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4일 금요일

통영 바다는 사시사철 제철이다

다도해의 비경과 항구도시의 활기 속에, 시인 유치환은 우체국 창문 앞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화가 이중섭은 눈길 닿는 풍경마다 화폭에 담으며 일생의 역작들을 쏟아냈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통영에선 싱싱한 활어회 한 점도 시가 되고, 그림이 됐다. 사철 푸른 바다가 지핀 정념이었다.

‘동양의 나폴리’란 수식어를 낳은 통영운하는 낮보다 밤에 더 아름답다.
통영의 별미 도다리 쑥국은 봄이 제철이라지만 통영은 사시사철 제철이다. 바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리 푸르고, 그 앞에서 붕붕 설레거나 돌연 아득해지는 마음은 소년이건 노인이건 다를 바 없다. 바닷가에선 손을 맞잡고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다가도 서로 다른 그리움을 더듬게 되는 순간이 흔하다. 하여 바다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은 되도록 외면하는 편이 좋다. 깍지 낀 손으로도 닿을 수 없는 먼 마음에 괜스레 서운해지지 않으려거든 말이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백석, ‘통영2’ 중에서)

해안 산책로가 아름다운 이순신공원은 한산도 앞바다를 조망한다.
통영 출신도 아니건만 시인 백석은 통영에 대한 시를 세 편이나 남겼다. 시인이 한때 마음에 품었던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호리낭창’한 소녀의 고향이기도 하거니와, 삶의 활기와 한려수도의 비경이 어우러진 항구도시의 유려함은 시정(詩情)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리라. 통영의 아름다움에 반한 예술가로는 화가 이중섭도 빼놓을 수 없다. 1년여 통영에 머무는 동안 이중섭은 유독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초가가 있는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등이 그가 화폭에 담아낸 통영이다.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황소’와 같은 대표작도 통영에 머물던 시절에 탄생했다.

사실 통영은 예술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시인 유치환·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극작가 유치진,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 통영에서 나고 자란 예인들을 손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또 예부터 통영자개, 통영갓, 통영소반의 명성을 떨쳐온 명품 생활 공예 산지이기도 한데, 통영이 낳은 작가는 이 땅의 탐미적인 취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 바 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 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됐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눈길 닿는 곳마다 일렁이는 쪽빛통영 공예의 발전사를 짚기 위해선 먼저 지명의 유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준말로, 삼도(충청·전라·경상도) 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의 본진을 뜻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 한산도에 설치한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사람과 물자가 몰리는 전쟁은 공예 발달의 단초가 됐다.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통제영 부속기관으로 들어섰던 각종 공방들은 전쟁이 끝난 뒤 부채, 장석, 가죽, 철물, 고리짝, 목가구, 나전칠기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어냈다.

산양일주도로를 달리다 휴식을 취하기 좋은 달아공원은 아름다운 낙조로 유명하다.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 전경. 통영운하를 사이에 두고 여객선터미널과 강구안, 남망산조각공원, 동호만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명에 이미 충무공의 정신이 깃든 고장인 만큼 통영엔 이순신 장군 유적지가 숱하다. 한산대첩의 무대인 한산도 제승당,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던 세병관 등이 그것. 1603년 6대 통제사로 취임한 이경준이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자 지은 세병관은 조선 수군의 본영다운 위풍당당한 기운이 인상적이다. 남다른 규모의 거대한 현판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데, 힘찬 필체로 새긴 ‘세병관(洗兵館)’은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 중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라는 뜻을 지닌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이름이다. 출입문의 이름 또한 ‘창을 거둔다’라는 뜻을 지닌 지과문(止戈門)임을 감안할 때, 평화에 대한 염원을 실은 건물이라 하겠다.

최근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은 이순신공원엔 높이 17.3m의 장군 동상이 한산도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돌아서기엔 영 아까운 곳. 바다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 산책로는 시간을 내어 꼭 한 번 걸어볼 만하다. 쪽빛 바다와 초록이 짙은 잔디밭, 잘 정비된 목책로가 어우러진 풍광이 평화롭다. ‘공원’이라 이름한 통영 시내 관광지들은 모두 바다를 바라본다. 횟집이나 펜션 이름으로 흔한 이른바 ‘바다 정원’인 셈. 짙은 수목의 향기 속에 바다 조망의 프리미엄이 더해졌으니, 공원 산책만 해도 통영 여행의 본전은 뽑은 셈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 잡은 공원은 일출과 일몰 명소이기도 하다. 일출 감상엔 미륵산 전망대와 국내외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한 남망산국제조각공원이 적격이다. 미륵산 전망대에선 섬 너머 섬이 끝없이 펼쳐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데, 맑은 날엔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꿈길 드라이브 60리’라 불리는 산양일주도로 중간에 위치한 달아공원은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떠오르는 해도 지는 해도 하늘과 바다, 섬과 섬 사이를 붉게 물들이는 것은 동일하건만, 낙조는 어둠으로 이어지기에 더 잔영이 깊다. 세상 끝에 이른 듯 장엄한 풍경이 바다를 무대로 펼쳐진다.

