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역사 66년’
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이 1949년 분단 뒤 66년 만에 양안 지도자 신분으로 처음 정상회담을 하기까지 중국과 대만은 애증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타도해야 할 철천지원수에서 경제협력 강화로, 이른바 ‘차이완’ 시대를 맞기까지 양안 관계는 변화무쌍했다. 이번 양안 정상회담 성사로 중국과 대만은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남북 관계 발전 속도를 앞질렀다.
국민당이 공산당에 쫓겨 대만섬으로 이주한 1949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정부를 수립했다. 장제스 대만 총통은 ‘삼민주의’에 기초한 통일 중국을 지향했다. 그는 대륙과의 접촉도, 협상도, 타협도 없다는 이른바 ‘3불 정책’을 고수했다. 중국 역시 공산당 정권 수립부터 1976년까지 사반세기의 마오쩌둥 집권 기간 내내 무력에 의한 대만 통일을 주장하며 위협을 가했다.
냉전 시기였던 1950년대 중국의 진먼다오 포격 사건은 양안 관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게 했다. 1954년 7월23일 “장제스 집단은 미 제국주의의 지지 아래 구차적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부단히 대륙에 도발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 반드시 타이완을 해방할 것이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사설은 당시 양안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은 1954년 9월 200여문의 야포에서 5000발이 넘는 포탄을 쏘며 1차 진먼다오 포격을 실시했다. 1958년에도 진먼다오에 47만여발의 포격을 가했다. 포격은 60년대 말까지도 수시로 이뤄졌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장제스와 토종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의 성향이 그대로 양안 관계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설계자로 불리는 덩샤오핑이 중국의 실권을 잡고 대만에서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총통이 집권하면서 양안 관계는 개선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통상, 통항, 통신의 ‘3통’ 개방과 경제, 문화, 체육, 과학기술 교류를 제시하면서 양안 관계 개선 시동을 걸었다. 장징궈 대만 총통은 1987년 중국 대륙에 친척이 있는 대만인들의 중국 방문을 허용하는 탐친법(探親法)을 제정하면서 3불 정책을 철회했다. 개혁개방 시기 대만에 인접한 중국의 저장·푸젠성 등에서는 대만 자본의 투자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장제스 25년 ‘3불’ 깬
덩샤오핑-장징궈의 ‘3통’ 로맨스
양안 관계는 민간 교류로 확대
시진핑-마잉주 유례없는 ’밀월’에도
해바라기 운동·우산시위로 역풍
내년 1월 대만 총통선거 변수지만
“민진당 집권해도 큰 변화 없을듯”
중국-대만 연도별 인적교류 및 교역액
1990년대 들어서면서 양안 관계는 민간 교류를 확대하면서 개선 속도를 냈다. 대만과 중국은 1991년 민간교류 단체인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와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를 설립하면서 교류 창구를 개설했다. 1992년에는 구체적인 성과물이 나왔다.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이 공인하는 ‘92공식’에 합의한 것이다. 1993년엔 해협회와 해기회 회담이 시진핑-마잉주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중국 덩샤오핑이나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과 두루 친분이 있던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가 중간에서 다리를 놨다. 싱가포르 쪽은 당시 양안 회담장인 호텔의 엘리베이터 2대를 가동해 회담장에 양쪽 대표단이 동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세심한 준비를 했다. 중국에서는 상하이 시장을 지낸 왕다오한 해협회장이 나왔고, 대만에서는 리덩후이 총통의 측근인 구전푸 회장이 나왔다. 두 사람은 이른바 ‘왕구 회담’을 통해 “정치적 주권이라는 어려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서로 실질적인 교류 협력에 초점을 맞추자”는 데 인식을 같이해 양안 교류를 정례화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 사이에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은 대만의 독립 분위기가 분출하고 하나의 중국을 부정할 때마다 무력 시위를 벌였다. 특히 1995년에는 중국과 대만이 별개라는 양국론을 펴는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미국 방문을 추진하자 대만 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듬해 3월에도 육·해·공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중국은 대만 맞은편 푸젠성에서 대만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자 설명회를 중단하지 않았다.
대만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이 집권한 2000년부터 2008년까지는 양안 관계의 경색기였다. 천 총통은 ‘대만과 중국은 각자의 나라’라는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을 주장하며 중국과 긴장관계를 이어갔다.
