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7일 월요일

계란으로 바위치는 의료분쟁… 피해자 속은 숯덩이가 됐다

“하반신 마비된 아들 너무 억울
의료 소송 서류 준비만 3년” 한탄
환자가 직접 의료 과실 입증 책임
민사소송 960건에 원고 승소 단 14건
조정기구 의료중재원 만들었지만
병원 동의 없으면 조정절차도 못 해

“의료분쟁이 일어나면 환자가 모든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전문적인 내용이고 병원에서 주는 기록에 의존해 병원 측의 과실을 밝혀내야 하니 몇 배는 더 힘이 듭니다.” 

최용덕(54)씨는 3년 전인 2012년 9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상대로 기약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2010년 이 병원에서 척추교정 수술 후 하반신 마비가 온 아들(12)에 대한 병원측의 과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주위에서 의료소송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만류했지만, 평생 걷지 못하게 된 아들을 보면서 최씨는 “원인만은 반드시 밝혀야겠다”며 소송을 결심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상대로 의료소송을 진행 중인 최용덕씨가 6일 아들이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한 병원에서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5년 전 찾아 온 시련… 그리고 골리앗과의 싸움 

2010년 2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최씨의 늦둥이 아들(당시 7세)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척추교정수술을 받고 하반신이 마비됐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아들의 재활치료에만 매진했다. 하지만 아들의 장애등급 심사를 위해 국민연금공단에 제출한 진료기록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최씨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1번부터 8번까지 수술 방법이 적힌 수술 기록지에는 5, 6번이 빠져있었고, 서류마다 서명도 달랐다. 병원 측은 “단순 실수”라거나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결국 소송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영문 진료기록지와 서류를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그를 좌절하게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아들이 재활치료를 받는 병원 의사들에게 물어 물어 궁금증을 해소해갔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고민 끝에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증거를 찾고 피해 사실을 밝혀내는 일은 최씨의 몫이었다. 올해 6월부터는 변호사 없는‘나 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전문 변호사를 선임할까도 생각했지만 착수금만 1,000만원이 넘었다. 최씨는 일용직 건설노동을 하다가 아들의 사고 후에는 전적으로 아들에 매달려 있다. 가족의 생계를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아내가 책임지는 실정이다. 최씨는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급여내역을 확인하다가 병원이‘골수염ㆍ골농양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수술 과정에서 세균에 감염돼 아들의 다리가 마비된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원은 “다른 수술을 시행한 경우에도 골수염ㆍ골농양 수술 항목을 준용해 요양급여비용을 청구하기도 한다’며 해당 수술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소송을 제기한 지 3년이 넘었지만 아직 1심도 열리지 않았다. 각자 주장을 증명하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는 데만 이만큼 시간이 걸린 것이다. 최씨는 “피해 입증이 정말 어렵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증책임은 환자가…의료중재원 한계도 명백 

의료사고와 관련된 민사소송은 해마다 1,000건 가까이 접수되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발행하는 ‘사법연감’에 따르면 의료사고와 관련된 손해배상 소송은 2010년 871건에서 2013년 1,101건으로 늘었다. 그러나 승소율은 낮다. 지난해 처리된 960건의 사건 가운데 원고가 이긴 경우는 14건으로 승소율은 1.4%에 그쳤다. 지난해 일반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율은 10.6%로 의료사고 원고 승소율은 일반 소송의 7분의 1수준이다. 의료소송은 원고 일부 승소까지 포함해도 승소율은 31.3% 정도다. 

승소율이 낮은 건 입증책임이 의료과실을 주장하는 환자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환자는 의료인의 과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한다. 전문지식을 요하는 분야인데다, 병원에서 작성한 기록을 가지고 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환자들은 “기록 자체가 조작되는 경우도 많다”고 주장한다. 소송에 평균 2년 2개월이 걸리고, 소송 비용도 1심에서만 평균 500만원 이상이 들 정도로 환자의 부담이 크지만 승소할 가능성은 낮은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2012년 4월 정부는 의료분쟁 조정기구인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만들었지만 한계가 명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현행법(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병원 동의 없이는 조정절차를 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의료중재원에 접수된 의료분쟁 조정 신청건수는 1,895건으로 이 가운데 864건(조정 개시율 45.6%)만 조정절차에 들어갔다. 병원이 동의하지 않아 접수 사건의 절반도 처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처리되는 사건도 소액 중심이라 결국 금액이 큰 사건은 소송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의료중재원에서 합의ㆍ조정된 금액을 보면 500만원 이하가 64.9%를 차지했다. 


조정 절차 자동개시 ‘신해철 법’ 통과될까 

이 같은 지적 때문에 지난해 3월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의료중재원에 사건이 접수되면 자동으로 조정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이른바 ‘신해철 법’을 발의했지만 1년 반이 넘도록 아직까지 해당 상임위에서 심의 한 번 이뤄지지 않았다. 의료사고로 숨진 고 신해철씨 부인 윤원희씨가 지난달 국회에 신해철 법안 심사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그나마 다시 사회적 주목을 끌고 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료사고는 피해자가 최대한 빨리 증거를 수집하는 게 중요하지만 의료중재원에 신청했다 병원 측이 거부하면 약 한 달을 버리게 된다”며 “적어도 사망과 중상해가 발생한 의료사고의 경우 조정이 자동 개시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폐기 위기에 처한 신해철법을 살리자는 여론이 불 붙은데다 상임위 의원 중 특별히 반대하는 의원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지난달 3일 이와 유사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김정록 새누리당 의원은 “연내 임시국회가 열리면 충분히 논의할 것”이라며 “해당 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변수는 병원들의 완강한 반대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의료진의 과실이 아닌 의사소통의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도 많아 행정력 낭비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대형병원 관계자는 “의료진이 분쟁 소지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방어적인 진료를 하게 돼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기사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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