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마케도니아의 디온(Dion)은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의 출정식을 열었던 곳이다. 기원전 334년 봄 그리스 중부 동해안 인근의 작은 도시였던 디온은 동방원정에 오를 마케도니아 군대와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에서 파견한 병사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왜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가 아닌 디온에서 출정식을 개최했을까?
성산(聖山) 올림포스, 동방원정의 출정을 지켜보다
디온은 12신이 거주하는 성산(聖山) 올림포스에서 지척이다. 디온 바로 옆에는 해발 2,917미터에 달하는 올림포스 산이 웅장하고 신비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올림포스 성역 인근에서 출정함으로써 정벌군이 그리스 세계를 대표한다는 의미를 새기고 신의 가호를 빌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보낸 보병 및 해군,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보병 및 기병대가 집결하기 용이한 중간 지점이라는 현실적 이유에서 이곳이 선택되었는지도 모른다.
동방원정의 출정식이 있었던 디온 유적지에서 바라본 올림포스 산정, ⓒ박경귀
알렉산드로스는 출정에 앞서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디온에서 9일간의 축제를 열었다. 축제는 9명의 무사이(Musai)에게 바쳐졌다. 또 축제기간에는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올림포스 산정을 바라보며 최고신 제우스에게 희생물을 바쳤을 것이다.
동방원정은 애초에 알렉산드로스가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부왕인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추진되었던 국가적 전략사업이었다. 필리포스는 3차례에 걸쳐 그리스를 침공했던 페르시아에 복수하기 위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코린트 동맹으로 결속시키는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그 후 기원전 336년 봄에 원정대를 파견하여 마케도니아 군이 소아시아 지역에 상륙할 수 있는 기지를 마련하도록 했다. 페르시아의 전력을 탐색하는 전초전 성격도 띠었을 것이다.
기원전 336년 여름이 되자 필리포스 2세는 대대적으로 동방원정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던 중 마케도니아의 첫 수도였던 아이가이에서 열린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축하연에서 갑자기 암살당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이 계획한 동방원정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할당한 병력을 보충 받아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Andre Castaigne의 1898-1899년 작
올림포스 산 바로 아래에 있는 고대 도시 디온은 마케도니아의 영광의 역사와 몰락의 역사를 함께 지켜 본 도시이다. 디온에서 이미 기원전 348년에 필리포스 2세의 승전 기념식이 열렸었다. 마케도니아는 트라키아 지방의 올륀토스(Olynthos)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디온에서 그 기념식을 올린 것이다. 올륀토스는 처음에 아테네에 대항하기 위해 마카도니아와 손을 맺었다가, 훗날 마케도니아의 급속한 성장에 위기감을 느끼자,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에 맞섰다. 하지만 욱일승천하는 마케도니아를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 세계의 제패를 기념했던 이곳 디온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원정군의 규모는 의외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쓴 루푸스에 의하면, 보병이 32,000명, 기병이 4,500명이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함선 약 180척이 참전한 것 같다.
이 정도의 규모는 수십만 명의 군사 동원 능력을 가졌던 페르시아의 국력에 비교하면 작은 군세이다. 루프스는 페르시아의 전력은 31만 6,20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매번의 전투에서 전체 전력이 참가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페르시아 군이 수적 우위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군대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알렉산드로스의 보병은 팔랑크스 밀집전법에 숙달된 정예 병사였다. 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으로 구성된 기병대 역시 자부심으로 응집력이 강했고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출병 전에 페르시아군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군사적 우위를 자신했던 것 같다.
‘알렉산더 모자이크’, 알렉산드로와 다리우스의 대결을 그리다
이곳 디온에서 출발한 원정군은 육지와 해상의 숱한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소아시아 지역을 넘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방원정에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활약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여러 전기에 전해진다. 그러나 동방원정 당시의 전투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희귀하다.