양안관계 주요 일지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 강화라는 친중 노선을 내세운 국민당 출신 마잉주 총통이 2008년 집권에 성공하면서 중국과 대만은 사상 유례없는 밀월기를 맞았다. 마 총통은 집권한 뒤 ‘대만의 독립이나 중국과의 통일을 모두 추진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3불’ 정책을 내세웠다. 11월엔 2차 양안회담이 열려 통상, 통항, 통신을 허용하는 대3통(大3通)에 합의했다. 2010년 5월에는 양안이 상호 관광사무소를 개설했고, 한달 뒤엔 5차 양안협상이 열려 중국-대만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에 해당하는 ‘양안경제기본협정’(ECFA)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상품 무역의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서비스 무역 개방, 투자 보장, 분쟁 해결, 지식재산권 보호 등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무역협정이다. 양안은 2012년 중반까지 800개 항목의 상품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했다. 이 무렵 양안 관계의 급속한 발전을 두고 ‘제3차 국-공 합작’ 또는 ‘차이완 시대’라는 말이 나왔다.
2013년 중국 국가주석에 취임한 시진핑 주석도 양안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그는 취임 직후인 2013년 2월과 6월 롄잔, 우보슝 국민당 명예주석을 잇따라 베이징에서 만났다. 지난해 2월엔 중국 난징에서 분단 뒤 65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이 아닌 양안 정부의 장관급 회담이 열려 ‘정치 대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
장즈쥔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과 왕위치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은 상시 대화채널 구축에 합의했다. 시 주석은 올해 5월 마잉주 총통을 이어 새로 국민당 주석에 오른 주리룬 주석을 베이징에서 만나 “어렵게 쌓아온 양안 관계 협력의 성과물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국민당에 힘을 실었다. 9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 70주년 열병식에 롄잔 국민당 명예주석을 초청하면서 항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공로를 일정 부분 인정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양안의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는 급속히 늘어 지난해 1983억달러(214조원)에 이르며 인적 교류도 941만명에 이르렀다.
역풍은 다시 불었다. 대만에서 지나친 중국 경도 현상에 대한 우려가 행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만 대학생들은 지난해 3월 중국과의 급격한 경제협력 확대가 대만의 경제를 중국에 예속시키고 자신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면서 20여일 동안 대만 입법원을 점거하는 ‘해바라기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중국과의 경협으로 대기업만 배를 불렸을 뿐 제조업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일자리는 임금이 저렴한 중국인들에게 빼앗겼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이들은 양안 장관급 회담이 열리는 회담장 밖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여기다 지난해 10월 홍콩을 민주화 열기로 들끓게 했던 ‘우산 시위’의 여파도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다. 중국은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완전 자유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 시위대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들은 “홍콩 민주화 요구의 배후에는 중국을 적대시하는 서방 세력의 개입이 있다”며 이들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속에 주민의 고도자치를 허용하는 제도)를 흔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국양제는 중국이 대만에도 적용하는 제도인 까닭에 대만인들은 중국과의 통일은 자치권이 보장되지 않는 공산당의 통치라는 인식을 지니게 됐다.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대만에서는 이들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게다가 시진핑 집권 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언론 단속과 사상 이념 통제 강화는 대만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 홍콩 시위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중국과의 통일을 지지한다는 답변이 12%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해 11월29일 치러진 대만 지방선거에서 이런 민심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집권 국민당은 전국 6개 직할시와 현, 시 등 22개 단체장 선거에서 단 6석밖에 건지지 못했다. 이는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옮겨온 뒤 최대의 참패로, 당시 대만 언론들은 “국민당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굴곡을 거듭해온 양안 관계는 내년 1월16일로 예정된 총통선거와 입법원 선거(한국의 총선)를 분기점으로 또다시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판세는 민진당의 일방적인 우세다. 국민당은 지난달 총통 후보였던 훙슈주 전 입법원 부원장을 주리룬 주석으로 교체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럼에도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갑절 가까이 그를 따돌리고 있다.
차이 후보는 대만 독립 노선을 내세우거나 92공식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온건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으로선 국민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보다는 달갑지 않다. 중국은 1996년 장쩌민 주석 시절 무력 시위를 통해 대만 독립을 내세운 리덩후이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는 노골적인 수단 대신, 위험 부담이 적은 수단으로 대만 총통선거에 개입하고 있다. 시 주석이 분단 뒤 처음 공산당 총서기 자격이 아닌 국가 지도자 자격으로 마잉주 총통을 만나는 것도 이런 ‘소프트 개입’의 일환이다. 앞서 6월엔 위정성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대만 독립 및 분열 세력은 양안 관계 발전을 가로막고 동포간 결합을 막는 최대 장애물”이라며 “대륙을 오가는 대만 동포들에게 입경 허가증을 면제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중국과 긴밀한 국민당 지지 성향의 대만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훈수다.
