하는 방식이다. 한국어가 대학에서 학문하는 언어(학문어)로 선택될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한국어로 이뤄지는 전공 수업을 더 선호한다.

영어 강의가 개설된 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4.5%가 전공 지식을 얻는 데 적합한 언어는 한국어라고 답했다. 반면 영어라고 응답한 사람은 35.5%에 그쳤다. 한국어 선호도가 2배 가까이 높은 셈이다.

한국어가 학문어로 적합한 이유로는 강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69.8%) 심층 수업을 할 수 있으며(20.2%) 질의응답·의사소통이 원활하다(9.3%)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영어 강의를 듣는 이유도 학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전공 강의가 한국어와 영어로 따로 개설됐을 때 어떤 수업을 선택하겠느냐는 물음에 '영어 강의'라고 답한 비율은 40%에 그쳤다. 학문적 성취를 위해 영어강의를 듣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야기다.

대신 학점 받기가 더 쉽고(35%)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31.3%)는 이유가 주류를 이뤘다. 전문 용어나 전공 논문을 배우는 데 좋다는 비율은 11.3%에 불과했다.

대학에서조차 영어강의 개설 목적은 '영어실력 향상'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들 학교를 상대로 영어 강의를 시행하는 이유를 조사한 결과 '학생 영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98.9%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더불어 대학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얻기 위해서(49.4%)라는 비율도 적지않았다.

강의의 글로벌화를 통해 학문적 깊이를 제고한다는 당초 취지가 실로 무색한 결과인 셈이다.

실제로 국내 한 언론사의 대학평가 지표 중 국제화 부문에는 '전공 수업 중 영어 강좌 비율'이 포함돼 있었다. 

반면 앞으로 영어 강의 비율을 줄여야 한다는 응답률은 2.2%에 그쳤다. 현행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50.6%로 가장 높았고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는 응답률도 47.2%에 달했다. 

영어강의를 줄이면 도태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대학에 만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부분이다. 

이수연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 수석연구원은 "학문하기에 적합한 언어는 한국어인데,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과목까지 영어 강의로 진행해 대학생들의 배움은 물론 우리 말·글의 발전도 저해하고 있다"며 "학점을 받기 쉽고 취업에 유리하다는 이유가 결국 학문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전공 지식을 얻는 데 적합한 언어인 한국어가 학문의 주체로서 당당히 자리 잡고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영어 강의는 꼭 필요한 부분에서만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대학의 무분별한 영어 강의 개설은 한 언론사의 대학평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며 "해당 언론사에 정보공개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기사 출처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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