현존하는 유일한 유물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가 참전한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이다. 이수스(Issus)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전 333년 11월 소아시아 실리시아의 이수스 부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대왕의 친위 기마대 등 정예군이 참전했지만, 전투의 최일선에 나선 알렉산드로스의 용맹과 마케도니아 군의 전술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에레트리아의 필로크레노스(Philoxenos)는 이수스 전투 장면을 모자이크 벽화로 묘사했다고 한다. 작품은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에게 헌정되었고, 펠라 왕궁에 장식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원작은 소실되었다. 이 작품은 마케도니아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더구나 알렉산드로스의 전투 장면을 당대에 묘사한 유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미 복제품이 여럿 제작되어 여러 도시로 퍼져 간 것 같다. 그리스 예술 작품을 열광적으로 복제했던 로마인 덕분에 우리는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폼페이에 있는 목신(牧神) 파우누스(Faunus) 사당의 벽면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의 정치가나 장군 가운데에도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활동을 흠모했던 이가 많았으니 로마의 황궁이나 어느 별장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꼭 보기 위해 지난 2월에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다시 방문해야했다. 2014년 5월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나폴리까지 갔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관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알렉산드로스에 관련한 도서에 반드시 들어가는 그림이다. 그 이미지는 사람들의 눈에 널리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필자는 도상(圖上)으로가 아니라 직접 그 장면을 대면하고 싶었다. 이 작품이 테살로니키나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다면 이탈리아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 작품은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 우선 ‘알렉산더 모자이크’ 별실에 들어서면 벽면 전체를 채운 거대한 벽화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길이 5.82미터, 높이 3.13미터의 대형 벽화다. 알렉산드로스와 그리스 군 진영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알렉산드로스의 상반신과 말머리 부분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은 기원전 4세기 후반에 1831년에 발굴되었고, 훼손 방지를 위해 유리막으로 보호하여 전시되고 있다.
이 작품에 드러난 전투 상황을 살펴보자. 훼손된 부분을 추정하여 복원한 그림을 함께 보면 좋을 듯싶다. 타오르는 듯 강렬한 눈빛에 휘날리는 머리칼, 입을 굳게 다문 알렉산드로스는 마상(馬上)에서 긴 창으로 적군의 찌르며 용맹스럽게 적진을 돌파하고 있다. 반면 장창을 든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저돌적 기세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가운데 이미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있다. 두 인물의 대조적인 표정 묘사가 정교하다.
‘알렉산더 모자이크‘, 이수스 전투 장면을 묘사한 대형 모자이크 벽화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세부, 알렉산드로스의 얼굴 표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세부, 다리우스 3세가 탄 마차의 마부는 말을 채찍질하며 달아나려하고 있고,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를 뒤돌아보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벽화의 그림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이는 실제 상황과는 다를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쪽 군대의 복식을 보면, 페르시아 군의 경우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특별한 흉갑을 입지 않았다. 반면에 그리스 군의 경우 투구와 청동 또는 철제의 흉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제에 부합되는 장면이다. 신체 보호 장구를 제대로 갖춘 그리스 군은 백병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을 것이다.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세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흉갑을 갖추지 않은 페르시아 군의 모습,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를 추정 복원한 그림의 일부, 그리스 군이 투구와 흉갑,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했음을 보여준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를 추정 복원 그림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언젠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의 경로를 따라가는 답사여행을 하고 싶다. 작년 9월 터키 지방의 고대 그리스 유적 도시를 답사하면서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리키아(Lukia)와 팜필리아(Pamphilia) 지방의 몇몇 도시를 둘러보긴 했지만, 바빌론과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그의 행군 경로를 따라 가보지 못했다. 그리스 로마 문명 답사를 마무리하면 내년에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복으로 마케도니아는 대제국을 일구지만, 기원전 168년 퓌드나에서 벌어진 로마제국과의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종말을 고했다. 올림포스 산 기슭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Perseus) 왕은 로마의 장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 ?~기원전 160년)에게 완패하여 포로가 된다.