한 베이징 외교소식통은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더라도 이미 1000만명에 육박하는 인적 교류와 대만 무역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의 경제적 비중을 볼 때 급격한 대중국 정책 변화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며 “다만, 향후 그가 어떤 대중국 메시지를 던질지, 중국의 반응은 어떨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 출처 : 한겨레>
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이 1949년 분단 뒤 66년 만에 양안 지도자 신분으로 처음 정상회담을 하기까지 중국과 대만은 애증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타도해야 할 철천지원수에서 경제협력 강화로, 이른바 ‘차이완’ 시대를 맞기까지 양안 관계는 변화무쌍했다. 이번 양안 정상회담 성사로 중국과 대만은 모든 면에서 한반도의 남북 관계 발전 속도를 앞질렀다.
국민당이 공산당에 쫓겨 대만섬으로 이주한 1949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정부를 수립했다. 장제스 대만 총통은 ‘삼민주의’에 기초한 통일 중국을 지향했다. 그는 대륙과의 접촉도, 협상도, 타협도 없다는 이른바 ‘3불 정책’을 고수했다. 중국 역시 공산당 정권 수립부터 1976년까지 사반세기의 마오쩌둥 집권 기간 내내 무력에 의한 대만 통일을 주장하며 위협을 가했다.
냉전 시기였던 1950년대 중국의 진먼다오 포격 사건은 양안 관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게 했다. 1954년 7월23일 “장제스 집단은 미 제국주의의 지지 아래 구차적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부단히 대륙에 도발하고 있다. 중국 인민은 반드시 타이완을 해방할 것이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사설은 당시 양안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은 1954년 9월 200여문의 야포에서 5000발이 넘는 포탄을 쏘며 1차 진먼다오 포격을 실시했다. 1958년에도 진먼다오에 47만여발의 포격을 가했다. 포격은 60년대 말까지도 수시로 이뤄졌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장제스와 토종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의 성향이 그대로 양안 관계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설계자로 불리는 덩샤오핑이 중국의 실권을 잡고 대만에서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총통이 집권하면서 양안 관계는 개선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통상, 통항, 통신의 ‘3통’ 개방과 경제, 문화, 체육, 과학기술 교류를 제시하면서 양안 관계 개선 시동을 걸었다. 장징궈 대만 총통은 1987년 중국 대륙에 친척이 있는 대만인들의 중국 방문을 허용하는 탐친법(探親法)을 제정하면서 3불 정책을 철회했다. 개혁개방 시기 대만에 인접한 중국의 저장·푸젠성 등에서는 대만 자본의 투자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장제스 25년 ‘3불’ 깬
덩샤오핑-장징궈의 ‘3통’ 로맨스
양안 관계는 민간 교류로 확대
시진핑-마잉주 유례없는 ’밀월’에도
해바라기 운동·우산시위로 역풍
내년 1월 대만 총통선거 변수지만
“민진당 집권해도 큰 변화 없을듯”
중국-대만 연도별 인적교류 및 교역액
1990년대 들어서면서 양안 관계는 민간 교류를 확대하면서 개선 속도를 냈다. 대만과 중국은 1991년 민간교류 단체인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와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를 설립하면서 교류 창구를 개설했다. 1992년에는 구체적인 성과물이 나왔다.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이 공인하는 ‘92공식’에 합의한 것이다. 1993년엔 해협회와 해기회 회담이 시진핑-마잉주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중국 덩샤오핑이나 대만의 리덩후이 총통과 두루 친분이 있던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가 중간에서 다리를 놨다. 싱가포르 쪽은 당시 양안 회담장인 호텔의 엘리베이터 2대를 가동해 회담장에 양쪽 대표단이 동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세심한 준비를 했다. 중국에서는 상하이 시장을 지낸 왕다오한 해협회장이 나왔고, 대만에서는 리덩후이 총통의 측근인 구전푸 회장이 나왔다. 두 사람은 이른바 ‘왕구 회담’을 통해 “정치적 주권이라는 어려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서로 실질적인 교류 협력에 초점을 맞추자”는 데 인식을 같이해 양안 교류를 정례화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 사이에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은 대만의 독립 분위기가 분출하고 하나의 중국을 부정할 때마다 무력 시위를 벌였다. 특히 1995년에는 중국과 대만이 별개라는 양국론을 펴는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미국 방문을 추진하자 대만 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듬해 3월에도 육·해·공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중국은 대만 맞은편 푸젠성에서 대만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자 설명회를 중단하지 않았다.
대만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이 집권한 2000년부터 2008년까지는 양안 관계의 경색기였다. 천 총통은 ‘대만과 중국은 각자의 나라’라는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을 주장하며 중국과 긴장관계를 이어갔다.
