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렸다. 전남 보성의 차밭에 가는 길이다. 비 맞은 차밭은 더 추레했다. 억새가 가슴 높이까지 자라있었다. 군데군데 관목이 차나무보다 무성했다. 임덕순 할머니의 차밭은 1만8천㎡ 넓이다. 차밭은 3년째 그대로 방치된 채였다. 녹차가 건강 음료로 각광을 받을 때 조성했던 차밭이다. 임 할머니는 비를 맞으며 텃밭에 심은 배추를 돌보고 있었다. 차밭을 방치한 채 배추밭을 돌보는 것이다. 임 할머니는 "손이 없다"고 하소연 했다. 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거친 호남 사투리로 "차밭을 생각하면 미치겠다. 그래도 돈만 된다면 왜 차밭을 놀리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차 농사가 배추농사 보다도 돈이 안 된다는 얘기다.
한국은 2014년 3915톤의 녹차를 생산했다. 2천 년 대 초기만 해도 녹차는 건강음료의 상징이었다. 보성과 하동 제주 등에는 차밭이 늘어났다. 대기업 음료도 생산됐다. 항산화, 항암물질이 풍부하고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성분이 많다고 했다. 커피와 비교되기도 했다. 커피 보다는 녹차가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2006년을 고비로 재배 면적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난해까지 3분의1로 줄었다. 소비도 그만큼 줄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해 녹차 산업의 시장규모는 1천억 원 정도라고 밝혔다. 녹차가 비틀거리는 사이 커피는 급성장을 했다. 지난해 농식품부 자료로는 시장규모가 1조6천억 원이다. 5조4천억 원 정도라는 업계 자료도 있다. 녹라 라떼나, 음료를 만드는 데도 수입 녹차를 사용했다. 5년 사이 수입차도 4배나 늘었다. 한국 녹차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완패를 당한 것이다. 그렇게 녹차는 지금 '루저(loser)'가 됐다.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했다. 보성에서 녹차 부활에 몰두하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녹차 산업이 어려워진 이유는 생산자를 비롯한 녹차 업계의 문제 때문이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농약이 문제였다. 차밭에 농약을 분수처럼 뿜어대는 모습이 방영됐다. 건강 음료란 인식이 약해지게 된 이유다. 소비자들이 하나 둘씩 등을 돌리게 됐다. 값도 문제다. 4월 말부터 5월 초 사이에 잎을 따는 세작(細雀)이라는 녹차 종류는 인터넷 판매를 통한 소비자 가격이 100g에 3만 원이 넘는다. 이 정도면 양호하다. 인사동 전통 찻집에 가면 거품은 더 심하다. 비싼 종류는 부르는 게 값이다.
다도(茶道)라는 이상한 차 마시기 예법도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주전자에 찻잔까지 갖추는 것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차의 종주국이라는 중국에도 다도라는 문화는 없다. 차는 음료일 뿐이다. 유명 차산지를 방문해도 컵에 찻잎을 한 줌 넣고 물을 부어주는 것이 전부다. 색을 중시하다보니 유리컵을 많이 사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500cc 맥주잔은 훌륭한 찻잔이 된다. 녹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차가 퍼지면서 녹색 물이 우러나오고 물을 머금은 찻잎이 바닥에 가라앉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바쁘면 안보면 그만이고 우러난 물을 마시면 된다. 병에 갖고 다니면서도 마신다. 주전자에 퇴수그릇, 찻잔을 다 갖추고 잔을 어떻게 들어야한다는 등의 예법은 없다. 물론 그런 비싼 차 주전자와 잔은 있지만 다도를 위한 것이 아니고 부자들의 사치를 위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차는 차나무에서 잎을 채취해 만든 식품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700년대 전설의 황제 신농 시대에 이미 "차는 오래 마시면 힘이 나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차나무 종류나 재배 지역에 따라 , 혹은 가공 방법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차가 있다. 대표적인 중국차로 인기를 끌고 있는 보이차만 해도 잎 생산지, 만든 차창, 가공 방법 등에 따라 수백 개의 이름으로 판매된다. 같은 차에도 이름이 여럿이다.