페르세우스는 과거 마케도니아의 영웅들과 딴판으로 용렬한 인물이었다. 플루타르크의 '비교열전'은 이렇게 전한다. 페르세우스는 포로가 되어 아이밀리우스를 보자 비굴하게 땅에 엎드리며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아이밀리우스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분,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것마저 저버리고 이런 모습을 보이시오? 당신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같은 불행을 겪은 것이오. 당신은 지금 로마의 적답게 행동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 나의 승리까지 가치 없게 만들고 있소. 어떤 괴로움에 처해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는 법이오. 그러나 로마 인은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비굴한 사람은 경멸합니다."
그렇다. 페르세우스는 한 때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으로서 품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 아이밀리우스 장군의 개선식에서 포로의 행렬 속에서 로마 시민들의 조롱을 받고 옥사했다. 그때까지 군사력에서 로마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마케도니아이지만, 비겁하고 용렬한 왕으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디온의 신성한 올림포스 산은 알렉산드로스의 당당한 출정식에서부터 퓌드나의 처참한 패배까지 마케도니아의 흥망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셈이다.
‘페르세우스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포로가 된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가 아이밀리우스 장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Jean-Francois-Pierre Peyron(1744~1814)의 1802년 작,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디온은 마케도니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인근의 올림포스 성역을 배경으로 나름대로 번영을 구가한 도시였다. 거대한 디온의 도시 유적이 이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디온에는 데메테르 신전과 아스클레피에이온 신전, 그리고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여러 개의 신전이 있었다. 하지만 5세기경 극심한 지진이 발생해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도시의 각종 건축물의 주춧돌만 볼 수 있다.
디온의 도시 유적 가운데 예전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가지의 중심도로이다. 거대한 돌로 포장되어 있다. ⓒ박경귀
디온의 도시 유적 ⓒ박경귀
디온의 도시 유적 ⓒ박경귀
디온의 도시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헬레니즘 시대를 연 마케도니아 전성기의 문화적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유물 몇 개가 주목을 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와 중동지역, 이집트 전역을 모두 정복하자, 동방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교류와 혼합이 촉진되었다. 그리스에 이집트 종교가 들어와 이집트의 토착신이 그리스에서도 숭배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디온의 도시 유적에서 이시스(Isis) 여신상과 하포크라테스상이 발굴된 것을 보면 헬레니즘 시대의 마케도니아 여러 도시에서도 이집트 신 숭배가 퍼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은 이시스와 오시리스(Osiris)이다. 이시스는 오시리스 신의 여동생이자 아내로 오시리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널리 숭배되었다. 이시스 여신은 원래 나일 강 북쪽 지역에서 숭배되던 어머니 신이었다. 나일 강을 주관하는 신이자 풍요의 신이었다. 그리스 신 가운데 데메테르 신에 해당된다.
디온의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된 이시스 여신의 부조를 부면, 오른손에 풍요를 상징하는 곡식 다발을 들고 있고, 머리에는 갓이 큰 모자에 둥근 원반이 얹어져 있는 기묘한 모습이다. 그리스 토착 신에게서 볼 수 없던 형태다. 이집트에서 원반 형태의 왕관을 쓴 형상으로 묘사되던 양식이 그리스에 유입되면서 변형된 모습 같다.
이시스 여신,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된 부조이다. 오른손에 풍요를 상징하는 곡식 다발을 들고 있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의 통치자로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판관이었다. 그리스의 하데스 신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고,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면서 디오뉘소스 신과도 관련이 된다. 오시리스는 2개의 깃털이 달린 머리 장식을 쓰고, 양손에는 갈고리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오시리스 역시 그리스로 유입되면서 상징 지물인 갈고리와 도리깨는 사라지고 곱슬머리를 한 그리스적 얼굴 형상으로 바뀌어 묘사된다.
