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6일 일요일

베른, 시간도 강물도 느리게 흘러가는 도시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도시, 베른 (베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을 지나는 아레 강과 홍예다리. 다리 주변에는 곰 공원과 경치를 감상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psh59@yna.co.kr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관광청의 웹사이트 첫머리에는 괴테가 남긴 말이 올라와 있다. "우리가 보았던 도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문장이다. 대문호가 쓴 글귀치고는 꽤나 상투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독일 태생의 괴테가 감탄한 장소는 아마도 장미공원이었을 듯싶다. 괴테가 태어난 프랑크푸르트에는 마인 강이 시내를 관통하고, 대학을 다닌 라이프치히에는 기다란 저수지가 있다. 두 도시 모두 물길이 있지만, 베른의 아레 강만큼 흐르는 광경이 극적이지는 않다. 

초록빛 아레 강은 예천 회룡포를 휘도는 내성천처럼 구시가에서 급격하게 휘어진다. 그래서 베른 구시가는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곶을 연상시킨다. 강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베른의 풍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이 장미공원이다.

장미공원은 명칭대로 220여 종의 장미가 만발하는 시민들의 휴식처다. 장미 외에도 붓꽃과 철쭉 등 형형색색의 꽃이 봄부터 가을까지 개화한다.

장미공원에서 내려다본 베른 시가지 (베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베른 장미공원의 벤치에서 연인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성당을 중심으로 붉은색 지붕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psh59@yna.co.kr
이곳은 본래 묘지였으나, 20세기 초에 조경이 예쁜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볕이 좋은 날이면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눕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공원의 나지막한 울타리에 걸터앉아 시선을 멀리 두면 첨탑 주위로 건물이 옹기종기 들어선 정경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유유히 흐르는 아레 강이 펼쳐진다.

장미공원에서 레스토랑을 지나 나무와 풀이 우거진 좁은 내리막길을 가면 곰 공원이 나타난다. 곰은 도시의 어원이자 문장으로 활용되는 동물이다.

1191년 베른의 기초를 놓은 베르히톨트 5세가 사냥을 나섰다가 처음 발견한 동물이 곰이어서 지명이 '베른'으로 결정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독일어로 곰의 복수형은 '베렌'(Baeren)이다. 

기차역 위치에 있었던 곰 공원은 19세기 중반 오늘날의 자리로 옮겨졌다. 공원의 갈색 곰들은 집중적인 이목을 받는 명물이다. 초지에서 뛰놀고 물에서 멱을 감을 때마다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온다.

장미가 만발한 베른 장미공원 (베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장미공원은 베른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꽃이 피는 시민의 휴식처다. psh59@yna.co.kr
곰 공원에서 홍예가 아름다운 석조 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시가로 진입하게 된다. 베른 구시가는 1983년 스위스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일관성 있게 도시 계획을 추진했고, 15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축물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고 평가했다. 또 현대의 도시 기능을 추가하면서도 오래된 구조를 온전히 지켜냈다는 점에 대해서도 높이 샀다. 

과거와 현재의 조화는 구시가에 발을 딛는 순간 느껴진다. 4∼5층 높이의 예스러운 건물 사이로 길이 뻗어 있고, 바닥에는 작은 돌조각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전깃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끝없이 걸려 있다. 이 줄은 전기버스에 동력을 전달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주민과 길손의 편의를 위해 미관을 다소 해치더라도 교통 설비를 구축한 셈이다.

베른 구시가의 건물은 모양이 대동소이하다. 1층에는 아치 안쪽에 아케이드가 있고, 위층은 길쭉하고 좁은 창문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다. 그리고 창문 앞에는 빨간색, 분홍색 꽃을 피운 제라늄 화분이 있다.

시계탑이 보이는 베른 구시가 (베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베른 구시가에는 아케이드가 있는 4~5층 건물이 늘어서 있다. '치트글로게'라 불리는 시계탑과 분수가 역사를 대변한다. psh59@yna.co.kr
외벽은 흰색과 회색, 옅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깔끔하면서도 건조한 인상을 준다. 그나마 군데군데 놓인 제라늄 덕분에 화사하고 산뜻한 기운이 감돈다.