담벼락마다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인 동피랑 마을에선 할매 바리스타들이 내려주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시인을 키운 건 8할이 바다다볼거리가 지천인 통영은 먹을거리도 지천이라, 통영 여행의 참맛은 식도락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맛으로 치자면 전라도라 일컬어지는 통영인즉, 경상도 음식 별 볼 일 없다는 말이 쑥 들어갈 것이다. 일단, 소매물도와 욕지도 등의 섬 여행을 위해 여객선터미널에 새벽같이 도착했다면, 터미널 앞 서호시장 쪽에 늘어선 충무김밥 집에 들러볼 일이다. 속 재료 없이 맨밥을 김에 둘둘 만 심심한 김밥에 아삭한 섞박지와 매콤한 오징어무침을 곁들인 충무김밥은 단연 통영이 원조다. 풍요로운 술자리를 경험할 수 있는 다찌집도 놓치면 아쉽다. 

“통영을 알려면 다찌집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통영의 술 문화를 대표하는 다찌는 술 한 병을 시킬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한 상 가득 깔리는 통영식 술집이다. 다찌의 매력은 해산물 뷔페라 할 풍성한 상차림인데, 선도 좋은 해산물을 골고루 맛보는 즐거움에 술병을 줄 세우기 십상이다. 다찌집이 남긴 숙취는 시락국과 졸복국이 책임진다. 장어를 푹 고아 시래기를 넣고 끓인 시락국과 엄지만 한 졸복에 콩나물과 미나리를 담뿍 넣어 맑게 끓인 졸복국은 해장의 아침으론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자 통영의 고유한 별미 중 하나다. 통영 특산물인 굴 요리와 활어 도매 전문 시장인 중앙시장에서 뜨는 싱싱한 활어회도 두루 만족스럽다.

중앙시장 뒤편으론 ‘통영의 몽마르트’라 불리는 동피랑이 자리하고 있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탈을 이르는 말. 하늘과 맞닿은 달동네 벽면엔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물고기가 날고, 꽃이 핀다. ‘할매 바리스타’들이 아메리카노와 식혜를 내는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강구안의 풍경도 볼만하다. 강구안 문화마당에선 거북선을 구경할 수 있다. 포구와 마주한 골목길 곳곳에서 이중섭의 그림과 윤이상의 악보를 형상화한 조형 작품, 백석의 시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선 수군의 본영답게 힘찬 건축미를 자랑하는 세병관은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자 지은 건물이다. 푸른 바다와 함께 국내외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남망산국제조각공원은 일출 명소로 손꼽힌다.
통영의 야경 명소는 운하다. 길이 1,420m, 너비 55m로 통영반도 남단과 미륵도 사이를 흐르는 통영운하는 그 아래로 해저 터널을 품고 있다. 운하를 가로지른 무지개 모양의 통영대교는 야경 촬영 포인트로 인기가 많다. 다리 위의 오색 조명과 도로변의 가로등불이 바닷물에 아롱이는 풍경은 ‘동양의 나폴리’라는 수식어의 근거가 된다.

개인적으로 통영은 그 숱한 예인들의 고향이기 이전에 내 아버지의 고향으로 먼저 다가오는 곳이다. 아버지와 함께 통영을 찾았던 어느 봄날. 충렬사 옆에 자리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버지는 60년 전의 교가를 흥얼거렸다. 무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의 노래였다. 통통하게 살 오른 도다리와 향긋한 쑥이 기막힌 조화를 빚어내는 도다리 쑥국 한 그릇씩을 싹 비우고 항구를 걷던 중이었을 게다. 말 수 적은 아버지가 웬일인지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다.

“우린 여길 나폴리라 불렀다. 학생모를 일부러 빼뚜름하게 쓰고, 교복바지 뒷주머니엔 늘 하모니카를 꽂고 다녔지. 하모니카로 못 부는 노래가 없었어. 그때 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지.”

강구안 골목길 곳곳에서 이중섭의 그림과 윤이상의 악보를 형상화한 조형 작품, 백석의 시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거북선을 구경할 수 있는 강구안 문화마당. 강구안은 육지로 바다가 들어와 형성된 항구를 뜻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은 아버지, 그 늙은 소년의 옆모습을 훔치다가 문득 이런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통영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시 한 줄, 그림 한 점, 노래 한 가락을 품고 있다, 라는. 그리고 그들의 시심(詩心)을 키운 8할은 ‘바다’라고 확신했다. 이 땅에선 전쟁 중의 장수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시를 짓지 않았던가. 짙푸른 바다와 별처럼 흩뿌려진 섬 무리를 조망하노라면, 시퍼런 칼날 위에도 동백처럼 붉은 정념이 절로 지폈으리라. 통영의 시인 김춘수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소회와 함께 그의 문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즘도 나는 화창한 대낮 길을 가다가 문득 어디선가 갈매기 우는 소리를 듣곤 한다. 물론 환청이다.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 나는 자주자주 바다를 꿈에서만 보곤 했다. 바다, 특히 통영(내 고향) 앞 바다- 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시인 김춘수)


Tip 통영 문학 기행
산양읍에 자리한 박경리기념관은 달아공원과 연계해 들러볼 만하다. 고인의 대표작인 「토지」 친필 원고와 유품 전시실,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실, 책과 작품에 관한 논문 등을 모아놓은 자료실을 갖췄다. 시인 유치환을 기리는 청마문학관은 강구안에서 멀지 않은 정량동 망일봉 기슭에 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문학관 안엔 청마의 육필 원고와 그가 무려 5,000여 통의 연서를 바쳤던 이영도 시조 시인의 저서가 눈길을 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시구절을 이끌어낸 청마의 뮤즈다.
<기사 출처 : 레이디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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