오시리스의 대리석상, 2개의 깃털이 달린 머리 장식을 쓰고, 양손에는 갈고리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 전형적인 오시리스의 형상이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새 왕조를 창건하고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집트의 전통 신들이 마케도니아에 유입된 것 같다. 오시리스 숭배는 그리스로 혼입되면서 세라피스(Serapis)로 알려졌고, 헬레니즘 시대를 넘어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숭배되었다. 그리스와 로마가 이민족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던 문화적 유연성에 힘입은 것이다.
사라피스 신의 두상, 이집트에서 숭배된 오시리스의 형상과 많이 다르다. 150~200년 사이 작품,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시스와 오시리스가 그리스에서도 숭배되면서 이 두 신의 아들인 호루스(Horus) 또한 함께 숭배되었다. 이집트의 호루스는 그리스로 넘어와 하포크라테스로 불렸다. 호루스는 이시스와 오시리스와 함께 가장 숭배된 삼신(三神)으로 태양신으로 상징되었다. 매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 가운데 아폴론과 같은 격이다. 그리스에서 하포크라테스는 아침 해를 의미하며 어둠을 쫓아 버리는 태양의 신 또는 승리의 신으로 여겨졌다. 또 하포크라테스는 아이들과 그 모친의 특별한 수호신이기도 했다.
매의 형상이다. 호루스 신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그리스 국가였던 지중해의 섬 크레타가 제일 먼저 이집트 종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크레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하포크라테스 상이다. 디온의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 2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디온의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된 여인 초상 두상, 1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케도니아의 도시 디온은 헬레니즘 시대를 풍미하던 다양한 모자이크 작품으로 저택의 중정이나 벽면을 장식했다. 디온 도시 유적과 고고학 박물관에서 몇몇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작품 가운데 특이한 작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레다의 집에서 발굴된 레다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한 대리석 조각이다.
제우스와 레다의 사랑으로 낳은 자식이 바로 쌍둥이 두 형제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두 자매 클리타임네스트라, 헬레네였다. 두 형제는 디오스쿠리(Dioscuri)로 불리며 용맹함에서 그리스인들의 폭넓은 사랑은 받았고, 두 자매는 그리스 최고의 미모로 이름을 날렸다. 이 신화의 주제는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예술적 모티브였다.
모자이크 작품, ‘조하스의 집‘으로 불린 곳에서 발굴되었다. ’조하스에게 행운을(for lucky Zosas)‘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모자이크 작품, ‘조하스의 집‘으로 불린 곳에서 발굴되었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고대 도시 디온의 한 저택을 장식한 모자이크 ⓒ박경귀
‘레다와 백조‘, 백조로 변한 제우스가 레다를 겁탈하고 있다. 디온의 ‘레다의 집’에서 발굴, 2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사자머리를 새긴 대리석 다리 장식, 2세기 작품, ‘레다의 집’에서 발굴, 2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또 하나의 유물은 그리스 전역에서 유일한 작품이다. 디온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애지중지하는 유물이다. 하이드롤리스(Hydraulis), 즉 수압 오르간이다. 파이프 오르간의 원조가 된 세계 최초의 오르간 유물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24개의 굵은 관과 16개의 가는 관을 물을 가득 채운 통과 연결하여 공기의 압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파이프 관이 소리를 내도록 한 악기였다.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크테시비우스(Ctesibius)가 발명했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최고의 고급 악기였던 이 악기는 귀족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로마에까지 전해져 유행한 최고의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케도니아의 도시 디온 역시 상당한 수준의 문화생활을 즐긴 번성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의 수압 오르간 유물, 파이프의 일부만 남았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고대의 수압 오르간을 연주하던 모습을 추정한 복원도,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수압 오르간의 구조를 추정한 복원도,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장
데일리안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기사 출처 : 데일리안>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마케도니아의 디온(Dion)은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의 출정식을 열었던 곳이다. 기원전 334년 봄 그리스 중부 동해안 인근의 작은 도시였던 디온은 동방원정에 오를 마케도니아 군대와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에서 파견한 병사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왜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가 아닌 디온에서 출정식을 개최했을까?
