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진 대학로극장 대표는 “연극을 잃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이라며 “여러 창작품을 올릴 수 있는 소극장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ㆍ지난달 문닫은 ‘대학로 극장’ 정재진 대표, 허망함 토로
19일 서울 종로구 이화4거리 ‘대학로극장’. 큼지막한 간판 글씨는 벗겨졌고, 굳게 닫힌 쇠창살 입구에는 검정 비닐 쓰레기봉투들이 만장처럼 널려 있었다. 적자를 못 이겨 지난달 말 문을 닫은 ‘대학로극장’의 정재진 대표(62)는 “연극은 끝났고, 무대는 사라졌으며, 대학로는 죽었다”고 말했다. 28년간 지켜온 대학로 연극문화의 자존심이 비싼 임대료 앞에 무너진 심경을 전하는 정 대표의 표정에는 ‘결기’보다는 ‘허망함’이 묻어났다.
1987년 처음 극장이 들어설 때만 해도 대학로는 한적한 주택가였다. 공연장이라곤 ‘샘터 파랑새’(1984) ‘연우 소극장’(1987)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학로에 연극인들이 모여 들면서 생동감이 넘쳐났다. 대학로 극장이 무대에 올린 <돈내지 맙시다> <관객 모독> <불 좀 꺼주세요> <늙은 창녀의 노래> 등은 연일 매진사례였다.
1997년 외환위기도 버텨냈지만 2004년 서울시 문화지구 지정에 발목이 잡혔다. 건축 기준·세금 완화 등으로 건물 주인은 혜택을 입었지만 연극인들은 빚쟁이가 됐다.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과 대학들이 공연장 부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50개였던 소극장이 140개로 늘어났다. 땅값은 치솟았고, 소극장 임대료는 뛰었다. ‘학전그린’ ‘배우세상’ ‘정보’ ‘상상아트홀 1·2관’ ‘열린극장’ ‘플레이하우스’ 등 소극장들이 월세를 내지 못해 속속 문을 닫았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250석 이상의 공연장만 살아남겠지요. 상업주의에 눈이 멀었으니 야한 로맨틱 코미디로 무대가 채워질 것입니다. 천민자본을 앞세운 시장논리에 순수 연극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정 대표는 “다양한 작품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소극장이 없어지는 것은 한국 문화예술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했다.
소극장은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무대다. 남들이 하지 않은, 기존에 없던 창작극을 적은 예산으로 올려볼 수 있어서다. 연극은 관객과 순간순간을 교감하는 소통의 예술이다. 객석의 박수갈채에 따라 막이 오르는 게 연극이다.
정 대표는 “연극은 서로 마주보고 호흡하는 인문정신의 종착점이기에 과학이 발달할수록 사라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무한 복재시대에 소극장이 경쟁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기본을 버리고서는 어떠한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소극장의 역사가 10년을 넘으면 역사성과 공공성을 인정해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연극을 사랑하는 국민들이 많아지면 사회가 풍요로워집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왜 수익금의 일부를 보조해주거나 저렴하게 공연장을 빌려줄 수 없는 것일까요.”
그는 대학로에서는 밀려났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오는 7월25일에는 ‘극단 76’과 함께 충북 단양군 만종리에 ‘제2의 대학로극장’을 열 계획이라고 했다. 생태마을을 조성해 무농약 농사도 짓고, 장어와 미꾸라지도 키우고 싶다고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를 따라 대학로 서울시 문화재단 지하 연습실을 찾았다. 다음달 서울연극제에 올릴 <물의 노래> 연습이 한창이었다.
배우들은 혼신을 다해 연기에 몰입했지만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인근 대형 공사장의 소음 때문이다. 소음이 연극인들의 대사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게 대학로 소극장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기사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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