녹차도 그렇다. 녹차는 잎이 적은 소엽종 차나무에서 잎을 채취해 비교적 간단한 가공 과정을 거친 차다. 물론 녹차 가공에도 방법이 여려가지다. 하지만 마실 때 녹색을 그대로 살린 점은 비슷하다. 그래서 이름도 녹차다. 종류도 많다. 삼국지에 나오는 용정차(龍井茶)도 녹차의 한 종류다.
항저우(杭州)에서 나는데 근처 생산지에 따라서도 종류가 나뉘고 맛도 다르다. 가장 유명한 용정차는 항저우의 큰 호수인 시후[西湖] 일대에서 나는 종류로 역사만 1200년에 이른다. 그 유명한 '시후 롱징차'다. 근처의 아름다운 호반도시 쑤저우(蘇州)에서는 비로춘(碧螺春)이라는 유명한 녹차가 생산된다.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의 고향인 안후이성(安徽省)의 명산 황산(黃山)에서는 황산마우펑(黃山毛峰)이란 녹차가 유명하다. 타이핑허우쿠이, 류안과피엔 등 유명 녹차까지 중국에서는 한 해 10만 톤에 이르는 녹차가 생산된다.지난 8월 27일 전남 보성군은 중국의 한 당면회사와 MOU를 체결했다. 이 회사에 매년 2천 톤의 녹차 가루를 수출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해 수출 물량이 2천 톤이라면 우리나라 한 해 생산량의 절반을 넘는 량이다. 물론 보성군의 한 해 생산량도 넘는 량이다. 한 해 10만 톤의 녹차를 생산하는 나라에 3천9백 톤 정도를 생산하는 한국이 녹차를 수출한다는 것이다.
추석 연휴인 지난 9월 28일에는 정식 계약도 체결했다. 물론 여러 가지 단서 조항도 있다. 녹차는 모두 유기농으로 생산돼야한다. 그리고 올해는 20톤을 우선 수출하기로 했다. 향후 현재 개발 중인 녹차 함유 당면 제조기술이 성공하면 연간 2천 톤의 녹차분말을 수출하기로 했다. 과연 2천 톤을 수출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아한 점도 많지만 20톤부터 수출하기로 했으니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2천 톤 수출이 성사될 경우 빈사 상태인 국내 녹차산업은 활로를 찾게 될 것이란 관측이다. 3백억 원 이상의 새로운 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억새만 무성한 임덕순 할머니의 차밭도 그대로 방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층을 겨냥한 새로운 녹차 제품도 시도되고 있다. 다도를 배제한 간편한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블랜딩 녹차가 대표적이다. 녹차 티백에 다양한 허브 향을 첨가해 간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제조한 것이다. 컵에 넣고 여러 번 물을 부어 마실 수 있다. 가루녹차를 의미하는 말차(抹茶)도 제조되고 있다. 일본녹차의 대표처럼 인식돼 왔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말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고 우리도 고려시대도 말차를 마신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녹차를 가루 내는 방식에서 진일보 했다. 재배 시부터 쓴맛을 줄이기 위해 차나무에 차양 막을 설치한다. 채취한 잎은 기존의 가루녹차보다 훨씬 입자를 적게 만들었다. 물에 부어서 흔들어 마시면 된다. 녹차의 좋은 점을 가장 많이 흡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모든 도전의 전제는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는 믿음이다. 유기농 재배가 최선이다. 보성군은 100% 유기농 재배를 선언했다. 중국이 우리 녹차 가루를 수입하기로 한 것도 우리의 유기농 제품과 인증을 믿었기 때문이다. 블랜딩 녹차나 말차도 건강에 대한 우려가 있으면 소비자들은 외면할 것이다. 지금도 상당 부분 차 재배는 유기농으로 진행되고 있다. 생산된 제품도 철저한 잔류 농약 검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믿음을 갖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시간을 줄이는 것은 업계 스스로의 노력에 달렸다. 어느덧 생산지에서 관광지로 변하고 있는 남도의 녹차밭들이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기사 출처 : SB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