양안관계 주요 일지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 강화라는 친중 노선을 내세운 국민당 출신 마잉주 총통이 2008년 집권에 성공하면서 중국과 대만은 사상 유례없는 밀월기를 맞았다. 마 총통은 집권한 뒤 ‘대만의 독립이나 중국과의 통일을 모두 추진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3불’ 정책을 내세웠다. 11월엔 2차 양안회담이 열려 통상, 통항, 통신을 허용하는 대3통(大3通)에 합의했다. 2010년 5월에는 양안이 상호 관광사무소를 개설했고, 한달 뒤엔 5차 양안협상이 열려 중국-대만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에 해당하는 ‘양안경제기본협정’(ECFA)이 체결됐다. 이 협정은 상품 무역의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서비스 무역 개방, 투자 보장, 분쟁 해결, 지식재산권 보호 등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무역협정이다. 양안은 2012년 중반까지 800개 항목의 상품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했다. 이 무렵 양안 관계의 급속한 발전을 두고 ‘제3차 국-공 합작’ 또는 ‘차이완 시대’라는 말이 나왔다.
2013년 중국 국가주석에 취임한 시진핑 주석도 양안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그는 취임 직후인 2013년 2월과 6월 롄잔, 우보슝 국민당 명예주석을 잇따라 베이징에서 만났다. 지난해 2월엔 중국 난징에서 분단 뒤 65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이 아닌 양안 정부의 장관급 회담이 열려 ‘정치 대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
장즈쥔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과 왕위치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은 상시 대화채널 구축에 합의했다. 시 주석은 올해 5월 마잉주 총통을 이어 새로 국민당 주석에 오른 주리룬 주석을 베이징에서 만나 “어렵게 쌓아온 양안 관계 협력의 성과물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국민당에 힘을 실었다. 9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 70주년 열병식에 롄잔 국민당 명예주석을 초청하면서 항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공로를 일정 부분 인정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양안의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는 급속히 늘어 지난해 1983억달러(214조원)에 이르며 인적 교류도 941만명에 이르렀다.
역풍은 다시 불었다. 대만에서 지나친 중국 경도 현상에 대한 우려가 행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만 대학생들은 지난해 3월 중국과의 급격한 경제협력 확대가 대만의 경제를 중국에 예속시키고 자신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면서 20여일 동안 대만 입법원을 점거하는 ‘해바라기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중국과의 경협으로 대기업만 배를 불렸을 뿐 제조업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의 일자리는 임금이 저렴한 중국인들에게 빼앗겼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이들은 양안 장관급 회담이 열리는 회담장 밖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여기다 지난해 10월 홍콩을 민주화 열기로 들끓게 했던 ‘우산 시위’의 여파도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다. 중국은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완전 자유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 시위대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묵살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들은 “홍콩 민주화 요구의 배후에는 중국을 적대시하는 서방 세력의 개입이 있다”며 이들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속에 주민의 고도자치를 허용하는 제도)를 흔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국양제는 중국이 대만에도 적용하는 제도인 까닭에 대만인들은 중국과의 통일은 자치권이 보장되지 않는 공산당의 통치라는 인식을 지니게 됐다.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대만에서는 이들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게다가 시진핑 집권 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언론 단속과 사상 이념 통제 강화는 대만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 홍콩 시위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중국과의 통일을 지지한다는 답변이 12%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해 11월29일 치러진 대만 지방선거에서 이런 민심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집권 국민당은 전국 6개 직할시와 현, 시 등 22개 단체장 선거에서 단 6석밖에 건지지 못했다. 이는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옮겨온 뒤 최대의 참패로, 당시 대만 언론들은 “국민당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굴곡을 거듭해온 양안 관계는 내년 1월16일로 예정된 총통선거와 입법원 선거(한국의 총선)를 분기점으로 또다시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판세는 민진당의 일방적인 우세다. 국민당은 지난달 총통 후보였던 훙슈주 전 입법원 부원장을 주리룬 주석으로 교체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럼에도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갑절 가까이 그를 따돌리고 있다.
차이 후보는 대만 독립 노선을 내세우거나 92공식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온건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으로선 국민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보다는 달갑지 않다. 중국은 1996년 장쩌민 주석 시절 무력 시위를 통해 대만 독립을 내세운 리덩후이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는 노골적인 수단 대신, 위험 부담이 적은 수단으로 대만 총통선거에 개입하고 있다. 시 주석이 분단 뒤 처음 공산당 총서기 자격이 아닌 국가 지도자 자격으로 마잉주 총통을 만나는 것도 이런 ‘소프트 개입’의 일환이다. 앞서 6월엔 위정성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대만 독립 및 분열 세력은 양안 관계 발전을 가로막고 동포간 결합을 막는 최대 장애물”이라며 “대륙을 오가는 대만 동포들에게 입경 허가증을 면제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중국과 긴밀한 국민당 지지 성향의 대만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훈수다.
한 베이징 외교소식통은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더라도 이미 1000만명에 육박하는 인적 교류와 대만 무역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의 경제적 비중을 볼 때 급격한 대중국 정책 변화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며 “다만, 향후 그가 어떤 대중국 메시지를 던질지, 중국의 반응은 어떨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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