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헤밍웨이도 단골이었던 파리의 서점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 김윤주

"그 무렵 무척 가난했던 나는 오데옹 거리 12번지에 있는 실비아 비치의 대여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책을 빌리곤 했다. 겨울이 되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쌀쌀한 거리에 있는 그 서점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입구에 커다란 난로를 피워 놓았다. 따뜻하고, 쾌적하고, 멋진 곳이었다." 

서점을 처음 발견한 날, 헤밍웨이는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와 D.H.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을 집어 들었다. 곁에 있던 실비아는 "원한다면 다른 책을 더 빌려가도 돼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헤밍웨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도스토옙스키의 <도박꾼과 그외 단편들>을 더 골라 들었다. 

집에 돌아온 헤밍웨이는 아내 해들리에게 한아름 빌려온 책들을 보여 주며 낮에 만난 서점과 주인 이야기를 쏟아낸다. 사랑스런 신부 해들리는 미소 띤 얼굴로 "그러지 말고 어서 가서 돈을 내고 와요"라고 말하고, 헤밍웨이도 그러마 대답한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어도 둘은 낯선 도시에서 얻은 뜻밖의 행운에 한껏 흥분해, 모처럼 좋은 와인도 사고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먹자는 둥, 한눈팔지 말고 서로만 사랑하자는 둥, 들뜬 약속을 나눈다. 가난한 신혼부부에겐 참으로 따뜻한 저녁이었을 게다. 

내가 그 책방에 처음 간 건 파리에서의 두 번째 날, 비에 젖은 늦은 밤이었다. 초록색과 노란색의 따뜻한 간판을 찾아내기까지는 야속하게도 많은 골목들을 헤매야 했다. 

파리 시내 지도는 현실 세계에 대입하면 거리와 거리 사이를 예측한 것보다 훨씬 덜 가야 목적지에 다다른다. 파리의 면적이 서울의 6분의 1 수준이라니 서울에서의 공간 감각을 그대로 적용해 파리시 지도의 지명과 도로 간 거리를 가늠하면 흔히 생겨나는 오류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가기로 작정하고 시테역에 내린 건 그리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생 미셸 노트르담역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시테 섬 일대를 먼저 돌아볼 참이었기 때문이다. 지도에 나온 대로 노트르담 성당 앞 작은 다리(Petit Pont)를 건너 조금만 더 가면 서점이 있어야 마땅했다. 

혹시 헤매게 된다 해도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면 "아! 거기? 헤밍웨이가 자주 다녔다는 그 오래된 서점 말이지?"하며 대답해 줄 거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건 웬걸. 책방은 나타나지 않았고, 뜻밖에도 내가 만난 파리 사람들은 그 유명한 전설의 서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두어 명 젊은이들의 난감한 표정을 만나고 골목과 골목을 어지간히 헤매고 난 후에야 근근이 서점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면 이 거만하고 차가운 도시 파리에서 모국어로 된 책을 쌓아둔 공간은 그 자체로 정말 감동이었겠다. 밤거리를 헤매다 찾아낸 서점은 내게도 감동이었다. 노란색과 초록색 간판이 따뜻해 보였다.   

누구나 머물며 글 쓸 수 있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 김윤주

헤밍웨이가 서점을 처음 발견한 날 그랬던 것처럼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빼곡히 책들이 가득하다. 바닥에 쌓아 올린 책들도 천장에 닿을 지경이다. 선반에는 오래된 책들이 꽂혀져 있다. 통로와 기둥 사이로 작은 공간들이 있고 벽에는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다. 눈에 익은 작가들 모습이다. 책장과 선반 사이를 조심조심 움직여야 한다. 

좁은 계단을 올라간다. 푹신한 소파가 곳곳에 놓여 있고 사람들은 제집처럼 몸을 뉘인 채 책을 읽고 있다. 책 더미 사이로 오래된 타자기가 놓여 있고, 저쪽엔 낡은 피아노도 보인다. 물건과 공간의 용도가 무의미하다. 다만 책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을 뿐이다. 

안쪽 구석진 공간에 작은 탁자가 놓여 있다.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으니 네모난 작은 창으로 젖은 파리가 들어온다. 창밖으로 센강이 흐르고 구석진 다락방 창문가엔 낡은 나무 책상이 놓여 있으니, 이곳에선 절로 글자들이 춤을 추며 문장이 되고 단락을 이뤄 한 편의 글이 될 수 있겠다 잠시 생각했다. 

청바지에 까만 재킷을 걸친 늘씬한 여자가 두리번거리던 나의 눈과 마주쳤다. 의자들을 둘러 세우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길래 물었더니, 오늘밤 글쓰기 워크숍이 있을 예정이란다. 모임의 리더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짧은 눈인사를 나누고 아쉬움을 묻어둔 채 그곳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오며 보니 한쪽 구석에 알록달록한 메모와 편지들이 잔뜩 붙어 있다. 나도 그곳에 앉아 노란색 포스트잇에 짧은 편지를 써 붙여 두고 나왔다. 손에는 나를 이곳으로 이끈 헤밍웨이의 바로 그 책 'A Moveable Feast'(국내 번역서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들려 있었다. 13.5유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오래된 책방이다. 우리에겐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비포 선셋>에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10년 만에 해후하는 애잔한 첫 장면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 온 실비아 비치(Sylvia Beach, 1887~1962)는 이 서점의 첫 주인이다. 1919년에 처음 문을 열고 1921년 오데옹 거리(Rue de l'Odeon) 12번지로 옮겼는데 마침 그때는 젊은 헤밍웨이가 파리에 막 도착한 시기였다. 

구하기 어려운 영어로 된 수많은 책, 따뜻한 스프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이곳은 고국을 떠나온 가난한 젊은 작가들의 포근한 아지트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금지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is)>를 1922년 출간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문을 닫고 지친 실비아도 은퇴해 버려 서점은 역사 속 이야기로 남는가 싶었다. 

그런데 10년 후 미국의 방랑 시인 조지 휘트먼이 오데옹 거리에서 멀지 않은 이곳, 노트르담 성당 근처 센 강변 뷔셰리 거리(Rue de la Bucherie) 37번지에 비슷한 서점을 다시 연다. '미스트랄(le Mistral)'이었던 서점의 이름을 1964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바꾸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다. 

2011년 그도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그의 딸 실비아 휘트먼이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전히 열댓 개의 침대를 두고 누구라도 머물며 글을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에세이 한 편, 매일 책 한 권씩 읽기, 서점 일 돕기 따위가 자격 조건이라니 꿈같은 이야기다. 이미 4만 명이나 머물다 갔다면 더 이상 몽상가의 꿈도 아니다. 

이쯤 되면 이곳은 그저 오래된 책방이 아니다. 조지 휘트먼이 말한 대로 '서점으로 가장한 사회주의자들의 낙원'이고, '세 글자로 된 한 편의 소설(a novel in three words)'이다. 
<기사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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