구시가 건물은 대부분 18세기에 복원됐지만, 거리에는 16세기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분수가 산재해 있다. 베른에는 100개가 넘는 분수가 있는데,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다. 분수마다 색상이 화려한 동상이 서 있어서 미술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아케이드의 역사는 분수보다 더 장구하다. 열주를 세우고 안쪽에 개방 통로를 조성한 아케이드는 15세기에 만들어졌다.

비나 눈이 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걸을 수 있고, 햇빛이 따사로운 날에는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바깥을 내다볼 수 있다. 베른의 아케이드를 모두 연결하면 6㎞에 이르는데, 유럽에서 길이가 가장 길다.

베른 구시가에서 눈여겨봐야 할 옛 건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베른 성당, '치트글로게'(Zytglogge)라 일컬어지는 시계탑, 감옥탑 등이다.

유럽에서 가장 긴 베른의 아케이드 (베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베른 구시가의 건물 1층은 아치가 있는 아케이드다. 덕분에 눈비가 와도 편하게 거리를 돌아볼 수 있다. psh59@yna.co.kr
스위스에서 가장 큰 기독교 건물인 베른 성당은 1421년에 착공해 500년 가까이 공사가 지속됐다. 특히 첨탑은 19세기 말에 완성됐는데, 지난해 외부 타일을 교체하는 보수 작업이 끝났다.

계단 344개를 올라 높이가 100m에 달하는 탑에 이르면 장엄한 설산에 둘러싸인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정문과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실내도 눈길을 끈다.

시계탑은 베른이 건설된 12세기 말에 도시의 서문(西門)으로 세워졌다. 당시에는 베른의 영역이 동서로 900m, 남북으로 450m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시가 점차 발전하면서 경계선이 점점 서쪽으로 확장됐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망루로 감옥탑이 축조됐다. 성문의 역할을 상실한 치트글로게는 잠시 교도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치트글로게에 시계가 부착된 때는 화재를 겪고 난 뒤인 15세기 초반이다. 그러다 1530년에 지금과 같은 거대한 천문시계가 탑신에 달렸다. 이 시계는 시간뿐만 아니라 태양과 달의 궤도, 별자리까지 알려주는 첨단 발명품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집 (베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아인슈타인은 1902년부터 7년 동안 베른에 머물며 논문을 집필했다. 시계탑 근처에는 그가 살았던 집 중 하나가 남아 있다. psh59@yna.co.kr
시계가 보편화된 이제는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은 명소가 됐는데, 정각이 되기 약 5분 전부터 각종 인형이 나와 흥미롭고 익살스러운 공연을 선보인다.

베른 성당과 시계탑 사이에는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집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출생해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공부한 뒤 베른의 연방 특허청에 취업했다.

그는 1902년부터 7년간 베른에 머물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21세기의 지식 혁명을 불러온 논문인 '특수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그의 집에서 지척이었던 치트글로게가 상대성이론을 떠올리는 데 영향을 줬다는 설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베른에서도 여러 곳을 전전했다. 일반에 개방된 아인슈타인의 집은 그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2년 동안 아내와 함께 거주했던 장소다. 가구와 집기가 과거 모습대로 꾸며져 있고, 다양한 사진과 자료가 전시돼 있다.

베른 구시가를 여기저기 거닐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치즈 산지로 유명한 에멘탈로 나들이를 떠나도 좋다. 에멘탈 치즈는 치즈 소비량이 많은 스위스에서도 첫손에 꼽히는데, 안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고 조금 단단한 편이다.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에멘탈에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 치즈 생산 공정을 들여다보고, 치즈를 주재료로 조리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또 박물관 순례도 가능하다. 중세시대부터 20세기까지의 물품과 서류가 보관돼 있는 부르크도르프 박물관과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린 화가인 프란츠 게르치(Franz Gertsch) 박물관이 있다.
<기사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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