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장애인의 날… '無用之物' 편의시설]
음향 유도기 고장도 잦아 - 지하철역서 구청까지 150m 가는 데 30분 걸려
편의 시설이 '불편 시설' - 'ㄷ'자로 꺾인 경사로… 휠체어 돌리기 쉽지 않아
장애인 수요·동선 고려해야 - 대형 백화점·종합병원보다 동네 마트·의원 자주 다녀
서울 강북구에 살고 있는 1급 시각 장애인 이원구(49)씨는 최근 구청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진땀을 뺐다. 지하철 수유역 8번 출구에서 내려 150m가량 떨어진 구청까지 가는 길이 천리 같았기 때문이다. 지하철 입구를 나서면서 시작된 시각 장애인용 점자블록이 느껴지지 않아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걸었다. 간신히 건널목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신호등이 없어 몇 분을 망설이다 길을 건넜다. 이씨가 이날 지하철 역에서 구청까지 150m를 가는 데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이씨는 "몇 년 전 도시미관 개선사업을 한다고 구청 주변 보도블록을 새로 갈아엎었는데, 당시 설치돼 있던 점자블록도 함께 사라졌다"며 "교차로 건널목에 설치된 음향신호 유도기도 고장이 잦고 주변 소음에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씨는 이날 구청까지 가는 길은 "공포의 길"이라고 말했다. 인도나 차도에서 언제 장애물과 차가 나타나 자신을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오는 20일 제35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각지에서 기념행사가 이어지고 정부·지자체도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확충을 내걸고 있지만 구청까지 가는 것도 버거운 장애인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인 경우가 적지 않다.
17일 서울 여의도에서 길을 가던 한 시각장애인이 인도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용 점자 블록이 끊긴 지점에서 길을 더듬고 있다. /이태경 기자
특히 최근 장애인 인권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관련법들이 제·개정되면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는 강화되고 있지만 막상 장애인들은 편의를 체감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법'은 일정규모 이상 건축물의 경우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나 점자블록·승강기 등 편의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국 14만개 건축물에 의무적으로 설치되어야 하는 편의시설 630만개 항목 중 실제 설치된 건 67.9%였다. 설치는 됐지만 훼손되거나 법적 기준에 어긋난 불량 시설을 제외하면 설치율은 60.2%까지 내려간다.
17일 전동 휠체어를 탄 지체 장애인이 서울 동작구 한 파출소 입구의 좁고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려 하고 있다. /이기훈 기자
서울에 살면서 고향에 자주 내려가는 시각장애인 손모(여·32)씨는 "고속버스터미널을 이용할 때마다 점자블록이나 안내원이 없는 경우가 많아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교통 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에 따라 각종 여객시설에도 시각장애인 안내시설이 설치돼야 하지만, 해당 법이 제정된 2006년 이전에 들어선 터미널의 경우 이런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법 제정 이전에 지어진 터미널은 법에 정한 편의시설 설치를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의 지난해 조사에서도 전국 버스터미널의 편의시설 적정설치율은 51.5%(철도·지하철역은 82%)로 조사됐다.
500㎡ 미만의 의원(醫院)이나 사무실 등 일정 규모를 넘지 않는 대다수의 민간 건축물은 편의시설 설치가 '권고' 사항이거나 아예 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지체장애 2급 조모(54)씨는 "직장 근처 은행 지점을 갈 때 입구에서 'ㄷ'자로 꺾인 경사로를 통해 들어가려면 직각으로 전동휠체어를 돌려야 하는데 진입로가 좁아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며 "실제 상황에 적합하지 않게 설치된 편의시설은 불편만 가중시킨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장애인의 동선(動線)을 고려해 편의시설 간의 연계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강병근 건국대 건축과 교수는 "취약계층이 많은 장애인에게는 (편의시설 설치의무가 있는) 대형 백화점이나 종합병원보다는 동네 마트나 의원 이용률이 높다"며 "장애인의 수요를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사 출처 : 조선일보>
<기사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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