성산(聖山) 올림포스, 동방원정의 출정을 지켜보다
디온은 12신이 거주하는 성산(聖山) 올림포스에서 지척이다. 디온 바로 옆에는 해발 2,917미터에 달하는 올림포스 산이 웅장하고 신비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올림포스 성역 인근에서 출정함으로써 정벌군이 그리스 세계를 대표한다는 의미를 새기고 신의 가호를 빌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보낸 보병 및 해군,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보병 및 기병대가 집결하기 용이한 중간 지점이라는 현실적 이유에서 이곳이 선택되었는지도 모른다.
동방원정의 출정식이 있었던 디온 유적지에서 바라본 올림포스 산정, ⓒ박경귀
알렉산드로스는 출정에 앞서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디온에서 9일간의 축제를 열었다. 축제는 9명의 무사이(Musai)에게 바쳐졌다. 또 축제기간에는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올림포스 산정을 바라보며 최고신 제우스에게 희생물을 바쳤을 것이다.
동방원정은 애초에 알렉산드로스가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부왕인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추진되었던 국가적 전략사업이었다. 필리포스는 3차례에 걸쳐 그리스를 침공했던 페르시아에 복수하기 위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코린트 동맹으로 결속시키는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그 후 기원전 336년 봄에 원정대를 파견하여 마케도니아 군이 소아시아 지역에 상륙할 수 있는 기지를 마련하도록 했다. 페르시아의 전력을 탐색하는 전초전 성격도 띠었을 것이다.
기원전 336년 여름이 되자 필리포스 2세는 대대적으로 동방원정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던 중 마케도니아의 첫 수도였던 아이가이에서 열린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축하연에서 갑자기 암살당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왕이 계획한 동방원정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할당한 병력을 보충 받아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Andre Castaigne의 1898-1899년 작
올림포스 산 바로 아래에 있는 고대 도시 디온은 마케도니아의 영광의 역사와 몰락의 역사를 함께 지켜 본 도시이다. 디온에서 이미 기원전 348년에 필리포스 2세의 승전 기념식이 열렸었다. 마케도니아는 트라키아 지방의 올륀토스(Olynthos)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디온에서 그 기념식을 올린 것이다. 올륀토스는 처음에 아테네에 대항하기 위해 마카도니아와 손을 맺었다가, 훗날 마케도니아의 급속한 성장에 위기감을 느끼자,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에 맞섰다. 하지만 욱일승천하는 마케도니아를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 세계의 제패를 기념했던 이곳 디온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원정군의 규모는 의외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쓴 루푸스에 의하면, 보병이 32,000명, 기병이 4,500명이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함선 약 180척이 참전한 것 같다.
이 정도의 규모는 수십만 명의 군사 동원 능력을 가졌던 페르시아의 국력에 비교하면 작은 군세이다. 루프스는 페르시아의 전력은 31만 6,20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매번의 전투에서 전체 전력이 참가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페르시아 군이 수적 우위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군대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알렉산드로스의 보병은 팔랑크스 밀집전법에 숙달된 정예 병사였다. 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으로 구성된 기병대 역시 자부심으로 응집력이 강했고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출병 전에 페르시아군의 전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군사적 우위를 자신했던 것 같다.
‘알렉산더 모자이크’, 알렉산드로와 다리우스의 대결을 그리다
이곳 디온에서 출발한 원정군은 육지와 해상의 숱한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소아시아 지역을 넘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방원정에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가 활약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여러 전기에 전해진다. 그러나 동방원정 당시의 전투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희귀하다.
