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고흐도 살았던 몽마르트르, 이게 말해주는 것

가난한 예술가의 언덕 '몽마르트르'


▲ 파리시내 전경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시내 전경,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 시야는 넓지 않았다.
ⓒ 김민수

종일 우중충하던 날씨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이르자 이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하는 듯 비를 내렸다. 11월 17일, 그러니까 11월 13일 파리 테러가 발생하고 닷새째를 맞이한 날이었다.

파리는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그 속내는 마치 종일 우중충한 날씨 같았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는데 마침 비가 내려주니 빗물인양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을 듯하다.

'몽마르트르(Montmartre)'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파리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다. 'Mont'는 '언덕, 산'이라는 뜻이고, 'Martre'는 '순례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몽마르트르는 '순례자의 언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사크레 꾀르 성당 1876년부터 40년에 거쳐 지어진 성당으로,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자존심 회복을 위해 성금으로 지어진 성당이다.
ⓒ 김민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잡은 '사크레 꾀로 성당(Sacre-Coeur)' 안에는 프랑스의 초대 주교인 생드니(Saint Denis) 신부가 자신의 목을 들고 있는 조각품이 있다. 생드니가 자신의 목을 들고 있는 조각품은 이곳 외에도 노트르담 대성당 등 프랑스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8km 거리에는 '생드니성당'이 있다. 프랑스 초대 주교였던 생드니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참수되었지만, 자기의 목을 들고 몽마르트르 북쪽에 위치한 그곳까지 걸어와서 숨을 거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몽마르트르 파리테러 직후라 몽마르트르 언덕에도 중무장한 군인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 김민수

가이드는 다른 날보다 관광객들이 많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파리 테러 이후에 공공장소나 유명 관광지에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중무장한 군인들이 성당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몽마르트르도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었다고 한다. 사실상 테러는 우리 일상에 너무 깊숙히 자리하고 있어서 테러리스트가 테러를 가하고자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 희생자가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나는 운 좋게 테러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생각에 서글펐다.

▲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 거리의 기념품 상가들
ⓒ 김민수

몽마르트르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언덕이라기 보다는 산이었고, 'Mont'의 뜻에는 '산'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몽블랑'은 '설산'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네델란드의 화가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3.30-1890.7.29)일 것이다.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인 그는 살아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가였다. 그가 죽은 후 11년이 지난 후, 파리에서 그림전시회를 한 후 그의 명성은 급상승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고흐가 그린 그림 중에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이라는 그림도 있다. 

고흐와 미술상이었던 그의 동생 테오가 함께 살았던 '반 고흐의 집'은 아직도 몽마르트르에 있다. 몽마르트르는 생제르맹 거리로 예술가들이 떠나기 전 프랑스 문화를 꽃피운 곳이며,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의 카페들 역시도 테라스는 필수다.
ⓒ 김민수

'테르트르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사이에는 기념품점과 카페들이 줄 지어 있다. 골목의 끝에는 파리 시내가 저만치 내려다 보인다.

몽마르트르는 지금은 파리에 속해있지만 처음부터 파리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돈 없는 예술가들이나 파리에서 살 수 없는 도시 빈민들이 슬럼가를 형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황과는 조금 다른지는 모르겠으나, 이른바 파리 근교의 달동네가 몽마르트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았고, 살아 생전에는 늘 가난과 싸워야했던 미치광이 반 고흐도 그곳에서 살았던 것이 아닌가? 물론 언덕에 자리잡은 '사크레 꾀르 성당'의 건축으로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던 정책이 난개발을 막기는 했겠지만, 지금도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예술가의 언덕이 아닌가?

▲ 몽마르뜨 화가들이 모여 작업도 하는 작은 광장 주변의 카페
ⓒ 김민수

'사크레 꾀르 성당'에 대해 조금만 더 부연설명을 한다면 이렇다. 1876년에 건축에 들어간 성당은 40년에 거쳐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자존심 회복을 위해 성금으로 지어졌다.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의 마지감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1월,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면서 빌헬름 1세를 초대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한다.

이런 과정에서 성당이 지어졌던 몽마르트르는 파리의 외곽이었지만 프랑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을 터이고, '순례자'라는 그 이름 역시도 가난에도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 몽마르트르 테러 이후의 몽마르트르 거리는 다소 한산했다. 그곳을 다녀온 뒤로 안 사실이지만, 테러범들의 몽마르트르 테러 계획은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 김민수

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꼭 한 달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여행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아직도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고, 더 많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진이 간직한 여행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여행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은 제2의 여행이다. 비록 보름이 안 되는 시간을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보냈지만, 나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이런 여행도 좋은 여행이 아니런가!

▲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의 화가들, 허가를 받은 이들만 이곳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 주로 작품을 팔고 인물화를 그려준다.
ⓒ 김민수

예술가들의 광장 '테르트르 광장'이다. 이곳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도 판매하고, 인물화 같은 것도 그려준다고 한다. 관에서 허락을 받아야 이곳에서 활동할 수 있는데 하루 수입은 각기 다르겠지만, 가이드에 따르면 대체로 50유로 이상은 될 것이라고 한다.

적지 않은 일당이며, 그 정도면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단다.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으니 치열함이 덜하고 그래서 예술의 깊이를 더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유명한 작가가 되길 갈망하는 이들은 가난해도 이곳에 나오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기도 한단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지만, 자기가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일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일용할 양식을 얻는데 큰 문제가 없는 세상이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람사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르겠다.

▲ 몽마르트르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작업했던 '반 고흐의 집'도 이곳에 있다.
ⓒ 김민수

소강 상태를 보이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은 물론이고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도 비를 피하느라 분주하다. 그때 내가 한국인임을 알았는지 현지인 중 하나가 "빨리빨리" 하며 웃음을 짓는다.

가랑비라 우산도 없이 천천히 걸었는데 아무래도 조금은 더 빨리 걸어야 싶었나 보다.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그 많은 말 중에 '빨리빨리'라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 몽마르트르의 화가 몽마르트르 언덕의 화가, 붉게 물든 파리 시내 전경과 에펠탑이 인상적이다.
ⓒ 김민수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프랑스는 느릿느릿 천천히 사회다. 어쩌면 '빨리빨리'는 우리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다. 우리는 '빨리빨리' 살아오면서 잃은 것이 너무도 많다. 

경쟁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양식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다. 이것은 강자 독식의 사회를 가져오고, 각자도생의 사회를 만들고, 약자들의 아우성을 외면하는 사회를 만든다. 약자들의 아우성을 '소요' 정도로 생각하는 국가는 건강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보면 '약자들의 아우성'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하는 신(하느님)이 등장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아기 예수도 바로 이 '약자들의 아우성'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다.

유럽과 우리나라를 단순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영락없이 산동네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몽마르트르, 그 곳에서 예술가들의 위대한 혼을 만났다.
<기사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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