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4일 화요일

내비게이션 의존 시대…“뇌 기능이 퇴화된다”

똑똑한 기계에 기대다 미궁속
‘구글 어스 프로’ 프로그램으로 내려다본 프랑스 파리 에펠탑. 구글 어스 프로
지난 20일 경기도 파주로 차를 몰고 나갔다. 주말까지 모두 5일이었던 긴 설 연휴의 중간에 잠시 바람도 쐬고 일도 할 겸 파주출판도시의 도서관 ‘지혜의 숲’을 찾았다. 두번째 가는 길이었는데, 지난번에 이어 이날도 함께 나선 동행인은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내비게이션 때문이었다. 초행 때 내비게이션은 이상한 길로 안내하며 말썽을 부렸다. 분명 부근의 음식점을 목적지로 찍었음에도 40분가량 걸리는 길을 안내하는 식이었다. 또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5분 전 분명 아웃렛 매장을 지났는데 다시 그 매장이 나타나 당황한 적도 있었다. 신뢰를 잃은 내비게이션 대신 스마트폰의 앱에 길 안내를 맡겼다. 길안내 전용 기기보다 스마트폰이 훨씬 뛰어난 결과를 보여줬다.

디지털 기술과 지피에스(GPS·위성항법시스템)가 결합한 차량 내비게이션은 유용한 기술이다. 3300만명이 이동했다는 이번 설과 같은 ‘민족의 대이동’ 기간이면 많은 이들이 새삼 그 가치를 실감한다. 내비게이션 없는 운전은 아예 생각도 못 하는 운전자들도 늘고 있다.



시애틀 교각과 충돌한 버스 기사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로 운전”
설원 위 생존력 뛰어난 이누이트족도
스마트기기 의존하는 생활로 바뀐 뒤
갑자기 기기 작동 멈추면 ‘치명적 사고’ 




‘구글 어스 프로’ 프로그램으로 내려다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구글 어스 프로
내비게이션이 오늘날처럼 대중화된 데는 우리나라와 연관이 깊다.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여객기(칼기)가 피격된 비극적 사건이 계기였다. 1983년 9월1일 미국 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경유해 서울로 향하던 보잉747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하여 소련의 영공을 침범하자 소련 전투기가 출동하여 격추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 81명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승객과 승무원 267명이 숨졌다. 소련의 행동에 대한 거센 비난과 국제적 긴장이 이어졌다. 이후 비슷한 비극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위성항법시스템 사용을 민간에 개방했다. 그때까지 미국의 군사기술로 묶여 있던 것이었다.

컴퓨터만 열면 당장 책상 앞에서 지구상 어느 곳이나 위성에서 내려다본 사진을 구할 수 있는 요즘은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 되어버린 이야기다. 대표적인 서비스가 구글의 ‘구글 어스’다. 이 모니터 안의 지구본만 있으면 파리의 에펠탑에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미국 그랜드캐니언에서 평양 만경대까지 날개 단 천사처럼 날아다닐 수 있다. 구글은 지난달 말, 이전에 월 사용료 400달러(44만원)에 달했던 ‘구글 어스 프로’ 프로그램을 무료로 전환했다. 기존의 무료 프로그램이 1000×1000의 해상도였던 것에 비해 구글 어스 프로는 4800×3200의 고해상도를 제공하며 거리 측정 기능과 동영상 녹화 기능 등을 제공한다. 세계는 더 자세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우리 모니터에 담기게 되었다. 고가의 프로그램을 무료로 일반에 공개한 이유에 대해 구글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다양한 디지털 지도들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프로’만의 매력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끌기는 부족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무료화로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인 뒤 다른 사업을 모색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네이버 지도, 다음 지도 등 국내에도 편리한 디지털 지도들이 많다. 운전에서 시작해서 걷는 것조차 손안의 앱을 들여다보며 따라가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지형지물을 찾고 주변에 길을 묻는 일들은 점점 줄고 있다. 스크린이 눈과 귀를 대신하는 과정은 이제 거스르지 못할 흐름처럼 보인다. 디지털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해온 저술가 니컬러스 카는 이를 그저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구글 어스 프로’ 프로그램으로 내려다본 북한 평양 만경대. 구글 어스 프로
카는 최근 저서 <유리감옥>에서 디지털 지도 덕에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2008년 미국 시애틀에서 특이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고등학교 운동선수들을 태운 버스를 몰던 운전사가 콘크리트 다리를 들이받은 사고였다. 버스 높이보다 낮은 다리를 통과하려다 빚어진 이 사고에서 학생 21명이 다쳤다. 경찰 조사에서 운전사는 “지피에스가 알려준 대로 운전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내비게이션은 다리 높이에 대한 경고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극권의 이누이트족은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면서 대대로 전승되어온 눈밭에서 길찾기 능력을 잃어버리고 기기가 고장나는 순간,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생겨나고 있다. 

‘구글 어스 프로’ 프로그램으로 내려다본 서울 광화문 광장의 모습. 구글 어스 프로
기술에 대한 신뢰가 주는 그늘이다. 하지만 이는 어쩌다 일어나는 사고 정도로 제한적인 경우에 불과하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소프트웨어에 의존하는 삶이 가져올 더 큰 위험을 지적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점차 자동화된 인형처럼 변해갈 위험이다. 내비게이션에 길찾기를 외주화하면서 우리 뇌에서 길찾기와 연관된 기능들이 점차 퇴화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카는 독일의 인지심리학자 줄리아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해 “길을 찾기 위해 기계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는 인지적 지도를 점점 더 만들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한 연구 결과는 종이 지도를 사용하는 운전사들이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는 운전사보다 주변을 더 잘 기억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번 파주 여행을 다녀온 뒤 5분 간격으로 같은 아웃렛을 지나쳐온 미스터리는 풀렸다. 실은 둘이 서로 다른 아웃렛이었던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운전자의 눈을 대신하면서 주변에 대한 관심은 모니터로 후퇴했고 나는 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 어땠을까? 못 봤던 새 아웃렛을 발견했다며 둘러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사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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