현존하는 유일한 유물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가 참전한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이다. 이수스(Issus)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전 333년 11월 소아시아 실리시아의 이수스 부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대왕의 친위 기마대 등 정예군이 참전했지만, 전투의 최일선에 나선 알렉산드로스의 용맹과 마케도니아 군의 전술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에레트리아의 필로크레노스(Philoxenos)는 이수스 전투 장면을 모자이크 벽화로 묘사했다고 한다. 작품은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에게 헌정되었고, 펠라 왕궁에 장식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원작은 소실되었다. 이 작품은 마케도니아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더구나 알렉산드로스의 전투 장면을 당대에 묘사한 유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미 복제품이 여럿 제작되어 여러 도시로 퍼져 간 것 같다. 그리스 예술 작품을 열광적으로 복제했던 로마인 덕분에 우리는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폼페이에 있는 목신(牧神) 파우누스(Faunus) 사당의 벽면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의 정치가나 장군 가운데에도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활동을 흠모했던 이가 많았으니 로마의 황궁이나 어느 별장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꼭 보기 위해 지난 2월에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다시 방문해야했다. 2014년 5월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나폴리까지 갔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관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알렉산드로스에 관련한 도서에 반드시 들어가는 그림이다. 그 이미지는 사람들의 눈에 널리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필자는 도상(圖上)으로가 아니라 직접 그 장면을 대면하고 싶었다. 이 작품이 테살로니키나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다면 이탈리아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 작품은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 우선 ‘알렉산더 모자이크’ 별실에 들어서면 벽면 전체를 채운 거대한 벽화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길이 5.82미터, 높이 3.13미터의 대형 벽화다. 알렉산드로스와 그리스 군 진영 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알렉산드로스의 상반신과 말머리 부분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은 기원전 4세기 후반에 1831년에 발굴되었고, 훼손 방지를 위해 유리막으로 보호하여 전시되고 있다.
이 작품에 드러난 전투 상황을 살펴보자. 훼손된 부분을 추정하여 복원한 그림을 함께 보면 좋을 듯싶다. 타오르는 듯 강렬한 눈빛에 휘날리는 머리칼, 입을 굳게 다문 알렉산드로스는 마상(馬上)에서 긴 창으로 적군의 찌르며 용맹스럽게 적진을 돌파하고 있다. 반면 장창을 든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저돌적 기세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가운데 이미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있다. 두 인물의 대조적인 표정 묘사가 정교하다.
‘알렉산더 모자이크‘, 이수스 전투 장면을 묘사한 대형 모자이크 벽화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세부, 알렉산드로스의 얼굴 표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세부, 다리우스 3세가 탄 마차의 마부는 말을 채찍질하며 달아나려하고 있고,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를 뒤돌아보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벽화의 그림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이는 실제 상황과는 다를 것이다. 그의 얼굴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쪽 군대의 복식을 보면, 페르시아 군의 경우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특별한 흉갑을 입지 않았다. 반면에 그리스 군의 경우 투구와 청동 또는 철제의 흉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제에 부합되는 장면이다. 신체 보호 장구를 제대로 갖춘 그리스 군은 백병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을 것이다.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세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흉갑을 갖추지 않은 페르시아 군의 모습,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를 추정 복원한 그림의 일부, 그리스 군이 투구와 흉갑,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했음을 보여준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모자이크’를 추정 복원 그림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언젠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의 경로를 따라가는 답사여행을 하고 싶다. 작년 9월 터키 지방의 고대 그리스 유적 도시를 답사하면서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리키아(Lukia)와 팜필리아(Pamphilia) 지방의 몇몇 도시를 둘러보긴 했지만, 바빌론과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그의 행군 경로를 따라 가보지 못했다. 그리스 로마 문명 답사를 마무리하면 내년에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복으로 마케도니아는 대제국을 일구지만, 기원전 168년 퓌드나에서 벌어진 로마제국과의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종말을 고했다. 올림포스 산 기슭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Perseus) 왕은 로마의 장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lus, ?~기원전 160년)에게 완패하여 포로가 된다.
페르세우스는 과거 마케도니아의 영웅들과 딴판으로 용렬한 인물이었다. 플루타르크의 '비교열전'은 이렇게 전한다. 페르세우스는 포로가 되어 아이밀리우스를 보자 비굴하게 땅에 엎드리며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아이밀리우스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분,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것마저 저버리고 이런 모습을 보이시오? 당신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같은 불행을 겪은 것이오. 당신은 지금 로마의 적답게 행동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여, 나의 승리까지 가치 없게 만들고 있소. 어떤 괴로움에 처해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는 법이오. 그러나 로마 인은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비굴한 사람은 경멸합니다."
그렇다. 페르세우스는 한 때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으로서 품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 아이밀리우스 장군의 개선식에서 포로의 행렬 속에서 로마 시민들의 조롱을 받고 옥사했다. 그때까지 군사력에서 로마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마케도니아이지만, 비겁하고 용렬한 왕으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디온의 신성한 올림포스 산은 알렉산드로스의 당당한 출정식에서부터 퓌드나의 처참한 패배까지 마케도니아의 흥망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셈이다.
‘페르세우스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포로가 된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가 아이밀리우스 장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Jean-Francois-Pierre Peyron(1744~1814)의 1802년 작,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디온은 마케도니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인근의 올림포스 성역을 배경으로 나름대로 번영을 구가한 도시였다. 거대한 디온의 도시 유적이 이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디온에는 데메테르 신전과 아스클레피에이온 신전, 그리고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여러 개의 신전이 있었다. 하지만 5세기경 극심한 지진이 발생해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도시의 각종 건축물의 주춧돌만 볼 수 있다.
디온의 도시 유적 가운데 예전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시가지의 중심도로이다. 거대한 돌로 포장되어 있다. ⓒ박경귀
디온의 도시 유적 ⓒ박경귀
디온의 도시 유적 ⓒ박경귀
디온의 도시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헬레니즘 시대를 연 마케도니아 전성기의 문화적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유물 몇 개가 주목을 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와 중동지역, 이집트 전역을 모두 정복하자, 동방문화와 그리스 문화의 교류와 혼합이 촉진되었다. 그리스에 이집트 종교가 들어와 이집트의 토착신이 그리스에서도 숭배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디온의 도시 유적에서 이시스(Isis) 여신상과 하포크라테스상이 발굴된 것을 보면 헬레니즘 시대의 마케도니아 여러 도시에서도 이집트 신 숭배가 퍼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은 이시스와 오시리스(Osiris)이다. 이시스는 오시리스 신의 여동생이자 아내로 오시리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널리 숭배되었다. 이시스 여신은 원래 나일 강 북쪽 지역에서 숭배되던 어머니 신이었다. 나일 강을 주관하는 신이자 풍요의 신이었다. 그리스 신 가운데 데메테르 신에 해당된다.
디온의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된 이시스 여신의 부조를 부면, 오른손에 풍요를 상징하는 곡식 다발을 들고 있고, 머리에는 갓이 큰 모자에 둥근 원반이 얹어져 있는 기묘한 모습이다. 그리스 토착 신에게서 볼 수 없던 형태다. 이집트에서 원반 형태의 왕관을 쓴 형상으로 묘사되던 양식이 그리스에 유입되면서 변형된 모습 같다.
이시스 여신,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된 부조이다. 오른손에 풍요를 상징하는 곡식 다발을 들고 있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의 통치자로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판관이었다. 그리스의 하데스 신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고,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면서 디오뉘소스 신과도 관련이 된다. 오시리스는 2개의 깃털이 달린 머리 장식을 쓰고, 양손에는 갈고리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오시리스 역시 그리스로 유입되면서 상징 지물인 갈고리와 도리깨는 사라지고 곱슬머리를 한 그리스적 얼굴 형상으로 바뀌어 묘사된다.
오시리스의 대리석상, 2개의 깃털이 달린 머리 장식을 쓰고, 양손에는 갈고리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 전형적인 오시리스의 형상이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새 왕조를 창건하고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집트의 전통 신들이 마케도니아에 유입된 것 같다. 오시리스 숭배는 그리스로 혼입되면서 세라피스(Serapis)로 알려졌고, 헬레니즘 시대를 넘어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숭배되었다. 그리스와 로마가 이민족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던 문화적 유연성에 힘입은 것이다.
사라피스 신의 두상, 이집트에서 숭배된 오시리스의 형상과 많이 다르다. 150~200년 사이 작품,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시스와 오시리스가 그리스에서도 숭배되면서 이 두 신의 아들인 호루스(Horus) 또한 함께 숭배되었다. 이집트의 호루스는 그리스로 넘어와 하포크라테스로 불렸다. 호루스는 이시스와 오시리스와 함께 가장 숭배된 삼신(三神)으로 태양신으로 상징되었다. 매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 가운데 아폴론과 같은 격이다. 그리스에서 하포크라테스는 아침 해를 의미하며 어둠을 쫓아 버리는 태양의 신 또는 승리의 신으로 여겨졌다. 또 하포크라테스는 아이들과 그 모친의 특별한 수호신이기도 했다.
매의 형상이다. 호루스 신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그리스 국가였던 지중해의 섬 크레타가 제일 먼저 이집트 종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크레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하포크라테스 상이다. 디온의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 2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디온의 이시스 신전에서 발굴된 여인 초상 두상, 1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케도니아의 도시 디온은 헬레니즘 시대를 풍미하던 다양한 모자이크 작품으로 저택의 중정이나 벽면을 장식했다. 디온 도시 유적과 고고학 박물관에서 몇몇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작품 가운데 특이한 작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레다의 집에서 발굴된 레다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한 대리석 조각이다.
제우스와 레다의 사랑으로 낳은 자식이 바로 쌍둥이 두 형제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두 자매 클리타임네스트라, 헬레네였다. 두 형제는 디오스쿠리(Dioscuri)로 불리며 용맹함에서 그리스인들의 폭넓은 사랑은 받았고, 두 자매는 그리스 최고의 미모로 이름을 날렸다. 이 신화의 주제는 그리스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예술적 모티브였다.
모자이크 작품, ‘조하스의 집‘으로 불린 곳에서 발굴되었다. ’조하스에게 행운을(for lucky Zosas)‘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모자이크 작품, ‘조하스의 집‘으로 불린 곳에서 발굴되었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고대 도시 디온의 한 저택을 장식한 모자이크 ⓒ박경귀
‘레다와 백조‘, 백조로 변한 제우스가 레다를 겁탈하고 있다. 디온의 ‘레다의 집’에서 발굴, 2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사자머리를 새긴 대리석 다리 장식, 2세기 작품, ‘레다의 집’에서 발굴, 2세기 작품,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또 하나의 유물은 그리스 전역에서 유일한 작품이다. 디온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애지중지하는 유물이다. 하이드롤리스(Hydraulis), 즉 수압 오르간이다. 파이프 오르간의 원조가 된 세계 최초의 오르간 유물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24개의 굵은 관과 16개의 가는 관을 물을 가득 채운 통과 연결하여 공기의 압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파이프 관이 소리를 내도록 한 악기였다.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크테시비우스(Ctesibius)가 발명했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최고의 고급 악기였던 이 악기는 귀족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로마에까지 전해져 유행한 최고의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케도니아의 도시 디온 역시 상당한 수준의 문화생활을 즐긴 번성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의 수압 오르간 유물, 파이프의 일부만 남았다.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고대의 수압 오르간을 연주하던 모습을 추정한 복원도,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수압 오르간의 구조를 추정한 복원도, 디온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장
데일리안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기사 출처 :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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